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사 다운 받은 거라 오타 있을 수도 있음
[제발디언 참가자 모집] 이민자들부터 읽어 봅시다.
D-29

코뮹

코뮹
Yes, your description corresponds very much to my intentions. I felt that it was necessary above all to write about the history of persecution, of vilification of minorities, the attempt — well-nigh achieved — to eradicate a whole people.
네, 지금 말씀하신 설명은 제 의도와 매우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박해의 역사, 소수자들이 모욕되고 배제되어 온 역사, 그리고 한 민족 전체를 거의 완전히 말살하려 했던 시도에 대해 써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And I was, in pursuing these ideas, at the same time conscious that it is practically impossible to write about concentration camps directly. So you need to find ways of convincing the reader that this is something that is on your mind, but that you do not necessarily roll out on every other page. The reader needs to be prompted that the narrator has a conscience, and that he has perhaps for a long time been engaged with these questions.
하지만 그런 생각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깨달았던 것은, 강제수용소에 대해 직접적으로 쓰는 일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자에게 이것이 작가의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매번 노골적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요. 독자는 화자가 양심을 지닌 인물이며, 오랫동안 이런 문제들과 씨름해 온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This is why the main scenes of horror are never directly addressed. I think it is sufficient to remind people, because we've all seen images — but these images militate against our capacity for discursive thinking, for reflecting upon these things, and also paralyze, as it were, our moral capacity. So the only way in which one can approach these things, in my view, is obliquely, tangentially, by reference rather than by direct confrontation.
이 때문에 가장 끔찍한 장면들은 결코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두 그 이미지들을 본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이미지들이 오히려 우리의 사유 능력, 즉 이런 문제들을 차분히 성찰하는 능력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키기도 하지요.

코뮹
그래서 제 견해로는, 이런 문제들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우회적으로, 직접적인 제시가 아니라 암시와 참조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뮹
Q. It seems to me, though, that in addition to that, as one reads the book and one watches moths dying, or many of the images, it's almost as if this has become a poem of an invisible subject — all of whose images refer back to it — a metaphor that has no statement of its ground, only of its vehicle, as they used to say.
하지만 제게는 또 이런 느낌도 듭니다. 책을 읽다 보면, 예를 들어 나방이 죽어 가는 장면(아우스터리츠 내용이에요)이라든지 여러 이미지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들이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주제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하나의 시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미지가 결국 그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말하자면, 그 토대가 무엇인지는 직접적으로 진술되지 않은 채, 오직 그것을 운반하는 이미지들만 제시되는 하나의 은유와도 같습니다. 예전 수사학에서 말하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근거는 드러나지 않고 매개만 남아 있는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뮹
A. Precisely. And Virginia Woolf offers a wonderful example of this — her description of a moth coming to its end on a windowpane somewhere in Sussex. It's a passage of some two pages only, I think, and it's written somewhere chronologically between the battlefields of the Somme and the concentration camps erected by my compatriots.
바로 그렇습니다. Virginia Woolf의 글에는 그에 대한 아주 훌륭한 사례가 있습니다. 서식스 어딘가의 창문 위에서 죽어 가는 나방을 묘사한 대목이 있지요. 제 기억으로는 두 쪽 남짓한 짧은 글인데,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솜 전투의 전장과, 제 동포들이 세웠던 강제수용소 사이 어딘가에 쓰인 작품입니다.
There's no reference made to the battlefields of the Somme in this passage, but one knows, as a reader of Virginia Woolf, that she was greatly perturbed by the First World War, by its aftermath, by the damage it did to people's souls — the souls of those who got away and naturally of those who perished. I think that a subject which at first glance seems quite far removed from the undeclared concern of a book can encapsulate that concern.
그 글 안에서는 솜 전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독자라면 누구나 알듯이, 그녀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여파,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의 영혼에 남긴 상처 — 살아남은 이들의 영혼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은 이들의 영혼까지 — 에 깊이 동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책의 말해지지 않은 중심 관심사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대상이 오히려 그 관심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코뮹
---------
A. In these kinds of natural phenomena — like fog, like mist — which render the environment and one's ability to see it all but impossible, these are phenomena that interest me greatly. One of the great strokes of genius in standard 19th century fiction, I always thought, was the fog in Bleak House. And this ability to make of one natural phenomenon a thread that runs through a whole text, and upholds an extended metaphor — that is something I find very, very attractive in a writer.
안개나 박무 같은 자연 현상들 — 주변 환경을 거의 보이지 않게 만들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 자체를 흐려 버리는 그런 현상들 — 은 제게 매우 큰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제가 늘 생각해 왔듯이, 19세기 소설에서 가장 뛰어난 착상 가운데 하나는 Bleak House에 등장하는 안개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자연 현상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실처럼 활용해, 길게 이어지는 은유를 떠받치게 만드는 능력 — 그것이야말로 제가 작가에게서 매우, 매우 매력적으로 느끼는 요소입니다.

