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

D-29
섬에 혼자 사는 크루소의 행동들이 참 묘합니다.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화약과 총을 못 쓰게 될까봐 너무 두려워하고, 창고를 만들고, 저장하고, 진지를 만들고, 거처를 위장합니다. 지금 시점은 이 섬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기 전이란 말이죠. 그런데 마치 동굴 밖에, 자기 시야 너머에 적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준비하는 모습이거든요. 콜럼부스 등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이미 200년 이상 드나들었고 그동안 '신세계'에 대한 과장된 소문들, 예를 들면 식인풍습 같은 것들이 유럽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을 것 같기도 한데요. 신세계와 타자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 때문일 것 같기도 합니다.
@르구인 님 글을 보다가 지난번 YG님 방에서 읽은 꿀잼책의 한 대목이 생각났어요. 1628년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 일행이 나오는 부분인데요. 저녁에 제주 사람들이 횃불을 켜고 배로 다가오자, ‘아! 식인의 섬에 도착했구나. 이들이 우릴 이제 불에 구워먹으려나보다’ 생각하고 울부짖었다는…. 유럽인들은 아시아건 아프리카건 아메리카건 간에 자기들이 모르는 곳에는 식인종만 산다고 생각했나봐요. “또한 그[벨테브레이]의 나라에서는 고려인들이 사람을 구워 먹는다고 말했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저녁이 되자 관리와 병사들이 횃불을 켜고 조사하러 왔다. 배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 불에 구워 먹는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남만 풍속에는 밤에도 등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횃불이 없다. 이를 미루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다른 나라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대부분 허구인 것으로 생각된다.” - 『한거만록』, 정재륜(1648~1723)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 16~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의 만남370여 년 전 조선의 해안에 불시착하여 17세기 전 지구적 소빙기의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밥을 얻어먹었다던 사람들, 그 사람들처럼 넓은 바다를 건너 지구의 이쪽저쪽을 왔다갔다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인연을 맺었던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 정말 그러네요. 유럽인들은 유럽 밖은 야만인들의 세상이고 식인종들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올려주신 책, 정말 재밌어보입니다!! 내용이 너무 궁금하네요. 책 추천 감사합니다.
나는 또한 이것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 는데, 비 오는 철에 특히 비가 폭풍과 허리케인을 수반할 때 밖에 나다니는 것은 내 건강에 가장 유해한 일이라는 것으로, 건기에 비가 내릴 때는 거의 늘 이런 폭풍을 수반했던 터, 이런 비는 9월 이나 10월에 내리는 비보다 훨씬 더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이 불행한 섬에서 10개월째 지내고 있었고 이런 처지에서 구출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빼앗긴 것으로 보였으며, 나는 이곳에 사람의 형상을 한 그 어떤 자도 발을 디딘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기에 이제 내 거처를 내 생각에 충분히 만족할 만큼 안전하 게 만들어놓았으니, 이 섬을 보다 완벽하게 파악하여 아직 그 어떤 산물들을 내가 더 찾아낼 게 있는지 알아내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 게 되었던 터, 아직 이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7월 15일에 나는 이 섬을 좀더 자세히 탐사하기 시작하여, 앞에 서 언급했듯이 내 뗏목을 갖다 댔던 샛강을 따라 가서 한 2마일 정도 올라가자, 더 이상 물살이 흘러들어가지 않고 그냥 조그맣게 졸졸 흐르는 샘물 정도임을 발견했는데, 물맛이 아주 신선하고 좋 왔으나 이게 건기라서 일부는 물이 거의 다 말라버렸거나 아니면 적어도 물길을 만들어 흘러가는 게 보일 정도로 충분히 흐르지는 않았다.
로빈슨 크루소 p.143,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크루소가 이제 살만 해져서 섬의 '자원' 탐사를 하려고 합니다. 노골적으로 '자원'이라고 하네요.
