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도 몇년 전에 저 <경성 트로이카> 재밌게 읽었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2. <김규식과 그의 시대> (2)
D-29

stella15

YG
어제 읽은 대목 중에 인상적이었던 부분이었답니다. 김원봉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니, 김규식(1881년생)보다 열일곱 살 어렸습니다. (저는 나이 차이가 둘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구는 1876년생이니 김규식보다 다섯 살 많았고, 김원봉보다는 무려 스물두 살이 많았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생으로 김구와는 같은 또래였고요.
저는 이런 나이 차이와 세대 경험이 김구-이승만, 김구-김규식, 김구-김원봉, 김규식-김원봉의 관계를 규정 지은 핵심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YG
“ 의열단 창립 이래 애국적 청년, 학생의 선망 대상이자 의열 투쟁의 선봉이며 가장 치열한 삶의 전형으로 알려진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1930년대 후반에는) 소극적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로 청년 군관들의 비판 대상이자, 공산주의자들의 비난 표적이 된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현실적 판단과 이성적 입장은 이상주의적 열망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허물어졌다. 중국 관내에서 진보적이고 적극적 입장을 자처했던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급진적 민족주의 청년 들과 공산주의자의 결합 속에 변명과 주저하는 태도의 보수주의자로 위치 지워졌다. 반공적인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특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는 상황 속에서 급진적, 좌파적 지향을 견지한다는 김원봉의 입장은 중국공산당 및 팔로군과 결합해 동북 노선을 주장하던 최창익 등 진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선명성을 잃었다. 반공적 중국 국민당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보적, 좌파적 노선을 지향한다는 김원봉의 존재론적 한계였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3권 6장 2절, 406쪽,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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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덧붙이면, 이때 김원봉에게 반기를 들었던 선명한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1895년생으로 김원봉보다 세 살 많습니다. 최창익은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주고 박헌영 등의 숙청에 앞장서는 등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다, 1956년 8월(이른바 '8월 종파 사건') 이후 김일성이 중국과 선을 긋기 시작하면서 중국계(연안파) 사회주의를 제거할 때 대표 인사로 숙청을 당하게 됩니다(1960년 1월 처형).

오구오구
최창익. 이분도 찾아보았는데 결국 숙청되었더라구요 ㅠ

향팔
학교 다닐 때 들은 ‘북한학입문’ 강의에서 ‘8월 종파사건’이 엄청 중요하다고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 납니다. 김원봉도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 숙청되고 김일성 독재 체제가 공고화되었다고 했던 것 같아요.

오구오구
그렇네요
좀더 입체적으로 관계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향팔
“ 1932년 이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흘러나온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훈련 제공은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기회였다. 이는 김구·임시정부·한국광복군과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라는 2개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동시에 국민당 지역 내 보수적·우파적 흐름과 진보 적·좌파적 흐름의 대결을 불러일으켰다. 중국국민당의 지원과 후원은 한국 독립운동 활성화의 기회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각축하는 두 세력의 분립·대결의 원천이 되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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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통일을 향한 시도가 분열을 가져왔고, 다른 통합은 내적 파열을 안은 채 출발하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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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김규식은 1930년대 초반 전력을 다했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민족혁명당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중국 관내 좌파 통일전선의 지도자, 한중연대의 지도자, 재미한인의 대표자로서 면목을 잃게 되었다. 재정적 후원과 조직적 기반이 없는 김규식의 현실적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정부로부터 흘러나온 재정적 후원과 군사적 지원은 김원봉·의열단과 김구·한인애국단의 두 갈래 흐름을 만들어 냈고, 두 세력은 중국 관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정치 조직인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한국독립당),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으로 분립했다. 그 속에서 명망가이자 외교가였던 김규식의 입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었기에, 김규식은 1935년 하반기 홀연히 민족혁명당과 임시정부 모두를 떠났다. 그의 선택은 사천성 성도에 있는 국립 사천대학 교수였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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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 의열단 창립이래 애국적 청년.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의열투쟁의 선봉이며 가장 치열한 삶의 전형으로 알려진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소극적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로 청년군관들의 비판 대상이자, 공산주의자들의 비난 표적이 된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현실적 판단과 이성적 입장은 이상주의적 열망과 공산주의들의 선전에 허물어졌다.
(…) 반공적 중국국민당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보적.좌파적 노선을 지향한다는 김원봉의 존재론적 한계였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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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a
“ 1940년 4월에 이르러 중국국민당은 광복진선(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의 병존, 한국청년전지공작대(광복군)와 조서의용대의 병립을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중국국민당이 제1차 반공고조기(1939.12~1940.3)에 접어들면서, 국공합작 대신 중국공산당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국민당 반공 활동은 환남사변(1941.1)으로 폭발했으며,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 적지 않던 조선의용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조된 반면 반공적 입장이 확실한 임정을 우대한 결과 광복군 창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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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과거와 현재를 극적으로 대비시킨 이 연설을 다른 사람이 아닌 파리강화회의 특사 김규식이 행한 것이다. 핵심은 간단했다. 과거 모스크바는 제국이 폭정과 팽창을 대표했고 워싱턴은 미국식 자유주의, 민주주의, 번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세상은 정반대로 변했다.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중심으로 극동의 피압박 인민들의 혁명운동을 환영하는 반면 워싱턴은 세계 자본주의 착취및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이 되었다. 러시아혁명의 불꽃을 얻어 모든 제국주의 및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잿더미로 불태우자고 외친 것이다. 코민테른이 하고 싶은 이야기였고 구미 외교의 경험자로 유명한 김규식의 체험담이기도 했다. p65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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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안공근은 안창호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이승만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대통령 이승만을 배제한 대러 비밀외교의 주역 이동휘에 대한 비판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공근이 가장 격렬하게 비난한 것은 다름 아닌 김규식이었다. 김규식에 대한 평은 인신 모독적이었다.
안공근은 김규식에 대해 "영어와 중국어를 구사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인물""병세가 심각하다. 사지 중풍 증세가 종종 나타났다 사라진다. 사람이 완전히 환자가 되어 버렸다""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이고 "뇌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완전히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했다. 김규식은 "직접 신한청년당 명의를 도용해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오직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난했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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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김규식에게 이렇게 까지 비난할 일이 많은지 신기하네요^^;;