코뮹
-----
Q. I've been very amused because critics writing about your work in America seem to be bewildered by its tone. And I don't in fact find its tone bewildering — I think they are simply unfamiliar with it. Because its tenderness, brought to bear on subjects that have usually compelled indignation, scorn, and certainly in Beckett and in Bernhard a huge and glittering contempt — here it really has that quality of infinite care taken in listening to speakers who are not being reviled in the slightest. Am I wrong?
미국에서 선생님 작품을 다룬 평론들을 읽다 보면, 평론가들이 그 어조 앞에서 꽤 당황해하는 것 같아서 저는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어조가 그렇게 낯설다고 느껴지진 않아요. 단지 그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어떤 다정함, 혹은 부드러운 주의 깊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정함이, 보통이라면 분노나 냉소를 불러일으켰을 법한 대상들에 향해 있거든요. 이를테면 Samuel Beckett이나 Thomas Bernhard에게서 느껴지는, 크고 눈부실 만큼 날카로운 경멸과는 전혀 다른 결이지요.
여기서는 오히려, 말하는 이들을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채 끝까지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느낌 — 거의 무한한 주의를 들여 경청하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제가 잘못 읽은 걸까요?
A. I mean, this is something I don't know quite where it comes from, but I do like to listen to people who have been sidelined for one reason or another, because in my experience, once they begin to talk, they say: I have things to tell you that you won't be able to get from anywhere else.
제게는, 솔직히 말해 이것이 정확히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저는 좋아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런 사람들이 일단 말을 시작하면 이렇게 말하거든요. '내게는 당신이 다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요.
I felt that need to be able to listen to people telling me things from very early on — not least, I think, because I grew up in post-war Germany, where there was something like a conspiracy of silence. Your parents never told you anything about their experiences because there was, at the very least, a great deal of shame attached to those experiences. So one kept them under lock and seal.
저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전후 독일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곳에는 일종의 침묵의 공모 같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부모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경험들에는 엄청난 수치심이 따라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말하자면 굳게 잠가 두어진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I for one doubt that my mother and father, even amongst themselves, ever broached any of these subjects. There wasn't a written or spoken agreement about these things — it was a tacit agreement, something that was never touched on.
제 경우만 해도,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사이에서조차 그런 이야기들을 꺼낸 적이 있었을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것은 어떤 문서로 된 합의도 아니었고, 입 밖으로 표현된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암묵적인 합의, 결코 건드려지지 않는 어떤 것이었지요.
So I've always grown up feeling that there is some sort of emptiness somewhere that needs to be filled by accounts from witnesses one can trust.
그래서 저는 늘 어딘가에 채워져야 할 공백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안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은 신뢰할 수 있는 증언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I would never have encountered those witnesses if I hadn't left my native country at the age of 20, because the people who could tell you the truth — or something at least approximating the truth — did not exist in that country any longer. But one could find them in Manchester, in Leeds, in North London, in Paris, in various places in Belgium.
하지만 제가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저는 그런 증언자들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 혹은 적어도 진실에 가까운 어떤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들 — 은 더 이상 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맨체스터에서, 리즈에서, 북런던에서, 파리에서, 그리고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에서 말입니다.

코뮹
너무 기네용...... 따로 블로그에 올리고 그 링크를 공유하는 게 보시기에 더 편할 것 같아서 나중에 다시 올릴게요!!
밥심
“ 널찍한 도로에서 차는 마치 자동 장치를 단 것처럼 일정하게 달렸다. 차들의 속도가 거의 똑같았기 때문에 다른 차를 추월하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래도 추월하는 경우에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나란히 달리는 두 대의 차에 탄 사람들이 서로 제법 면식을 쌓을 정도였다. 나 역시 삼십분가량 어떤 흑인 가족의 차와 나란히 달리게 되었는데, 내게 온갖 신호와 웃음을 보내는 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그 집 식구들의 좋은 친구라도 된 듯했다. 헐리빌로 빠져나가는 출구에서 그 차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게서 멀어져 갈 때, 아이들은 뒤쪽 차창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어릿광대 같은 표정을 지어 나를 웃겼다. 결국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한동안 버림받은 사람처럼 몹시 허전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이민자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33쪽,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문장모음 보기
밥심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123쪽에 밴프 스프링스 호텔 사진이 나옵니다. 제가 7년 전에 밴프에 갔을 때 멀리 보이는 건물이 산과 어울려 멋있길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책에 나온 사진을 보고 그 때 그 건물이 고성이 아니고 바로 유명 고급 호텔임을 알았습니다. 오래된 폴더를 뒤져 제가 찍은 호텔 사진을 올립니다. 컬러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그다지 컬러로 보이지 않네요. ㅎㅎ


코뮹
우와 소중한 추억을 꺼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스프링스 호텔의 구체적인 풍경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ㅎㅎ

나또북
우와 이런 분위기군요! 사진 정말 감사합니다😍

꽃의요정
7년전 사진을 기억해서 가지고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선명하게 컬러로 보입니다! ㅎㅎ
마이루시
이민자들 읽다 포기했는데, 함께 읽을 분들이 있으시니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이번 주 중에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진도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천천히 따라가 볼께요 :)

코뮹
반갑습니다! 진도에 연연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자유롭게 대화에 참여해 주세요 ♡
밥심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기행문 느낌이 매우 강하네요.

코뮹
여러분 저는 이번 주 분량을 주말에 몰아서 읽어 볼 생각입니다. 이민자들과 별개로 제발트 평전 『말하라, 침묵이여』 을 읽고 있는 중인데, 우리가 읽고 있는 제발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대부분 그의 삶에서 마주친 실존인물들로부터 빚어진 것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요,
한편으로는, 현실의 인물을 작가 재량으로 왜곡하여 재현했다는 진실을 접해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셀윈 박사’의 모델인 로즈 벅턴을 실제 유대인 이민자라고 제발트가 말한 바 있으나, 사실은 뼛속까지 영국인이라고 합니다. 소설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밖 현실에서도 거짓내용을 인터뷰 하고 다녔다는 게 놀랍네요 …

코뮹




꽃의요정
오모나...올려주신 책 내용 보니까 좀 심하네요.
조지 오웰의 아내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도 실망했는데, 같은 감정이 제발트에게도 드네요. ㅜ.ㅜ

코뮹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