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

D-29
이것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이교도들 사이에도 사제들이 있으며, 사제들을 보통 사람들이 계속 떠받들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를 신비롭게 만들려는 계략은 로마 교회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가장 짐승 같고 야만스런 종족들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ㅋㅋㅋ 디포가 “무지몽매한 이교도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같은 도마에 올려놓고 한큐에 까고 있네요.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인들은, 평신도와 하느님 사이에 ‘사제’라는 독점적이고 권위적인 중재자를 꼭 끼워넣지 않아도 신자 개인이 직접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죠. 디포 같은 비국교도인들은 더 그랬을 거고요. 그러고 보니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서 혼자 기도하고 성경 읽고 명상하는 장면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네요.
짚어주신 부분을 보니, 디포가 크루소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더 중요한 부분은 어쩌면 종교적인 주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소설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불손한 태도를 수시로 보여주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반성하고, '금요일'을 교화시키고 ... 이런 모습은 말씀하신 것처럼 '봐라, 사제들아. 너희들 없이도 내가 이렇게 하느님과 만나고 야만일을 구원까지 해냈다!', 이걸 소리높여 주장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 정말 그런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겠군요! 소설 속에서 크루소의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꽤 길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그래서일 수 있겠어요. 이렇게 함께 읽으며 생각을 확장해주시니 더 요모조모 궁리하게 되어 좋습니다.
🌿 『로빈슨 크루소』 읽기 4주차가 시작되었습니다. • 4주차 (04.06 월 ~ 04.13. 일): p.320-438. 프라이데이와 합심해서 여차저차한 일들을 겪은 후 섬을 떠나게 될 텐데, 이 부분이 좀 스펙타클한 액션 어드벤처 느낌이 많이 납니다. 재밌을 수도 있고 억지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크루소는 전략가가 되고 금요일은 크루소의 오른팔이자 보디가드가 되는 느낌입니다. 탈출 이후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크루소의 귀환길에는 예상치 못한 선택과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28년 만의 귀환이 그에게 진짜 안식을 가져다줄지는 읽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섬을 벗어난 크루소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프라이데이는 이 모든 여정에서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 후반부를 읽으면서 눈여겨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스물일곱 해째에 들어갔는데 최근 3년간은 이 친구를 데리고 있었기에 그 나머지 시간과는 워낙 생활환경이 달라져 있었으니, 이 부분은 빼고 계산해야 되긴 하다. 내가 이곳에 상륙한 기념일은 늘 첫 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았을뿐더러, 첫 기념일 때도 받은 은혜를 인정할 이유가 있었다면 이제는 더욱 더 그러한 것이, 돌보시며 섭리하시는 은총에 대해 그간 더욱 더 증언할 거리가 많이 생긴데다 내가 이곳에서부터 확실히 구출될 수 있고 그것도 빠른 시일 내 그럴 수 있다는 희망까지 갖게 된바, 나는 내가 구출될 일이 임박하였 고 이곳에서 1년 이상은 더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내 생각 속에 억누를 수 없게 들어와 앉아 있었던 터였으나, 그래도 나는 농사짓고 밭 갈고 곡식 심고 담장 치는 등 늘 하는 일을 계속했고 포도도 따서 말려 건포도를 만드는 등 이전처럼 필요한 일은 모두 다 수행했다.
로빈슨 크루소 p.328,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부지런한 크루소씨! 이제 섬을 떠나기 1년 전이네요. 독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것 같습니다. 금요일을 만난지 3년이나 지났는데요. 왜 그 전에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지네요. 금요일은 이 일대를 잘 알텐데 말입니다. 금요일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데 3년 정도 걸린다고 디포는 생각했을까요? (디포에 대한 저의 편견 혹은 의심(?)이 점점 쌓여가는 것 같습니다. -,-;)
이렇게 행군을 하는 중에 예전에 들었던 생각들이 다시 돌아와서는 내 의지를 흔들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이들의 숫자가 많다는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는 말은 아닌 것이, 이들이 벌거벗고 비무장 상태로 있는 만만한 축들이라 내가 그자들을 제압할 역량이 있다는 것은 비록 나 혼자밖에 없었다고 해도 분명했던 까닭이었는데, 하지만 내게 떠오른 생각은, 무슨 명분이 있는가? 무슨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 그 이전에, 나한테 아무런 해를 끼치거나 그런 의 도를 품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여 내 손에 피를 굳이 묻히려고 갈 필요성이 있는가? 이런 것들이었으니, 이들은 내게는 죄가 없고 이들의 야만적인 풍습은 그들 스스로의 재난으로 하나님이 이들 및 기타 그쪽 지역의 다른 종족들이 그렇게 아둔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비인간적 행위를 하며 지내게 버려두셨다는 중표일 뿐인 반면, 하나님이 나를 이들의 행위를 심판하라는 사명을 주 신 것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하는 집행관 노릇은 시키시지 않은 형편에, 아무 때건 하나님의 뜻대로 이 문제를 처분하실 것이며 이들 종족이 저지른 죗값을 종족 차원에서 갚도록 하실 것이요. 그전까지 내가 관여할 일이 없을 터, 물론 금요일이는 이들과 전쟁 상태라 공식적인 적들이니 보다 더 정당화될 수 있고 걔가 이들을 공격하는 게 적법한 일이겠으나, 내게도 똑같은 논리 를 적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등의 생각이 가는 길 내내 어찌나 강력하게 나를 짓누르는지 나는 그냥 이들 가까이 접근해서 이들의 야만적인 잔치를 관찰만 하기로 하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만 행동하지, 내가 수긍할 좀 더 분명한 명분이 생길 만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작정했다.
