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같이 읽어요.

D-29
도쿄 사람들은 가드레일 같은 물리적인 공간 설계뿐 아니라 표지와 간판, 법제도에 의해 행동과 태도를 규정받는 부분도 있다. 어디까지가 규율 훈련형 권력이고 어디부터가 환경 관리형 권력인지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만, 거리의 설계에 의해 사람들의 행동과 태도가 좌지우지되고, 정해진 공간 설계에 맞춰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훈련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공간 설계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방 도시나 시골 마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하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도쿄의 공간 설계가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고 습관과 규율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훈련하는 시스템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깨달은 후로, 나는 도쿄의 거리와 사람들의 행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쿄의 공간 자체가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고 습관과 규율을 주입하고 있다면, 어떤 의미에서 도쿄는 거대한 정신과 병동처럼 기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문화자본과 아비투스의 세대 간 전승, 학교 교육, 자기계발 활동뿐 아니라, 도쿄라는 공간 자체가 예의 바른 현대인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사회 장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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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처럼 콘텐츠를 매개로 한 의사소통을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여기서는 오타쿠적 혹은 신인류적 의사소통이 과거 지역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의사소통과 매우 이질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오타쿠와 신인류 이후 세대는 가정 내 사적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프라인이나 SNS에서는 의사소통하고 싶은 상대와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주고받는다. 현대인에게 이런 선택 가능한 의사소통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인류사 전체를 놓고 보면 이는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지역공동체-가정-개인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절에는 사람들에게 사생활이란 게 거의 없었으며,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탓에 특정 상대와 특정 화제로만 의사소통하는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가령 다 같이 대중목욕탕에 모여 몸을 씻는 지역공동체에서는 사생활을 보호하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샴푸로 머리를 감고 화장품으로 체취를 감춘 상태만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행위란 곡예와 다를 바 없었다. 옛 사람들은 좋든 싫든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상황에서 의사소통해야만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말해야 했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고,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현대에는 어떤 시간, 공간, 매개물을 공유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선택하지 않은 의사소통을 강요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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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채로 혼자 지내는 생활은 타인에 대한 불안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오늘날에도 대중미디어에서 선정적인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사람들은 내용에 깊이 몰입한다. 앞서 말했듯, 범죄율은 해마다 감소하고 범죄 억지 장치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밤에 편의점에 가는 일도, 아이가 밖에서 혼자 노는 일도 과거에 비해 훨씬 안전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전 시대보다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내고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요즘 사람들의 치안 불안은 오히려 높아졌으며, 오늘날 보호자들이 지역사회에 가장 바라는 부분 역시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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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청결함을 유지하고 수상하다는 의심을 피하며, 냄새나 행동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형성된 통념과 습관에 완전히 길들여진 우리는, 각자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회와는 다른 ‘일본만의 독특한 공리주의적 상황’을 서로서로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과 습관이 아직 정착되지 않았던 20세기 중반에는 일본에서도 유럽처럼 시위와 파업이 자주 일어났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풍경을 마주하기 어려워졌고, 이를 단순한 민폐나 소란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질서가 실현되었다 해도 개인의 사생활 존중을 지상명령으로 삼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이러한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린 계층은 부르주아, 그중에서도 사업가와 같은 경제력이 높은 개인들이다. 매매와 의사소통 양쪽에서 경제자본이 중요해지고 이를 방해하는 폭력 행위가 국가에 의해 관리되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사회 질서가 정착되어 있을 때는 경제자본이 풍부한 개인이 사실상 천하무적이 된다. 이들은 매매에서도, 의사소통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러한 질서가 유지되어야 이들이 더욱 많은 자본을 생산할 수 있지만, 어찌 되었든 현재까지는 경제자본이 풍부한 개인이 무적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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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개인주의, 자본주의, 사회계약의 논리가 자리 잡고 교통망과 인터넷이 발달한 한편, 사람들은 여기에 어울리는 습관과 통념을 익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경제자본과 시장가치가 허락하는 한 매매와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굳이 과장하지 않아도 지금 사회에서 폭력과 협박, 물리적 거리에 의한 제약은 유사 이래 가장 낮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이 매매와 의사소통의 그물망, 그리고 이를 성립시키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매매와 의사소통의 자유를 담보하는 법제도와 공간 설계, 여기에 어울리는 통념과 습관이 철저해질수록 그 밖의 세상으로 나가기도, 바깥세상을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스템으로부터 편의를 얻는 사람들 이상으로 소외된 사람들, 즉 서로의 값어치를 매기고 서로를 상품으로 바라보는 의사소통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을 ‘팔지’ 못하고 스스로의 시장가치를 바닥이라 느끼는 사람들, 한마디로 비주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만족스러운 장소가 아니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포스트모던은 이미왔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현대의 포스트모던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사회계약의 논리가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스며들고, 이를 지탱하는 통념과 습관, 법제도, 공간 설계가 구석구석에 침투한 상태를 뜻한다. 