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혼자의 시대 읽기

D-29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집안일, 가사, 돌봄노동처럼 ‘일’ 중심의 표현보다는 순우리말인 ‘살림’이라는 말이 돌봄의 의미를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살림이라 하면 빨래, 청소, 요리와 같은 활동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더 깊은 뜻이 있다. 살림은 ‘살리다’에서 온 말이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살림을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이라 정의한다. 즉, 살림이라는 말에는 나와 네가 함께 살아가며 서로를 돌보는 관계라는 뜻이 담겨 있다. 다인가구의 주부가 살림을 하는 이유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살리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다. 살림에 일가견이 있는 내 엄마가 혼자 있게 되면서 끼니를 걸렀던 이유는 요리하는 법을 갑자기 까먹어서가 아니다. 아빠가 요양원에 가고 나니 살림을 해야 할 반쪽의 이유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이처럼 연령, 성별, 직업의 차이를 막론하고 1인가구에게 살림은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가깝다. 요리는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서 ‘배를 채우는 일’로, 청소는 ‘함께 사는 공간을 돌보는 일’에서 ‘견딜 만한 수준의 정돈’으로 바뀐다. 살림은 생명을 살리는 행위에서 생명을 겨우 붙드는 행위가 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림을 하는 것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살림이 반복노동이기 때문이다. 식사는 매일 세 번, 청소는 이틀에 한 번,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시계처럼 돌아온다. 1인가구들도 규칙적이고 위생적인 생활이 중요하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성과가 될 수 없는데 끊이지도 않는 노동이다 보니 컨디션에 따라 자꾸만 미루게 된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한편 자신을 챙겨줄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 챙겨줄 상대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리를 잘하고 사교적인 싱글들은 집에 지인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방식으로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남자친구에게 김치볶음밥을 부탁하는 지영 씨는 사실 지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즐긴다. 그녀는 음식 대접을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김치볶음밥을 먹고 싶은 지영 씨 자신의 마음을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주며 표출한다는 것이다. 희영 씨는 대접하기에 가장 적극적이다. 친구들과 식사하는 시간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는 아예 6인용 식탁까지 구매했다. 지인들에게 자기 집을 “아지트로 삼으라”고 적극적으로 권한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참 현명한 사례라고 생각되어 인용했습니다. 이런 관계맺는 기술은 여성들이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에, 1인가구 시대에는 여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내가 만난 1인가구들이 들려준 고백은 좀 달랐다. 성인에게도 공동조절co-regulation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동조절이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행동을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스려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보통 공동조절은 아이에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들이 낯선 곳에서 부모 손을 꼭 쥐어야 안심하듯 말이다. 그러나 이미 다 자란 어른이 되었어도 우리는 힘들 때 타인의 도움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곤 한다. 친구와 통화하며 불안을 가라앉히고, 가족과 식사하며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애인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집을 치우게 된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때로는 위로받고 때로는 눈치 보며, 타인을 통해 자신을 조절해 온 존재들이다. 그래서 평소 가까이서 서로를 조율해 줄 타인이 없는 1인가구의 살림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1인가구에게 필요한 돌봄관계는 많은 사람과의 얕은 관계가 아니다. 소수라도 집으로 거리낌 없이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깝고 신뢰하는 관계이다. 이런 관계는 단지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모은다고 해서 형성되지 않는다. 결국 1인가구의 자기돌봄 실패를 개선하려면 인격적인 돌봄공동체가 필요하다. 여성주의 정치철학자 조앤 트론토Joan Tronto는 돌봄관계의 인격적인 속성을 강조한다. 