나는 이 달콤한 골짜기의 한쪽 사면으로 조금 내려가서 이곳을 굽어보며, 이 모든 게 다 내 소유이고 내가 절대로 무효화할 수 없이 땅의 군주이자 영주이며 소유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비록 나의 다른 고통스런 생각들과 뒤섞이긴 했으나) 일종의 은밀한 쾌감을 느꼈는데, 사실 내가 이곳에 대해 만약에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영국의 그 어떤 영지를 소유한 귀족 못지않게 이것이 완전히 내가 물려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재산이 될 수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이 대목을 읽으니 <마션> 방에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시카고 대학의 사람들이 보낸 메일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외기권조약, <통치론>과 <어린 왕자>까지 나왔었던…
네, 전체적인 구조도 서술 방식도 두 작품이 상당히 유사해서 조금 놀랬더랬습니다. 와트니가 로버를 개조해서 침실을 만들고, 감자밭을 만들고 하는 과정들이 크루소가 하는 일들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로빈슨 크루소』 읽기 3주차가 시작되었습니다. • 3주차 (03.30. 월 ~ 04.05. 일): p.211-319. 이제 크루소가 섬 생활에 익숙해져서 농사도 하고 울타리를 만들어 염소도 키우고 섬도 탐사하기 시작합니다.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수십 년 동안 홀로 지내지만, 그에게는 난파선도 마침 해안 가까운 곳에 있어서 문명의 물자들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종교적으로 ‘불손’해보였던 크루소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점점 더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혼자지만 마치 저 시야 너머 항상 적—자연현상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고 크루소의 눈에 ‘식인종’이기도 한—이 존재하는 것처럼 집이 아니라 요새를 만들고, 식량을 비축하고, 총과 화약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디포가 실화인 것처럼 속여서 소설을 출판했고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어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다고는 합니다만,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에 오롯이 담겨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당시 일종의 성공담 같은 것이죠. 한편, 이 이야기 자체는 허구일지 모르지만 크루소가 경험한 일들—항해, 해적에게 노예로 잡힌 것, 브라질의 노예농장, 사설 납치 프로젝트, 유럽인들 사이의 각종 거래—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크루소는 점점 더 경영자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노예무역과 식민제국주의가 뻗어가는 시대의 경영마인드는 어떠했는지 주목하면서 읽어보시기를 제안드립니다.
크루소가 섬에서 일하고 축적하며 점점 더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자본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표본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아늑한 오두막으로 돌아와 내 해먹에 누우니 어찌나 맘이 흡족한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라, 이 잠깐 동안의 방랑 여행을 하는 동안 정해진 거처가 없는 것이 나로서는 전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내가 내 혼잣말로는 늘 우리집이라고 부르던 이곳이 그런 생활에 비교한다면 내게는 완벽한 거처였으니, 내 주위로 모든 것을 아주 편리하게 만들어놓은 터라, 내가 이 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내 운명인 한 이곳에서 다시는 그렇게 멀리 떠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마션>에서도 와트니가 거주용 막사를 두고 ‘집’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보니 저에게도 갑자기 떠오르는 일화가 있어요. 학생 때 엄청 열악한 기숙사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그러다가 주말에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서 오랜만에 집다운 집이랄까, 아주 아늑한 숙소에 머물러서 기분이 너무 좋았거든요.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기숙사로 출발하면서 우리 일행끼리 “아 이제 집에 가자 집에”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어머 그것도 집이라고 집이랜다” 하면서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래되고 지저분한 기숙사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낡은 벽에 그림과 사진을 붙이고, 책상에는 조명과 꽃을 사다 놓으면서 그 공간이 어느새 ‘나의 것’이 되고, 당시엔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편안함과 익숙함을 주는 ‘집’이 되었나 봐요. 비록 머지않아 떠나게 될 공간이지만요. 그런 경험도 크루소가 만든 ‘요새’와 조금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요. 요새 하니까 생각나는데 소설 속 크루소는 말끝마다 ‘내 요새’, ‘내 텐트’, ‘내 동굴’, ‘내 총’, ‘내 나무 삽’ 하면서 내 것이라는 걸 자꾸만 강조하더라고요. 뺏어갈 사람도 없는데… 내 것이라는 게 그런 걸까요. 위협이 있건 없건 절대 지켜야 하는, 신성 불가침스럽기까지 한 나의 나와바리! 자연(타자)과 문명(나) 사이에 그어놓은 경계선 같은 거요.
