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

D-29
<마션>에서도 와트니가 거주용 막사를 두고 ‘집’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보니 저에게도 갑자기 떠오르는 일화가 있어요. 학생 때 엄청 열악한 기숙사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그러다가 주말에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서 오랜만에 집다운 집이랄까, 아주 아늑한 숙소에 머물러서 기분이 너무 좋았거든요.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기숙사로 출발하면서 우리 일행끼리 “아 이제 집에 가자 집에”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어머 그것도 집이라고 집이랜다” 하면서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래되고 지저분한 기숙사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낡은 벽에 그림과 사진을 붙이고, 책상에는 조명과 꽃을 사다 놓으면서 그 공간이 어느새 ‘나의 것’이 되고, 당시엔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편안함과 익숙함을 주는 ‘집’이 되었나 봐요. 비록 머지않아 떠나게 될 공간이지만요. 그런 경험도 크루소가 만든 ‘요새’와 조금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요. 요새 하니까 생각나는데 소설 속 크루소는 말끝마다 ‘내 요새’, ‘내 텐트’, ‘내 동굴’, ‘내 총’, ‘내 나무 삽’ 하면서 내 것이라는 걸 자꾸만 강조하더라고요. 뺏어갈 사람도 없는데… 내 것이라는 게 그런 걸까요. 위협이 있건 없건 절대 지켜야 하는, 신성 불가침스럽기까지 한 나의 나와바리! 자연(타자)과 문명(나) 사이에 그어놓은 경계선 같은 거요.
크루소가 울타리 치는 모습에 기시감이 들어서 로빈슨 크루소와 인클로저로 검색을 해보니, 각종 블로그 글들과 연구 논문이 쏟아지더군요. -,-;; 영국의 인클로저가 15세기경부터 시작해서(그 전에도 일부 있었지만) 19세기까지 수백 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하는데요. 17세기도 인클로저가 극심하게 이루어지던 시기 중 하나라고 하네요.
아, 그러네요. 로빈슨 크루소의 “내 울타리”가 영국의 인클로저와 연결되는군요. 저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부분이에요. 모든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데, 고전 작품별로 이런 점을 연구한 논문이나 해설을 읽는 것도 작품 자체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겠어요.
^^ 다정하고 따뜻한 추억이네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향팔님 추억을 듣고 보니, 함께 동고동락했던 저의 열악했던 '집'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ㅎㅎ;
내 형편이 이제 어떠했냐 하면,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농장(plantation)을 이 섬에 2개 갖고 있었으니, 한 곳에는 나의 작은 요새이자 텐트를 쳐놓고 바위 밑으로 벽을 둘러놓고 뒤로는 동굴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 안에 방 내지는 굴을 여럿 더 피서 서로 연결되도록 해놓았으니 제법 확장되어 있었다. … 이곳 말고도 나는 전원 저택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도 그런대로 괜찮은 농장(plantation)을 갖고 있었으니, 첫째로는 거기에 내가 자칭 작은 정자라고 부르는 집이 있었는데, 이곳도 간수를 잘 해놓아서 그 주위를 둘러 심어놓은 관목 울타리를 항상 일정한 높이로 유지하고 사다리는 늘 안쪽에다 넣어두었으며, …
로빈슨 크루소 p.218-219,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심지어 크루소는 자기 농장을 '플랜테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아래 링크에서 원문 검색을 해보니, farm은 두 번 나오고, plantation은 37번 나오네요. -,- https://www.planetpublish.com/wp-content/uploads/2011/11/Robinson_Crusoe_BT.pdf 플랜테이션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식민이라는 뜻으로 먼저 쓰였다고 하더군요. 유럽의 문명을 갖다 심는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는 식민과 대농장 두 가지 뜻으로 쓰였고, 크루소 시대가 여기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나중에는 지금 우리가 쓰는 것처럼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의 뜻으로 쓰이게 됐다고 하네요. https://en.wikipedia.org/wiki/Plantation_(settlement_or_colony) 이런 면에서 보면, 크루소는 영국 내에서 이루어지던 인클로저와 영국 밖에서 펼쳐지던 식민제국주의를 무인도에서 동시에 실행한 셈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제 내 삶의 새로운 국면을 다룰 차례다. 어느 날 정오 무렵에 내 보트를 향해 가던 중 나는 웬 사람의 맨 발자국을 해안에서 발견하고서 몹시 심하게 놀랐으니, 모래사장에 난 자국으로 보아 그것이 사람 발임은 분명했다. 이에 나는 마치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아니면 마치 유령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는데, 주위에 귀를 기울이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또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 … 어찌나 온갖 험한 생각이 매순간 내 공상 속에 떠올랐는지, 참으로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괴한 것들이 어찌나 내 생각 속으로 불쑥불쑥 끼어들었는지, 이루 말로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빈슨 크루소 p.221-222,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섬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흔적(발자국)을 발견하게 된 게 15년이 지난 시점이네요. p.231에 "내가 이제 여기서 15년을 살았고 그동안 사람의 모습이건 그림자건 전혀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 ..."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진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현신이고 뭐고 간에 15년동안 사람 하나 못 만났다니 딱한 마음이 먼저 듭디다.. (작가가 너무해 ㅜㅜ)
28년이라는 시간이 참 긴데, 소설에서는 점프점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 작업이 끝나자 나는 내 방벽 바깥 땅 사방에다가 말뚝 내지는 작대기처럼 솟아나는 버들가지 같은 나무들을 심었는데 이것들은 워낙 잘 자라고 부러지지 않는 것들이라, 아마 내 생각에 한 2만 개 정도는 심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내 방벽과 이 나무들 사이에 제법 넓은 공터를 남겨두어서, 적들을 관찰할 수 있고 놈들이 내 외벽에 접근하려 할 때 이 어린 나무들 뒤로 몸을 숨기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듯 2년의 시간 동안에 나무들은 촘촘하게 작은 숲으로 자랐고 5, 6년이 되자 내 거처 앞에 제대로 된 숲이 자라났으니, 워낙 기묘하고 견고하게 뒤엉켜서 …. 그 너머에 사람의 거처가 있는지는 고사하고 애토에 무슨 물체가 있는지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며, …
로빈슨 크루소 p.232-233,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섬에서 낯선 발자국을 본 후 너무 놀라서 거처 주변에 방벽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은폐 작업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또 5~6년이 지나가네요. 그러면 이제 섬에 온 지 20년이 되는 거네요.