로빈슨 크루소 p.323-333,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이제 나는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으니. 그것은 이들 19명의 무지막지한 놈들이 땅에 모두 바짝 서로 붙어 앉아 있었고 두 놈을 보내서 그 가엾은 기독교도를 죽여서 살을 떠내어 사지를 하나씩 차례로 불로 가져오도록 시킨 형편이었던 까닭이요, 이미 이자들이 몸을 굽혀서 발에 묶어놓은 끈을 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금요일이를 돌아보며, 자, 금요일아, 너는 내가 하는 것을 본 그대로 너도 따라해야 하고 틀림이 없어야 한다, 라고 말을 했고, 그리고서는 머스켓 총 중 하나와 사냥총을 바닥에 내려놓으니 금요일이도 자기가 갖고 있는 총들을 갖고 그대로 했고, 또 다른 머스켓 총을 야만족들에게 겨눈 후 금요일이한테도 똑같이 하도록 시키고서, 걔한테, 너 준비됐나?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자, 그럼 저들을 향해 쏴라, 라고 말한 후, 그 순간에 나도 사격을 했다.
로빈슨 크루소 p.334,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크루소는 '내가 무슨 권리로 저들을 벌하겠는가'라며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묶인 사람들 중에 유럽인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바로 마음을 바꾸게 되네요. 금요일이는 이들과 공식적으로(?) 전쟁상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금요일이를 앞세우는 느낌도 듭니다. 정당성도 부여해주고 방패막이도 돼주는, 두 가지 역할을 금요일이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3명은 나무에서 쏜 첫 번째 사격으로 사살함. 2명은 그 다음 사격으로 사살함. 2명은 보트에서 금요일이가 사살함. 3명은 먼저 부상을 당한 상태인 자들로, 위와 같음. 1명은 숲에서, 위와 같음. 3명은 스페인 사람이 죽임. 4명은 부상을 당해 여기저기에 쓰러진 자들로 금요일이가 이들 을 추격하여 죽임. 4명은 보트를 타고 탈출했는데, 이 중 하나는 죽지 않았다면 적어도 부상이 심한 상태임. 도합 21명.
로빈슨 크루소 p.339,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대전투의 결과도 기록하는 걸 잊지 않는 크루소입니다. 기자로 글도 많이 써냈고 잡지도 펴냈던 전력이 있어서일까요, 디포는 정리를 참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묶고 있는 꼬아놓은 청포잎 내지는 골풀을 즉시 잘라 버리고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그는 일어서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고 오로지 몹시도 서글프게 신음소리만 내니 아마 자기를 죽이려고 결박을 푼 것으로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금요일이가 그 사람한테 오자 내가 걔한테 그 사람은 구출된 것 이라고 말해 주라고 하며, 내 술병을 꺼내서 이 가엾은 인간에게 한 모금을 주니, 자기가 구함을 받은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이걸 마신 덕에 생기를 되찾고 일어나 보트에 똑바로 앉았는데, 금요일이는 이 사람한테 가까이 가서 말을 걸려고 하며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찌나 기쁨에 젖어 그 사람에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울고 소리치고 펄쩍 뛰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가 다시 정신이 나간 친구처럼 펄쩍펄쩍 뛰어대는지, 그 광경을 보는 이라면 누구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정도라서, 한참 뒤에 가서야 나한테 말을 하게 만들 수 있었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자, 좀 안정을 되찾은 후에 나한테 하는 말인즉,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p.340-341,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금요일이가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까지 잡혀오게 된 걸까요? 이 얘기가 뒤에 나오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아버지까지 등장하게 한 건지 궁금합니다.