크루소가 울타리 치는 모습에 기시감이 들어서 로빈슨 크루소와 인클로저로 검색을 해보니, 각종 블로그 글들과 연구 논문이 쏟아지더군요. -,-;; 영국의 인클로저가 15세기경부터 시작해서(그 전에도 일부 있었지만) 19세기까지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데요. 17세기도 인클로저가 극심하게 이루어지던 시기 중 하나라고 하네요.
아, 그러네요. 로빈슨 크루소의 “내 울타리”가 영국의 인클로저와 연결되는군요. 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부분이에요. 모든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데, 고전 작품별로 이런 점을 연구한 논문이나 해설을 읽는 것도 작품 자체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겠어요.
^^ 다정하고 따뜻한 추억이네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향팔님 추억을 듣고 보니, 함께 동고동락했던 저의 열악했던 '집'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ㅎㅎ;
내 형편이 이제 어떠했냐 하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농장(plantation)을 이 섬에 2개 갖고 있었으니, 한 곳에는 나의 작은 요새이자 텐트를 쳐놓고 바위 밑으로 벽을 둘러놓고 뒤로는 동굴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 안에 방 내지는 굴을 여럿 더 피서 서로 연결되도록 해놓았으니 제법 확장되어 있었다. … 이곳 말고도 나는 전원 저택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도 그런대로 괜찮은 농장(plantation)을 갖고 있었으니, 첫째로는 거기에 내가 자칭 작은 정자라고 부르는 집이 있었는데, 이곳도 간수를 잘 해놓아서 그 주위를 둘러 심어놓은 관목 울타리를 항상 일정한 높이로 유지하고 사다리는 늘 안쪽에다 넣어두었으며, …
로빈슨 크루소 p.218-219,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심지어 크루소는 자기 농장을 '플랜테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아래 링크에서 원문 검색을 해보니, farm은 두 번 나오고, plantation은 37번 나오네요. -,- https://www.planetpublish.com/wp-content/uploads/2011/11/Robinson_Crusoe_BT.pdf 플랜테이션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식민이라는 뜻으로 먼저 쓰였다고 하더군요. 유럽의 문명을 갖다 심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식민과 대농장 두 가지 뜻으로 쓰였고, 크루소 시대가 여기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나중에는 지금 우리가 쓰는 것처럼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의 뜻으로 쓰이게 됐다고 하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Plantation_(settlement_or_colony) 이런 면에서 보면, 크루소는 영국 내에서 이루어지던 인클로저와 영국 밖에서 펼쳐지던 식민제국주의를 무인도에서 동시에 실행한 셈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제 내 삶의 새로운 국면을 다룰 차례다. 어느 날 정오 무렵에 내 보트를 향해 가던 중 나는 웬 사람의 맨 발자국을 해안에서 발견하고서 몹시 심하게 놀랐으니, 모래사장에 난 자국으로 보아 그것이 사람 발임은 분명했다. 이에 나는 마치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아니면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는데, 주위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 … 어찌나 온갖 험한 생각이 매순간 내 공상 속에 떠올랐는지, 참으로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괴한 것들이 어찌나 내 생각 속으로 불쑥불쑥 끼어들었는지, 이루 말로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빈슨 크루소 p.221-222,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섬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흔적(발자국)을 발견하게 된 게 15년이 지난 시점이네요. p.231에 "내가 이제 여기서 15년을 살았고 그동안 사람의 모습이건 그림자건 전혀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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