“ 상해파-이르쿠츠크파-임정 세력 간 대충돌 와중에서 김규식은 1918년 이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게 된 셈이다. 상해파는 그가 상해 임시정부 대표로 친미 외교 활동을 벌인 주역이라고 비난했고, 임시정부 특사단은 임정을 폄하하는 가장 사악한 인물이자 중풍 환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이 그의 고려공산당 활동을 중단시키기에 이르자 짧은 고려공산당원 생활도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의 삶을 규정해 온 상해 임시정부와의 연계망, 인간관계의 그물망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은 듯했다.
모스크바행에서 김규식의 일면이 드러났다. 이것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차이점이기도 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으로 공산주의 문헌을 번역하는 적극 선전자였던 여운형은 모스크바에서 다른 선택과 판단을 했다. 모스크바 체류 중 여운형은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선전에 의문을 가졌고, 외교 교섭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로 갔다가 만주로 돌아오는 도중 여운형은 독자적 조사를 통해 자유시 참변의 실상이 극동 민족 대회의 보고와는 달리 마녀 사냥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강덕상의 해석에 따르면 여운형이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창조파의 입장을 견지한 김규식과는 달리 개조파로 남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정통 이르쿠츠크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여운형은 반대파에 의해 억류되거나 테러를 당할 위험에 처했다. 여운형은 이르쿠츠크-만주리를 거쳐 체포를 면하고 겨우 하얼빈으로 와서, 동화대학 교장이자 공산당원으로 여운형의 친구인 등려민의 자택에 도착했다. 여운형은 장춘-봉천-천진-북경을 거쳐 상해로 귀환했는데, 장춘과 봉천에서는 체포하려는 밀정을 피해 해당 역 이전에 내려서 다음 역에서 탑승하는 일을 반복했다. 여운형은 1922년 3월 하순에 고려공산당 합동 문제를 신채호, 박용만 등과 논의하기 위해 천진으로 갔고, 4월에는 북경에서 개최된 북경 만국 기독교 청년회 회의에 참석한 이상재, 여운홍, 김필례, 신흥우 등에게 극동 민족 대회의 경과를 알렸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권 1장 3절, 110~111쪽,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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