그니까요. 조금 개연성이 없죠? 어린때 읽었을때 프라이데이까지는 읽은 기억이 나는데 프라이데이 아버지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 이번에 읽으면서 이름을 "금요일이"로 번역하는것과 "프라이데이"로 번역하는것의 차이를 생각해봤는데, 각자 선호가있겠지만 전 프라이데이가 더 좋은것 같아요. 금요일이라고하면 이름이 원래 사람이름이 될 게 아닌데 임의로 붙였다는점은 잘 드러나지만, 이름을 부를때 "금요일!"이렇게 부를 수 없어서 다 "금요일이야!" 이런식으로 번역하니 한국어 기준으로 원문에 없는 다정함(!)이 한스푼 들어가는 느낌이어서 좀 어색했습니다. 요즘 사람이면 프라이데이가 영어로 금요일이고 사람이름 같지 않다는 것 쯤은 알고있을 확률이 높아서... 일부러 바꿀필요까진 없지않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문에 없는 다정함이 한스푼 들어가는 느낌” 오, 말씀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저도 그냥 “프라이데이”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알라딘에서 열린책들 번역본 책소개를 보니까 우리가 읽는 을유판에 비해 문장을 짧게 끊어 썼고(을유판은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라서 그런지 글투도 예스럽고 문장도 길죠), 프라이데이라고 번역해 놓았네요.
저도 프라이데이에 한 표입니다. 이름은 그 나라 말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내 섬은 이제 사람이 여럿 사는 곳이 되었으니 나는 아주 백성이 넘쳐난다고 생각했던바, 내가 일종의 군주처럼 보인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주 즐거워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땅이 순전히 나의 재산이었고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배권을 갖고 있었다. 둘째로는, 내 백성들이 아주 완벽하게 내 밑에 종속되어 있었고, 나는 절대적인 군주이자 법을 부여하는 주군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내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럴 경우가 생긴다면 모두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또한 놀라운 것은 불과 백성이 셋 밖에 없었지만 각자 믿는 종교가 세 가지였다는 것이다. 내 수종 금요일이는 개신교도였고 걔의 부친은 이교도이자 식인종이었으며, 스페인 사람은 구교도였으나, 그럼에도 나는 내 영토 안에서는 모두 신앙의 자유를 누리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 벗어난 얘기긴 하다.
로빈슨 크루소 p.345-346,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이 짧은 단락에 군주, 지배권, 절대적인 군주, 법을 부여하는 주군 같은 단어가 쏟아집니다. 백성이 셋인 상황에서 이 어휘들은 명백히 과잉인 것 같은데, 크루소는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런데 이 자화자찬의 끝에서 갑자기 '약간 벗어난 얘기'라며 발을 빼는데요, 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의 자유 얘기를 꺼내다가 스스로 불편해진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관용을 베푸는 군주라는 설정은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앞의 이야기와 묘하게 충돌하는 것 같고, 무엇보다 금요일에게는 개종을 시켜놓고 자유를 줬다고 하니, 이 모순을 크루소 자신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일까요?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역시 소유권, 지배권입니다. 애초에 이 섬이 왜 크루소의 것인가 하는 겁니다. 자신이 발견했고 농사 지었고 살아남았으니 내 것이다, 이런 논리는 당시 유럽의 식민지 논리와 구조가 같다고 앞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었습니다. 크루소는 이것을 정당화하지도,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당연한 것으로 씁니다. 지배자가 신변 안전을 보장하고 피지배자가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건 홉스(『리바이어던』 1651)로부터, 노동을 가하면 자기 땅이 된다는 것은 로크(『통치론』 1689)로부터 자연스럽게 흡수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읽을수록 『로빈슨 크루소』는 당시의 시대가 충실히 내면화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이 단 한 명도 없을 때도 본인이 섬의 군주, 영주, 왕 내지는 황제라며 소유권이 있다고 그랬었으니, 이젠 ‘내 백성들’이 세 명이나 생긴 기쁨에 과잉 어휘를 막 날리네요 ㅎㅎ 25년이나 혼자 있다가 사람이 네 명이 되면 섬이 꽉 찬 듯 느껴지겠죠. 더이상 무늬만 왕이 아니고 진짜 왕 된 기분? 지나간 내용 중에 보면, 내게서 이 땅을 빼앗아갈 라이벌이 아무도 없고 나랑 지배권 다툼을 할 자도 없으므로, 따라서 여긴 다 내 땅이라는 논리(?)를 펼쳤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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