돌봄관계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를 향한 관심, 상대를 책임지려는 마음, 기꺼이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을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돌봄의 이런 속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기계적 소셜 네트워킹은 1인가구에게는 오히려 비인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가까운 지역사회 안에서 지속 가능한 돌봄공동체를 형성하는 길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1인가구가 외발자전거로 서커스하듯 살림을 이어가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가능해진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월 700만 원을 버는 1인 디자인 기업 대표 지호준 씨와 월 50만 원으로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 백승민 씨. 둘 다 혼자 살고 있다. 이 중 누가 더 잘 먹고 살까? 상식대로라면 답은 뻔하다. 그런데 막상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짐작과 상당히 달랐다. 호준 씨는 매일 배달앱을 뒤적이며 허기를 채우거나 굶는 일도 잦았다. 반면 승민 씨는 밥을 직접 짓고 반찬을 사다 먹거나 간단한 요리도 했다. 소득이 열네 배나 차이 나는데, 어쩐지 식탁의 격차는 그만큼 벌어져 있지 않았다. 1인가구 연구를 시작하면서 나는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마주했다. 사회적으로는 꽤 성공한 사람인데 평소 먹는 음식이 부실하고, 사는 집은 좁고 허름했다. 반면 형편이 어려운데도 균형 잡히고 건강한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은 경제력이 1인가구의 의식주 생활에서는 반대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혼자의 시대에도 여전히 가족 단위를 기준으로 하는 식재료 시장은 1인가구에게 일종의 싱글 페널티single penalty로 작용한다. 경제력이 있는 1인가구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1인가구는 가족을 이루지 않았다는 이유로 더 비싸고 덜 신선한 음식을 먹으며 보이지 않는 비용을 지불한다. 나는 이런 제약을 확인하면서 혼자 사는 주민들끼리 건강한 식재료를 공동구매할 수 있는 지역사회 네트워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논문의 제언에도 담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나름의 자구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연구보다 현장이 훨씬 빨랐다.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난 ‘소분모임’이 그것이다. 동네 주민, 직장 동료,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이 함께 장을 본 뒤 식재료를 나누는 자생적인 모임으로, 2022년부터 당근마켓에 올라오기 시작해 지난 1년 동안에만 다섯 배나 증가했다. 대용량 채소나 정육을 공동구매해 1인분씩 소분하면 신선한 재료를 적정한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재료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도 넓어진다. 시장이 1인가구를 위해 움직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그 제약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안녕하세요. 회원가입 하자마자 첫 모임으로 참석해 보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는 30대 남자로서 이 책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네 반갑습니다!
1인가구의 살림과 자기돌봄은 주거환경, 특히 집의 넓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요리 솜씨가 있어도 고시원에서는 펼칠 수 없고, 친구가 있어도 원룸으로는 초대하기가 쉽지 않다. 르페브르의 말처럼 좁은 공간이 좁은 선택과 좁은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부유한 1인가구라도 방 단위 주거에 머무른다면 마찬가지다. 1인가구에게도 먹고 자고 씻고 쉬는 공간이 분리된 투룸 이상의 주거가 인간다운 삶의 시작이다. 좁은 집에서는 살림이 자라지 않는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그러나 이렇게 시간을 아끼는 식사는 삶의 질을 높이지 못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말한 것처럼, 현대인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기술과 소비를 동원하지만 그 결과로 오히려 시간이 더 모자라는 상황, 즉 가속의 역설에 빠진다. 느긋하게 식사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일에 모든 시간을 흡입당해 버린다. 시간을 아끼려다 잃게 되는 건 여유만이 아니다. 불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고, 배달 음식과 외식에 의존하다 보니 건강 상태도 더 나빠진다. 보통 다인가구는 소득이 높을수록 식생활 습관이 좋은 경향이 있지만, 1인가구에게는 이러한 상식적 추세가 뚜렷하지 않다고 앞서 밝혔다.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높은 1인가구일수록 콜레스테롤 섭취량이 높게 나타난다는 영양학자들의 연구도 기억할 것이다. 이는 “피자나 파스타, 리소토, 해장국, 뼈해장국, 감자탕을 배달받아 먹는” 고소득 1인가구의 식생활 패턴을 보았을 때 어쩌면 예견된 결과일지 모른다. 돈을 벌수록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돈을 벌수록 더 못 먹게 되는 상황 말이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1인가구도 잘 살려면 의식주가 중요합니다. 빨래가 잘 된 옷, 사먹는 식사가 아니라 정성들여 만든 식사, 공간이 잘 분리되고 주기적인 청소가 되는 집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유대와 공동체가 가장 중요합니다.
