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크루소가 '크루소 섬'에 도착했습니다!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
D-29

르구인

향팔
“ 나는 이 돈을 보고서 혼자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아, 이 마약 같은 놈아, 너를 어디에 써 먹겠냐, 나한테는 아무 가치가 없으니, 땅에 떨어져 있는 것도 집어 올 필요도 없지 않느냐, 이렇게 한 다발 쌓여 있은들 저기 칼 한 자루보다도 값어치가 없는 터, 도대체 널 써먹을 방도를 모르겠으니 그냥 그대로 거기 놔둘 것이고, 건져 줄 만한 물건들이 아니니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라.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해 보고서는 이 돈들을 가져가기로 하고 범포 한 조각에 모두 둘둘 말아 챙겼고, […]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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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배에서 금화, 은화를 발견하고 처음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내비두려다가 곧 생각을 바꿔 주섬주섬 챙겨오는 장면이 재밌었어요.

르구인
맞아요. 크루소는 모험을 찾아서!를 외치면서도, 참 잇속이 밝은 것 같습니다. ^^;;;;;;

르구인
“ 그 다음으로 걱정할 일은 거기에 무엇을 실을 것이며 또한 어떻게 그 위에 놓은 것들을 출렁이는 파도에 젖지 않게 무사히 가져가는 것이었으나, …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따져본 후, … 첫 번째 궤작에는 식량, 즉 건빵, 쌀, 네덜란드 치즈 세 덩어리, 우리가 배에서 즐겨 먹었던 염소고기 육포 다섯 점, … 다 죽어버린 애완용 새들 모이로 남겨뒀던 유럽 곡식 약간 등이었는데, …
…
내가 눈독을 들일 만한 다른 물건들로는 가령 뭍으로 돌아가서 당장 작업을 할 공구가 필요한 것이었기에, 한참을 뒤지자 드디어 목공 연장통을 찾아내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나한테는 당시로는 금을 가즉 실은 배 한 척보다도 더 값진 횡재라, …
…
그 다음으로 신경을 쓸 일은 탄약과 무기류라, 살펴보니까 아주 쓸 만한 사냥총 두 자루가 큰 선실에 있었고, 이것들과 권총 두 자루, 화약 주머니 몇 개, 조그마한 탄환 주머니, 녹이 좀 쓴 칼 두 자루를 같이 일단 챙겨놓고, 또한 배 안에 화약통이 세 통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 찾아냈는데, … 어떻게 무사히 육지까지 갈 것인지가 걱정이었다. ”
『로빈슨 크루소』 p.75-76,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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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저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상당한 물건들을 챙겨나오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표류하다가 몸만 무인도에 덩그러니 떠내려간 줄 알았거든요.
배에서 연장이며 무기며 화약이며 챙겨서 문명 생활을 이어가게 하는 설정은, 처음엔 어딘가 편법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오히려 이것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부지런한 크루소는 끊임없이 개간하고, 울타리를 치고, 관리하고, 계산을 하고 기록하고 총과 화약으로 자연과 선주민(소설에서는 ‘식인종’)을 제압합니다. 이 소설의 해제(을유출판사 번역본)의 제목처럼 '근대 시대의 첨병 디포'의 분 신처럼 느껴지네요.