시골 마을의 고령자도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SNS로 의사소통을 하며, 인터넷 경매 사이트를 이용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뜻이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20세기의 포스트모던과 달리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에는 도망칠 곳이 없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지방에서는 아직 지역공동체가 건재했고, 전근대적 통념과 습관을 지닌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폭주족 같은 형태로 지역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 청년 문화를 만들어가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는 포스트모던의 대안으로 프리모던​(전근대)이 잔존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랫폼은 점점 더 우리의 행동에 압력을 가하고, 정치인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타임라인에 떠오른 정의를 의심치 않는 이들의 충돌은 정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포스트모던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목적이 되어버린 포스트모던 속에서 우리의 행동과 태도는 어디까지가 자유의 산물인지, 나는 새삼 묻고 싶다. 이 거대한 질서 속에서 당신은 얼마나 자유롭고, 또 얼마나 부자유로운가, 하고 말이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이 책을 읽을수록,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안전과 청결에 대한 댓가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 흔히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 또한 너무 많기에 예전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수록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고 얻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부작용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마지막 장의 2번째 읽기를 하는 중입니다.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서로에게 불편이나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개개인이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해악의 원칙을 포함한 공리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1 5장과 6장에서 보았듯,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드러낼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안에서 활발하게 시민운동이 펼쳐진 서양 사회와, 최대한 자신의 주장을 억제하고 시위와 파업은 물론 아이를 데리고 외출한 엄마에게마저 불편한 시선을 던지는 일본 사회는 둘 다 ‘공리주의의 실현’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지라도 그 내용은 전혀 같지 않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밀이 《자유론》에서 기술한 공리주의와 해악의 원칙은 현대의 개인주의를 고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개념임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밀이 예상했던 사회는 다양한 인간과 의견이 공존하며, 주류 사상이나 라이프스타일이 비주류에게까지 강요되지 않는 사회였다. 계급 상승을 지향한 부르주아적 사상과 라이프스타일이 모든 개인을 옭아매는 사회는 분명 아니었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매매와 의사소통의 자유, 출신과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결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대채로 밀의 지향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회계약이라는 삼위일체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즉 부르주아 계급에서 출발한 사상과 라이프스타일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만 실현된 것이다. 지역공동체적 사상과 라이프스타일은 더 이상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주의 역시 대안적 사상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더 많은 행동과 태도가 위해 요소이자 민폐로 간주되고, 더 많은 행동과 태도가 일탈로 규정되어 의료와 복지의 관리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이념은 둘째치고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이 매우 좁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주류의 관습과 통념, 부르주아 계급에서 비롯된 다양한 생활 규범에 맞춰 행동하며, 해악의 원리를 위반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써야만 한다. 이 약속을 어기고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했다가는 언제 어느 순간 타인에게 피해를 줄지 모른다.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다만 내가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오늘날 도쿄에서 해악의 원리를 충실히 지키려면 밀이 상정했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까다로운 행동 기준을 고수해야 하며, 공리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크게 제약한다는 점이다. 《자유론》을 떠올려보면 밀은 분명 이런 사회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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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사회가 진보할수록 사회는 ‘남성 부르주아처럼 일하고 싶은 여성’에게 적합한 형태로 변화한다. 실제로 현재 사회는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이를 낳고 싶거나 기르고 싶은 남녀에게 최적화된 사회는 아니다. 사회가 진보하고 개인의 부르주아화가 심화될수록 아이를 낳고 기르기 어려운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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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민사회가 뿌리내릴 틈도 없이 일본에서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회계약의 논리가 대도시권에서 지방으로 침투되었고, 도시의 시민운동과 지방의 전근대적 권위주의를 동시에 집어삼켰다. 시민운동보다 사생활이 우선시되는 일본 사회는 청결하고 건강하며 질서 정연한, 언뜻 근대 시민사회와 비슷해 보이나 전혀 다른 형태의 다양성을 띠게 되었고, 각각의 개인은 기업화되고 부르주아적 주체가 된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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