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의 <말뚝들> 혼자 읽어볼게요.

D-29
장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가어럼 흘러 한자리에 모여든 이유는 울기 위해서였다. 우는 사람은 답답하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게 정부에겐 비상사태였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03, 김홍 지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으라면 이 부분 아닐까.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48, 김홍 지음
바다를 볼 때마다 두렵고 마음이 아프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흐려진 것 같다. 간만에 다시 그 마음이 떠올랐다.
마음은 편안했다. 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은 이제까지 삶에 대해 너무 큰 거짓말을 해왔다는 걸 이쯤에서 인정하고 싶었다. 희망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은 기적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명백한 느낌을 믿었다. 그들은 말뚝을 지킬 것이고, 말뚝을 지키려는 장을 지킬 것이었다. 그 사실은 이후로도 내내 장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두려움은 희미해졌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65, 김홍 지음
나도 그런 것 같다. 미래를 생각하면 비관적이고 회의적인데, 아무래도 희망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희망을 믿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것 같다. 믿어버리면 그렇지 않은 미래가 왔을 때 너무 슬플까봐 지레 겁을 먹은 게 아닐까. 그만큼 희망을 원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을 믿고 마음을 쏟는 일이 나약해보여서 그걸 들킬까봐 거짓말을 하는 거일지도.
큰 빚이 큰 부자를 만드는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하지만 우리의 빚은 저들의 것과 다르다.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다. 서로에게 내어준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눌러쓰고, 그 빚을 기억하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설득할 것이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80, 김홍 지음
첫 부분이 경제에 무지한 나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공감했는데 이걸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니! 경제적인 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한테 한방 먹이는 문장. 아 이 문장을 이 책의 문장으로 꼽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네?
공황 발작이 덮쳐오면 장은 말뚝의 하얀빛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살면서 본 다른 빛이 많지만 그 빛처럼 힘을 주는 빛은 많지 않았다. 그때 생긴 구멍과 그때 생긴 빛이 싸울 때 빛을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빛의 기억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97, 김홍 지음
빛이 구멍도 함께 만들었다는 걸 말해서 너무 좋았다. 빛이 꼭 사람을 완전하게 꽉 채우진 못했지 오히려 구멍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힘을 주는 빛이 있다. 그걸 의심하기 싫다는 장의 말 멋졌다. 이것도 너무 좋은 문장.
빚과 빛의 차이도 좋았다. 비슷한 듯 다르다. 빚은 부정적이고 빛은 긍정적인 느낌이지만 어떤 빚은 빛을 만날 수 있고, 빛도 완전하게 빛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구멍을 낸다. 우리는 빚도 빛도 알 수 없다. 납치됐을 때 태이를 의심했지만 태이가 범인이 아니었고, 그때 납치 경험으로 위험한 순간에 장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상하고 엉망진창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빚과 빛이 있었다. 우리 인생, 관계들도 다 그렇겠지. 작가는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그냥 서로를 믿자고. 믿어도 되고 믿을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장은 그 앞에 서서 아는 사람의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 안다고 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그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았다. 그의 어떤 것은 알 것 같기도 했는데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많았다. 너무 힘든 기억과 너무 힘이 되는 기억이 순서 없이 떠올라 무엇을 기억할지 결정하기가 매번 힘들었다. 그때의 모든 일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게 틀림없었다. 장이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 빚으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망해버린다.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300-301, 김홍 지음
"너의 모든 운을 여기서 시험하지 마."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303. 작가의 말, 김홍 지음
우리는 불행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매일 매시간, 숨을 쉴 때마다 밀려오는 이 소소하고도 거대한 악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까. 사실 아주 오래된 의문이었다. 지금껏 계속 답을 찾았고, 여전히 찾고 있는 깊은 궁금증. <말뚝들>을 다 읽고 났을 때 나는 작가에게서 한 가지 힌트를 건네받은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닥치든 눈을 부릅뜨고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 그리고 농담을 멈추지 않을 것.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305-306 강화길(소설가) 추천의 말, 김홍 지음
부채도 자신이라는 말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도 있다. 서로의 마음에 진 빚으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그 빚은 변제되지 않은 채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한다. 말뚝들에 총을 쏘고 말뚝들을 통제하고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장면들이 소설 속 이야기 같지 만은 않은 시대에 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눈물의 의미를 <말뚝들>은 묻고 있다. 더 정확하고 용기 있게 슬퍼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p.208 서영인(문학평론가) 추천의 말, 김홍 지음
어제 독서모임 완!! 요즘 딴생각 할 게 많아 하고 싶은 말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책 속에서 언급하고 싶던 부분은 아쉽지 않게 꺼낸 거 같아서 좋았다. 다음부턴 모임 끝나고 바로 그믐에 정리해야겠다. 독서모임 하고 나면 뭔가 들뜨고 못다한 말이 아쉽고 그래서 마음이 붕붕 뜬다.
모임 때 각자 이 책의 평점을 물어봤을 때 난 8.8점을 줬다! 사람들의 평균 점수는 8점 정도였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혼란 덕에 점수가 좀 깎였던 거 같더라. 나는 상황이 엉망진창 이상해서 0.8점을 더 준 것 같다. 재밌었다.
장의 서사와 사회적 서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7점을 준 분이 계셨고,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분이 재난이라는 건 느닷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누가 납치한 건지 중요하지 않다고 이어서 말해주셨다. 왜 하필 장한테 말뚝이 집 앞까지 찾아왔을까?라는 질문에서는 장은 책 속에서 유일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어서 그런 거 같다고 하셨다. 직접 사비로 50만원을 줬고, 직접 말뚝을 들고 공장을 찾아가기도 했기에!
모임에서 이 책이 재난, 불행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고 좀 지난 지금 나한테 남은 이야기는 '재난'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독서모임하면서 아 맞다, 이거 재난이 큰 키워드였지! 하고 깨닫고 놀랐다. 나한테 남은 이야기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모임에서 책 내부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가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짚어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고 계엄 이후 또 계엄을 하게 된다는, 이번에는 그때 와 다른 강한 계엄이었다는 설정도 헉하게 됐다. 데이식스 노래나 현재성이 좋아서 지금 딱 읽을 때 확 다가오는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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