르구인
『로빈슨 크루소』 2주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월요일에 공지를 올렸어야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
• 2주차 (03.23. 월 ~ 03.29. 일): p.103-210.
크루소가 이제 섬에서 홀로 열심히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장수집으로도 올렸지만, 크루소는 초반에 배를 십수 차례 들락거리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옵니다.
저는 이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챙겨오는 물품의 종류에도 관심이 갔습니다.
2주차 읽기를 하는 동안, 여러분이라면 난파선에서 어떤 물건을 챙겨나올지 한 번 생각해보시면 이 세세한 설명들을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르구인
“ 내 화약이 모두 합쳐서 한 240파운드 무게는 나갈 정도인 것을 한 100개 묶음으로 나눠 놓았고, …
…
이 일을 하는 사이에 나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기분도 전환하고 혹시 먹을 만한 사냥감이 없나 찾아보려 총을 들고 밖으로 나가 이 섬에서 나는 게 뭔지 알아보려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거리까지 나가 보곤 했다. ”
『로빈슨 크루소』 p.90,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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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이 정도 화약이면 얼마나 쓸 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1파운드 = 0.453kg이니, 240파운드면 109kg 정도 됩니다. 당시 머스킷 총 기준으로 1발당 화약 사용량이 10~15그램 정도 된다고 하는데요, 나눗셈을 해보면 이 화약으로 쏠 수 있는 횟수는 약 7,000~11,000발이나 됩니다.
거의 1만 발 수준이라, 28년이나 섬에 있었다고 해도 화약이 떨어질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총알 발사 외에 불을 피우는 등 다른 용도로도 화약을 썼을 가능성이 있으니 더 빨리 소모됐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넉넉한 양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총이 28년 동안 멀쩡했을지 궁금하네요. 배에서 총을 몇 자루나 가지고 나왔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 자루든 여러 자루든 28년 동안 고장 없이 버텨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디포가 이 문제를 의도적으로 넘어간 것 같기도 한데, 줄거리를 대충 확인해본 바로는 나중에 프라이데이를 구하고 다른 '식인종'들과 싸우는 중에도 총과 화약을 씁니다.
총의 내구성에 대한 언급이 소설에 실제로 나오는지 궁금하네요. 어쩌면 디포는 총 없는 크루소를 처음부터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르구인
“ 내가 이 섬에 온 지 한 10일이나 12일쯤 뒤가 됐을 때인데, 내게는 수첩과 펜과 잉크가 떨어지면 시간 계산을 놓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심지어 일하는 날들과 안식일 구분도 못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그래서 이를 예방하려고 큼직한 기둥에다 대문자로 표시를 하기로 하고, 커다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서 내가 처음으로 상륙했던 해안에 세워놓았으니,
즉 "나는 이곳 해안에 1659년 9월 30일에 왔다"는 말을 새겨놓았다. 이 네모난 기둥 옆쪽으로는 매일 칼로 눈금을 하나씩 그어서 표시했는데 일곱 번째 눈금은 나머지보다 두 배 더 길게, 또한 매달 첫 번째 눈금은 그것보다 두 배 더 길게 새겼고, 이렇게 해서 나는 달력을 만들어서 매주, 매달, 매해 시간을 계산했다. ”
『로빈슨 크루소』 p.94-95,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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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재밌는 사실을 알았네요. 놀랍게도, 대니얼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를 펴낼 때 이 이야기를 실화처럼 꾸몄고, 작중 인물이 직접 쓴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고 하네요.
표지를 보면 중간 아래쪽에 "written by himself"라고 되어 있습니다. 책이 엄청나게 팔린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소설이 ‘실화’라는 광고도 한 몫 했었나 봅니다.
디포의 이력 중에 재밌는 얘기가 또 있습니다. 비국교도였고 언론 활동도 했던 디포가, 비국교도를 억압하는 정부를 풍자하는 팜플렛 「비국교도를 처리하는 가장 빠른 방법」(The Shortest way with the Dissenters; Or, Proposal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Church)을 썼다가 사흘 동안 길바닥에 형틀에 묶여 있도록 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림을 보시면 땅바닥에 꽃이 뿌려져 있는데요. 당시 형틀형을 받으면 구경꾼들이 모욕을 주고 돌을 던지기도 해서 죽기도 했는데, 디포의 경우에는 반대로 꽃을 던졌다고 하네요. 아마 비국교도 사람들일텐데 디포를 찾아와 위로를 하고 꽃을 주고 술을 나눠마셨다고 하는군요.
이후 풀려나면서 디포는 정부와 거래를 하게 되는데, 정보원 즉 스파이로 일하는 거였습니다. 이후 「더 리뷰」라는 어용 저널도 펴내서 선동을 하고, 당시 합병을 추진 중이던 스코틀랜드까지 가서 스파이 활용을 열심히 했다고 하네요.



향팔
아, 그러고 보니 소설을 출판하면서 실화라고 뻥을 치는 마케팅 전략이 당시에 꽤 있었다고 들었어요!

