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실화라고 뻥을 치는 게 그냥 그 시대 유행인 줄 알았었는데, @르구인 님 말씀대로 그 실화 마케팅의 원조가 디포였군요.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
D-29

향팔

향팔
“ […]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이성이 수학의 실체이자 기원이기에 모든 것을 이성에 의거해 가늠하고 맞춰서 만사를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누구건 온갖 물건의 제조법을 시간이 지나면 다 숙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도구를 만져본 적이 없었으나 열심히 일하고, 응용을 하며 고안을 해본 끝에 마침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듯, 특히 연장만 갖고 있다면 만들어 가질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인데, […]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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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이성’의 힘과 ‘진보’하는 세계를 믿었던 가치관이 반영된 문장 같아요.

향팔
“ 그런데 이 작업을 하면서 내 물건들을 뒤지던 중에 어떤 일이 생겼냐 하면, 작은 주머니를 하나 찾았고 거기에는 내가 그 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가금류 모이용 곡식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이게 이번 여행 때가 아니라 그 배가 리스본에서 올 때 담겨 있던 것으로 아마 생각이 되지만, 하여간 주머니에 남아 있던 곡식은 생쥐가 다 먹어버렸고 주머니 속에는 껍질과 먼지만 푸석했기에, 이 주머니를 다른 용도로 쓰려고, 아마 번개가 두려워서 화약을 나눌 때 화약 넣을 주머니로 쓰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바위 밑 방벽 한쪽 바깥에다 주머니에 있는 곡식 껍질들을 털어버렸었다.
방금 언급한 그 찌꺼기들을 내다버린 게 큰 비가 내리기 직 전이었는데, 나는 별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심지어 거기다 뭘 버렸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지만, 한 달 남짓 된 후에 뭔가 파릇파릇한 줄기가 땅에서 솟아올라오는 것이 보였으니, 난 이게 아마도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무슨 식물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거기에서 이삭이 한 10개 내지는 12개 정도 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깜짝 놀라서 완전히 어리둥절해졌으니, 이게 유럽에서 나는 같은 종류의, 아니 우리 영국 보리랑 똑같은 녹색 보리 이삭이었던 것이다.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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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이것이 로빈슨 크루소의 농업의 시작이군요. 거의 우연에서 출발한…. 수확을 보는 일은 쉽지가 않아 4년째가 되어서야 겨우 약간 맛볼 수 있었다니, 마션에서 읽었던 감자 농사도 생각나네요.

르구인
네, 읽다보면 『마션』의 작가가 크루소를 열심히 읽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이렇게 기술적인 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하드SF 장르가 있다고는 하던데요.
『로빈슨 크루소』에서 세세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그렇고, 울타리 치기, 집 만들기, 필요한 것들 만들기 등을 보면 『마션』의 와트니가 했던 일들이 떠올라요. 비닐로 감자밭 만들고 로버 개조하고, 기지의 물건들을 이용해서 이것저것 만드는 것 보면 상당히 유사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를 가진 크루소와 기지를 가진 와트니, 이 지점이 참 비슷한 것 같습니다. 크루소가 홀홀단신으로 섬에 떨어진 게 아니라, 옆에 배가 떡 하니 같이 떠내려와있었다는 설정이 처음에 참 놀라웠습니다. 보통 '배'라는 건 문명이 통째로 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향팔
그러네요. 예전에는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근대적 개인의 홀로서기, 근면과 자립의 중산층 정신을 상징하는 거라고만 배웠던 것 같은데, “‘배’라는 건 문명이 통째로 간다”는 말씀에 어떤 신선하고도 두려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번 독서를 계기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라는 책을 새로 알게 됐어요.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비틀고 뒤집어서 다시 쓴 소설이라고 하네요. 책소개를 읽다가 @르구인 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대목인 것 같아 가져와봤습니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과거의 영국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난파한 배의 표류물을 주워 모아 섬 안에 작은 영국 식민지를 또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것입니다.” -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의 대표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재출간됐다. 번역자 김화영 교수의 재검토와 교정과정을 거쳤으며, 오역을 바로잡고 작가 연보를 추가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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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책 소개 감사합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은 소설로는 쿳시의 『포』만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로빈슨 크루소』를 오디오북으로 한 번 듣고 이번에 글 책으로 보고 있는데요.
내용이 읽기 전에 생각했던(주워들었던) 것과 많이 달라서 놀랐어요. 거기에다가 디포의 이야기를 뒤집은 쿳시의 『포』의 해석을 읽고 나니 디포의 이야기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더랬습니다.
소개해주신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에는 또 어떤 해석이 담겨있을지 궁금하네요. 이 책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포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쓴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 '포'라는 제목은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Defoe)의 'Foe'에서 온 것으로, 불어의 de는 'not'을 의미하므로 쿳시가 디포의 원래 모습을 폭로하려 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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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아, 쿳시도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썼었군요. 이렇게 쟁쟁한 작가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도전한 걸 보니, 로빈슨 크루소가 갖는 시대적 의미가 정말 큰갑다 싶기도 하고, 이 작품이 문제작이긴 문제작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모시모시
오. 이 포라는 책 꼭 읽어보고싶네요. @향팔 님이 소개해주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도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르구인
“ 11월 13일. 이날은 비가 내려서 아주 기분이 상쾌햇고 더위를 식혀줬지만, 끔찍한 천둥과 번개도 동반했기에 내 화약이 어떻게 될까 봐 심한 두려움에 떨다가, 천둥이 지나가자마자 나는 비축해온 화약을 최대한 작은 묶음으로 나눠놓아 한꺼번에 터져버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
『로빈슨 크루소』 p.106-107,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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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모시
다 읽었고 알고 있다고 생각한 책이었는데, 어렸을 때 읽은게 엄청난 축약본이었나봐요!! 너무 새롭습니다!!
르구인님 말씀듣고 해설을 먼저 읽고 읽고있는데 도움되는것 같아요.

