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일전쟁 발발로 항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중국국민당은 더는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제공하는 데 적극적 입장을 취하였다. …. 대부분 김원봉 계열이었던 청년 83명이 입학해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았다. 398
염인호에 따르면 청산화부와 왕봉생은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을 건설하는 동시에 산하에 국에의용군의 일환으로 조선의용군을 만들려고 했는데, 김원봉 등은 조선의용군을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의 지휘하에 두는데 반대했다. 양측의 협의 결과, 한중 대표로 구성된 지도위원회가 지도하는 국제 의용군으로 조선의용군을 창설하는 방안이 작성되었다. 402
그러나 조선의용대 내부에는 동북, 만주 진출 노선 대 관내 잔류노선의 대립, 김원봉 등 온건 좌파와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들 간 사상적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갈등요소가 상존하고 있었다. 405
반공적인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특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는 상황속에서 급진적, 좌파적 지향을 견지한다는 김원봉의 입장은 중국공산당 및 팔로군과 결합해 동북노선을 주장하던 최창익 등 진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선명성을 잃었다. 반공적 중국국민등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보적, 좌파적 노선을 지향한다는 김원봉의 존재론적 한계였다. 406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정부의 후원과 후의에 의해 성립될 수 있었으며, 중국국민당 정부를 빛내는 국제의용군으로서의 위상을 지녔으나, 그 주력이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북상함으로써 중국국민당에게 모욕적인 배반을 안겼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의 중경내 위상과 앞날은 예측불허의 곤경에 처했다. 410
중국국민당의 지원과 지지를 둘러싼 김구-김원봉의 대립과 대결은 중일전쟁과 환남사변 사이의 시대 상황에 따라 출렁거렸던 것이다. 4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국민당정부가 항일전쟁의 와중에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정치조직인 임시정부를 후대하고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도록 지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422
태평양전쟁기는 독립전쟁을 향한 한국독립운동 세력의 투쟁이 고조되고, 한중, 한미 간 국제연대가 본격화되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전후 대한국 영향력 활보를 둘러싸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한국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쟁탈하려고 각축하는 시기였다. 423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지는 명확하게 한국독립당,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으로 기울었고,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흡수, 통합되는 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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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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