거북별85
“ 파리강화회의 특사 파견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3.1운동 발생에 큰 기여를 했던 김규식과 여운형은 불과 2년 뒤 모스크바 외교로 방향을 전환했다. 두 사람 모두 이르쿠츠크파와 연관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좀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친미적이고 합리적 인물로 알려졌던 김규식이었다. 때문에 김규식의 전환은 더 극적인 면모가 있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김규식은 이희경 등 임정대표단, 이동휘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대결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김규식이 얼마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수용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이 시점에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연대 및 후원의 대상으로 모스크바를 설정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핵심은 자금 지원과 독립운동의 통일에 있었다. 모스크바와 연관된 김규식의 관성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규식의 이러한 행적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문서보관소가 개방된 후에야 알 수 있게 된 사실이다. 유연한 여운형과 고지식한 김규식 1921-1922년 모스크바행에서 우리가 마주한 두 인물의 일면이었다. p112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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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동아일보>와 <신한민보>등에 따르면 김규식은 1924년 6월 초순 상해 인성학교 안에 예비 강습소를 설치했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기 전 중한국민호조사 상해총사가 시도한 인성학교 내 중국어학교, 김규식 중심의 남화학원의 연장선이었다. 다른 한편 1924년 9월 일제의 정보보고는 김규식이 상해 프랑스 조계 동방대학에 영어교사로 취직했다고 쓰고 있다.
이렇게 김규식의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은 끝을 맺었다. 그의 일생 중 가장 치열하게 극단으로 달려간 시기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지향했던 김규식은 임정의 분열, 국민대표회의 실패, 국민위원회의 우극에 도달한 후에야 멈춰섰다. 파리-워싱턴-하와이-시드니-상해-고륜-이르쿠츠크-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김규식의 대여정은 파란 속에 끝을 맺었다.
p194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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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귀결된 이후 한국 독립운동은 큰 침체를 벗어나기 어려웠다.파리강화회의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의 재편과 영구평화,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외교노선 실패에 근거한 새로운 방향 모색이었다. 전자가 미국과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재미한인들의 재정적 후원에 기초한 것이라면 후자는 러시아에 대한 희망과 러시아의 재정적 후원에 기초한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한 후 이승만의 <태평양잡지>(1924.10)는 이승만이 원치 않는 대통령을 맡은 것은 상해 모씨, 즉 안창호의 권고를 이기지 못한 것이며, 그 증거가 구미위원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신한민보>는 이렇게 반박했다. "국민대표회의 실패는 한성정부 파괴자의 실패보다 그 죄가 경하다. 피로 세운 한성정부가 국민대표회의 때문에 파괴된 것이 아니고 대통령 문제 때문에 파괴된 것이며 한성정부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국민대표회가 생김이다" p197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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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별85
“ 김염은 상해 복단대학 시절 김규식의 보수가 아주 보잘것없어서 김순애가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면서 생활을 꾸려갔다고 기억했다. 김순애 역시 김규식의 대학교수 월급이 은화 200원이었는데 자신이 와이셔츠 공장을 차려서 월 200원을 벌어 생계에 도움을 주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김염은 김규식의 첫째 아들이자 고종사촌이던 김진동과의 불화를 기록했다. 성격이 까탈스럽고 자신을 몸종처럼 대하며 집안일 뿐 아니라 자기 일도 맡기고 잔소리하며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p228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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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의열단 창립 이래 애국적 청년·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의열투쟁의 선봉이며 가장 치열한 삶의 전형으로 알려진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소극적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로 청년 군관들의 비판 대상이자, 공산주의자들의 비난 표적이 된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현실적 판단과 이성적 입장은 이상주의적 열망과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허물어졌다. 중국 관내에서 진보적이고 적극적 입장을 자처했던 김원봉과 민족혁명당은 급진적 민족주의 청년들과 공산주의자의 결합 속에 변명과 주저하는 태도의 보수주의자로 위치 지워졌다. 반공적인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특무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는 상황 속에서 급진적·좌파적 지향을 견지한다는 김원봉의 입장은 중국공산당 및 팔로군과 결합해 동북노선을 주장하던 최창익 등 진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선명성을 잃었다. 반공적 중국국민당의 후원을 받으면서 진보적·좌파적 노선을 지향한다는 김원봉의 존재론적 한계였다. ”
『[세트]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 세트 - 전3권』 정병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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