르구인
감사합니다. ^^ 번역자께서 해설을 재밌고 알차게 잘 써주셨죠! 그 시대의 정치, 종교, 경제적인 분야까지 정리가 돼 있고, 디포의 개인사(!)도 설명돼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르구인
“ 11월 14, 15, 16일. 이렇게 사흘 간 내리 나는 1파운드 내지는 최대 한 2파운드 정도의 화약이 들어갈 만한 작은 네모 궤짝 내지는 상자를 만들며 보냈는데, …
이날들 가운데 하루는 큼직한 새를 한 마리 잡았는데, 고기 맛이 좋았지만 새 이름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
『로빈슨 크루소』 p.106-107,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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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 11월 23일. 이 도구들을 만드느라 또 다른 작업은 정지되어 있었기에, 이걸 다 만든 다음에는 계속 내일 내 기력과 시간이 허용하는 한 작업을 계속했고, 내 물품들을 넉넉하게 저장할 수 있도록 내 동굴 공간을 가로 세로로 넓히는 데 꼬박 18일이나 걸렸다. ”
『로빈슨 크루소』 p.109,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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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1월 3일. 내 울타리 내지는 담장 작업을 했으니, 여전히 나는 누군가가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기에 벽을 매우 두껍고 단단하게 보강하기로 맘을 먹었다.
『로빈슨 크루소』 p.111,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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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섬에 혼자 사는 크루소의 행동들이 참 묘합니다.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화약과 총을 못 쓰게 될까봐 너무 두려워하고, 창고를 만들고, 저장하고, 진지를 만들고, 거처를 위장합니다.
지금 시점은 이 섬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기 전이란 말이죠. 그런데 마치 동굴 밖에, 자기 시야 너머에 적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준비하는 모습이거든요.
콜럼부스 등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이미 200년 이상 드나들었고 그동안 '신세계'에 대한 과장된 소문들, 예를 들면 식인풍습 같은 것들이 유럽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을 것 같기도 한데요. 신세계와 타자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 때문일 것 같기도 합니다.

향팔
@르구인 님 글을 보다가 지난번 YG님 방에서 읽은 꿀잼책의 한 대목이 생각났어요. 1628년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박연) 일행이 나오는 부분인데요. 저녁에 제주 사람들이 횃불을 켜고 배로 다가오자, ‘아! 식인의 섬에 도착했구나. 이들이 우릴 이제 불에 구워먹으려나보다’ 생각하고 울부짖었다는…. 유럽인들은 아시아건 아프리카건 아메리카건 간에 자기들이 모르는 곳에는 식인종만 산다고 생각했나봐요.
“또한 그[벨테브레이]의 나라에서는 고려인들이 사람을 구워 먹는다고 말했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저녁이 되자 관리와 병사들이 횃불을 켜고 조사하러 왔다. 배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 불에 구워 먹는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남만 풍속에는 밤에도 등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횃불이 없다. 이를 미루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다른 나라 이야기를 전 하는 것은 대부분 허구인 것으로 생각된다.” - 『한거만록』, 정재륜(1648~1723)

항해사 흰닭, 파드레, 그리고 오렌지 반란군의 기이한 모험 - 16~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의 만남370여 년 전 조선의 해안에 불시착하여 17세기 전 지구적 소빙기의 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밥을 얻어먹었다던 사람들, 그 사람들처럼 넓은 바다를 건너 지구의 이쪽저쪽을 왔다갔다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인연을 맺었던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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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구인
오.. 정말 그러네요. 유럽인들은 유럽 밖은 야만인들의 세상이고 식인종들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올려주신 책, 정말 재밌어보입니다!! 내용이 너무 궁금하네요. 책 추천 감사합니다.

르구인
“ 나는 또한 이것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 는데, 비 오는 철에 특히 비가 폭풍과 허리케인을 수반할 때 밖에 나다니는 것은 내 건강에 가장 유해한 일이라는 것으로, 건기에 비가 내릴 때는 거의 늘 이런 폭풍을 수반했던 터, 이런 비는 9월 이나 10월에 내리는 비보다 훨씬 더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이 불행한 섬에서 10개월째 지내고 있었고 이런 처지에서 구출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빼앗긴 것으로 보였으며, 나는 이곳에 사람의 형상을 한 그 어떤 자도 발을 디딘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기에 이제 내 거처를 내 생각에 충분히 만족할 만큼 안전하 게 만들어놓았으니, 이 섬을 보다 완벽하게 파악하여 아직 그 어떤 산물들을 내가 더 찾아낼 게 있는지 알아내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 게 되었던 터, 아직 이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7월 15일에 나는 이 섬을 좀더 자세히 탐사하기 시작하여, 앞에 서 언급했듯이 내 뗏목을 갖다 댔던 샛강을 따라 가서 한 2마일 정도 올라가자, 더 이상 물살이 흘러들어가지 않고 그냥 조그맣게 졸졸 흐르는 샘물 정도임을 발견했는데, 물맛이 아주 신선하고 좋 왔으나 이게 건기라서 일부는 물이 거의 다 말라버렸거나 아니면 적어도 물길을 만들어 흘러가는 게 보일 정도로 충분히 흐르지는 않았다. ”
『로빈슨 크루소』 p.143,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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