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의 <말뚝들> 혼자 읽어볼게요.

D-29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거짓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없어요. 말하기 곤란한 걸 생각할 때 그렇게들 말하죠." 데보라의 말을 듣고 장은 생각해봤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과연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처럼 울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네요." "신기해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186-187, 김홍 지음
장과 데보라의 대화도 참 좋았다. 대화가 반짝 반짝 빛나는 느낌.
"나중에 같이 한번 울어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었는데 같이 운 적은 없잖아요."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188, 김홍 지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속 시원하던 장의 말들이 점점 진해진다. 같이 우는 사이라니 참 좋을 거 같다.
데모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렇게 외면하면 눈물이 멈추네요." "맞아요. 울고 싶지 않으면 잘 숨어 있어야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무엇을요?" "이렇게 계속 살아가요? 말뚝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그러면 하염없이 울고?" "어쩌면 이 말뚝들이 나와 관계있을지도 몰라요." "어떤 관계?" "들어볼래요?" "계속 듣고 있잖아요. 나, 그런 거 좋아해요."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188, 김홍 지음
이런 대화를 나는 평생 바라고 있는 듯. 너무 좋았고 부럽다.
장은 떠올렸다. 저 많은 말뚝들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서 있던 바다의 풍경을. 파도가 그렇게 시끄러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192, 김홍 지음
어떻게든 진실을 이해시켜야 했다. 그는 이미 자기가 아는 진실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199, 김홍 지음
손해보는 걸 싫어하는 장이 아정씨 남편에게 오해받기를 자처할 줄 몰랐다...? ㄷㄷ
장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가어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게 정부에겐 비상사태였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03, 김홍 지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으라면 이 부분 아닐까.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48, 김홍 지음
바다를 볼 때마다 두렵고 마음이 아프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흐려진 것 같다. 간만에 다시 그 마음이 떠올랐다.
마음은 편안했다.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은 이제까지 삶에 대해 너무 큰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이쯤에서 인정하고 싶었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기적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명백한 느낌을 믿었다. 그들은 말뚝을 지킬 것이고, 말뚝을 지키려는 장을 지킬 것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로도 내내 장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65, 김홍 지음
나도 그런 것 같다. 미래를 생각하면 비관적이고 회의적인데, 아무래도 희망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희망을 믿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것 같다. 믿어버리면 그렇지 않은 미래가 왔을 때 너무 슬플까봐 지레 겁을 먹은 게 아닐까. 그만큼 희망을 원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을 믿고 마음을 쏟는 일이 나약해보여서 그걸 들킬까봐 거짓말을 하는 거일지도.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80, 김홍 지음
첫 부분이 경제에 무지한 나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공감했는데 이걸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니! 경제적인 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한테 한방 먹이는 문장. 아 이 문장을 이 책의 문장으로 꼽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네?
공황 발작이 덮쳐오면 장은 말뚝의 하얀빛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살면서 본 다른 빛이 많지만 그 빛처럼 힘을 주는 빛은 많지 않았다. 그때 생긴 구멍과 그때 생긴 빛이 싸울 때 빛을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빛의 기억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97, 김홍 지음
빛이 구멍도 함께 만들었다는 걸 말해서 너무 좋았다. 빛이 꼭 사람을 완전하게 꽉 채우진 못했지 오히려 구멍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힘을 주는 빛이 있다. 그걸 의심하기 싫다는 장의 말 멋졌다. 이것도 너무 좋은 문장.
빚과 빛의 차이도 좋았다. 비슷한 듯 다르다. 빚은 부정적이고 빛은 긍정적인 느낌이지만 어떤 빚은 빛을 만날 수 있고, 빛도 완전하게 빛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구멍을 낸다. 우리는 빚도 빛도 알 수 없다. 납치됐을 때 태이를 의심했지만 태이가 범인이 아니었고, 그때 납치 경험으로 위험한 순간에 장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상하고 엉망진창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빚과 빛이 있었다. 우리 인생, 관계들도 다 그렇겠지. 작가는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그냥 서로를 믿자고. 믿어도 되고 믿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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