향팔
“ 대니얼 디포는 후세에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디포를 ‘소설가’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하나의 직업으로서 ‘소설가’란 개념이나 ‘소설’이란 장르 개념도 이 시대에는 확립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디포는 익명으로, 아니 실제 인물 로빈슨 크루소가 직접 쓴 여행기로 이 작품을 꾸며내어 세상에 내놓은 후 본인의 신원을 숨겼으니 디포와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는 더욱 더 ‘비밀스런’ 것이었다. 그 이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종류의 사실성을 ‘사칭’한 이야기들이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이 작품이 크게 성공한 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로빈슨 크루소』는 숱한 사실주의 소설의 ‘원조’인 셈이다. 그러나 디포는 근대 사실주의 소설을 개척한 문학사의 ‘첨병’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근대 시대로의 변화를 몸소 겪고 선도한 근대 문명 자체의 ‘첨병’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로빈슨 크루소』 해설: 근대 시대의 첨병 디포,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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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소설을 실화라고 뻥을 치는 게 그냥 그 시대 유행인 줄 알았었는데, @르구인 님 말씀대로 그 실화 마케팅의 원조가 디포였군요.

향팔
“ […]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이성이 수학의 실체이자 기원이기에 모든 것을 이성에 의거해 가늠하고 맞춰서 만사를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누구건 온갖 물건의 제조법을 시간이 지나면 다 숙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도구를 만져본 적이 없었으나 열심히 일하고, 응용을 하며 고안을 해본 끝에 마침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듯, 특히 연장만 갖고 있다면 만들어 가질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인데, […]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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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이성’의 힘과 ‘진보’하는 세계를 믿었던 가치관이 반영된 문장 같아요.

향팔
“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내 물건들을 뒤지던 중에 어떤 일이 생겼냐 하면, 작은 주머니를 하나 찾았고 거기에는 내가 그 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가금류 모이용 곡식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이게 이번 여행 때가 아니라 그 배가 리스본에서 올 때 담겨 있던 것으로 아마 생각이 되지만, 하여간 주머니에 남아 있던 곡식은 생쥐가 다 먹어버렸고 주머니 속에는 껍질과 먼지만 푸석했기에, 이 주머니를 다른 용도로 쓰려고, 아마 번개가 두려워서 화약을 나눌 때 화약 넣을 주머니로 쓰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바위 밑 방벽 한쪽 바깥에다 주머니에 있는 곡식 껍질들을 털어버렸었다.
방금 언급한 그 찌꺼기들을 내다버린 게 큰 비가 내리기 직전이었는데, 나는 별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심지어 거기다 뭘 버렸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지만, 한 달 남짓 된 후에 뭔가 파릇파릇한 줄기가 땅에서 솟아올라오는 것이 보였으니, 난 이게 아마도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무슨 식물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거기에서 이삭이 한 10개 내지는 12개 정도 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완전히 어리둥절해졌으니, 이게 유럽에서 나는 같은 종류의, 아니 우리 영국 보리랑 똑같은 녹색 보리 이삭이었던 것이다.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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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이것이 로빈슨 크루소의 농업의 시작이군요. 거의 우연에서 출발한…. 수확을 보는 일은 쉽지가 않아 4년째가 되어서야 겨우 약간 맛볼 수 있었다니, 마션에서 읽었던 감자 농사도 생각나네요.

르구인
네, 읽다보면 『마션』의 작가가 크루소를 열심히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이렇게 기술적인 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하드SF 장르가 있다고는 하던데요.
『로빈슨 크루소』에서 세세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그렇고, 울타리 치기, 집 만들기, 필요한 것들 만들기 등을 보면 『마션』의 와트니가 했던 일들이 떠올라요. 비닐로 감자밭 만들고 로버 개조하고, 기지의 물건들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 보면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를 가진 크루소와 기지를 가진 와트니, 이 지점이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크루소가 홀홀단신으로 섬에 떨어진 게 아니라, 옆에 배가 떡 하니 같이 떠내려와있었다는 설정이 처음에 참 놀라웠습니다. 보통 '배'라는 건 문명이 통째로 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향팔
그러네요. 예전에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근대적 개인의 홀로서기, 근면과 자립의 중산층 정신을 상징하는 거라고만 배웠던 것 같은데, “‘배’라는 건 문명이 통째로 간다”는 말씀에 어떤 신선하고도 두려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번 독서를 계기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책을 새로 알게 됐어요.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비틀고 뒤집어서 다시 쓴 소설이라고 하네요. 책소개를 읽다가 @르구인 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대목인 것 같아 가져와봤습니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과거의 영국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난파한 배의 표류물을 주워 모아 섬 안에 작은 영국 식민지를 또 하나 만들어놓으 려는 것입니다.” -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의 대표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재출간됐다. 번역자 김화영 교수의 재검토와 교정과정을 거쳤으며, 오역을 바로잡고 작가 연보를 추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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