내가 언덕 아래로 내려와서 지금까지는 와본 적 없던 섬 끝에 당도했을 때 사람 발자국을 보는 게 내가 상상했듯이 이 섬에서 뭐 그리 괴상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내가 야만인들이 전혀 오지 않는 섬의 반대편으로 떠내려오게 된 것은 특별한 섭리임을 깨달았으니, … 마찬가지로 이들이 서로 충돌이 잦았고 카누에서 싸움을 하다가 승리자들이 죄수들을 이 쪽 해안으로 끌고 와서는 이자들이 모조리 식인종들이니 그들의 끔찍한 풍습에 따라 죽여서 잡아먹었을 법한 일인데, 아무튼 이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언덕에서 내려와서 섬의 서남쪽 지점인 그 곳 해안으로 갔을 때 나는 완전히 놀라움에 질려버렸으며, 그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두려움을 말로 표현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 정도이니, 해안 사방에 두개골, 손, 발 및 사람 몸의 기타 다른 뼈들이 흩어져 있었고, 특히 내가 한 곳을 자세히 보니 거기에서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는데 땅에다 둥그런 구덩이를 보트 좌석처럼 파 놓은 걸 보니, 거기에 둘러앉아 이 처참한 야만족들이 인륜을 저 버린 잔칫상을 벌이고 앉아 동료 인간을 먹었던 모양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p.236-237,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요컨대 내 형편과 경험에 비춰서 내가 온당히 내린 결론인즉, 이 세상의 모든 유익한 것들은 오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내게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쌓아두는 것들은 사실 남들에게 주고 말 것이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만큼만 즐기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득도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혼자 살면 철학자가 되고마는건가 싶네요
그러게요. 저도 이 대목 밑줄 쳤습니다. 크루소가 하느님에게 의지하며 매사에 감사하려 하거나, 또는 저렇게 득도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그래.. 그래야 위로를 받고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을겨’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는 세상의 온갖 사악함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기에, 내게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없었다. 나는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갖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탐할 일이 없었고, 영지 전체를 소유한 영주였으며 내가 소유한 이 땅 전체의 왕 내지는 황제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라이벌이 아무도 없었다. 나의 경쟁자가 있어서 나와 왕권이나 통수권을 두고 다툴 자가 없었던 것이다. *「요한1서」 2장 16절.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그러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내게는 가치 있었다. 내가 먹을 것과 내가 필요한 것들이 내게 충분했으니 그 밖에 나머지는 내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 요컨대 내 형편과 경험에 비춰서 내가 온당히 내린 결론인즉, 이 세상의 모든 유익한 것들은 오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내게 유익한 것이며, 우리가 쌓아두는 것들은 사실 남들에게 주고 말 것이요,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만큼만 즐기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인생이란 참으로 하나님이 섭리대로 빚어내신 울퉁불퉁한 작품이 아닌가! 형편이 달라지는 상황이 될 때마다 우리의 감정이 무슨 비밀스런 힘에 의해 급하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니! 오늘은 사랑하던 대상을 내일은 증오하고, 오늘은 원하던 것을 내일은 꺼리며, 오늘은 욕망하는 바를 내일은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그걸 걱정해서 겁에 질려 부르르 떠는 법이라, 당시 내 경우보다 더 지극히 생생하게 이것을 예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니, 나의 유일한 고통은, 인간사회에서 추방당한 것으로, 혼자 외톨이로 망망대해에 에워싸여 있어 인간세계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보이는, 내가 이름한 대로 이러한 고요한 삶을 살도록 저주받은 것이며, 나는 마치 하나님이 산 자들의 일원으로 분류하거나 나머지 피조물 속에 끼어 있을 만한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 처지를 고통으로 여기던 바로 내가, 이제는 나와 같은 사람을 본다면 마치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하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인 구원의 축복 다음가는 축복으로 생각해야 할 터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내가 사람을 만날 두려움에 파르르 떨며 이 섬에 사람 하나가 발을 디뎠다는 그림자 내지는 말없는 표시만 보고도 즉시 땅으로 꺼져 들어갈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윤혜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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