세탁은 유독 소득수준에 따른 방식의 차이가 선명하게 보이는 살림의 영역이었다. 겉보기에는 빨래방과 세탁서비스 모두 가사의 외주화에 속한다. 하지만 빨래방은 본인이 직접 빨래를 운반하고 세탁 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노동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 반면 세탁서비스는 노무사인 지나(23_중) 씨의 설명처럼 세탁물을 가져가고 가져다주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을 구입하는 것이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1인가구의 의식주 소비를 지배하는 기준은 가성비다. 다만 그 층위가 다를 뿐이다. 저소득층에게 가성비가 비용 절감이라면, 고소득층에게는 시간 절약이다. 시간을 아끼려고 직장 근처에 살고, 배달 음식을 시키고, 세탁을 맡긴다. 어느 쪽이든 윤택함이나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이 지점에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은 한계에 부딪힌다. 과거 부르디외가 관찰했던 고소득층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고소득 1인가구들도 인간관계에서는 비슷한 성취와 취향을 기준으로 자신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살림의 영역에 이르면 이 구별짓기는 작동을 멈춘다. 이들의 식사는 느긋한 미식이 아니라 빠른 허기 채우기에 가깝고, 집은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라 잠만 자는 휴게소가 된다. 인간관계에는 높은 벽을 세우지만, 정작 자신의 일상을 돌보는 기준은 무너져 있다. 구별짓기보다 구별포기에 가깝다. 그 속에서 함께 식탁을 나눌 사람은 줄어들고, 혼자 하는 식사는 점점 더 빠르고 고독해진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왜 1인가구에게는 돈이 삶의 질로 쉽게 전환되지 않을까? 1인가구의 살림을 여러 차원에서 검토하면서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다. 이들이 돈으로 주로 구매하는 것이 삶의 질이 아닌 편리함이기 때문이다. 이 편의들은 삶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가사에 투입될 시간은 아껴주지만, 정작 확보된 시간은 자기를 돌보는 데 사용되기보다 노동시간으로 다시 흡수된다. 그 결과 일상의 돌봄은 점점 더 외면당한다. 돈을 더 벌고 더 쓰는데도 여유로움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1인 가구가 주로 구매하는 것이 삶의 질이 아닌 편리함이고, 그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다시 흡수된다는 분석이 와닿았어요.
네 저도 이부분의 통찰이 굉장히 탁월하다고 느꼈어요. 저는 지금은 1인 가구가 아니지만 제가 하는 소비는 얼마나 다른가 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집은 사회적 긴장을 내려놓는 공간이다. 흐트러진 모습, 피곤한 상태를 드러내도 되는 곳이다. 그런데 낯선 사람과 함께 살면 그 공간에서도 경계를 풀기가 어렵다. 게다가 친밀한 관계란 자연스러운 만남과 점진적 노출을 거치며 형성되는데, 셰어하우스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관계가 형성되기도 전에 사적 공간을 오픈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 낯선 사람을 마주칠지 모르는 부엌과 거실은 편안한 공간이 되기 어렵다. 베르디움 프렌즈의 셰어하우스에 입주하기 꺼리던 청년들의 요청 역시 친구와 동반 입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나와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 싶은 사람과 함께 살길 원한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성인입양까지 고려하지는 않더라도 적지 않은 1인가구가 생애 후반기에 친구들과 함께 사는 모습을 상상하곤 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이는 막연한 꿈에 그치기 쉽다. 만약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만 꿈꿔왔던 일들을 제도가 좀 더 쉽게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면, 가족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돌봄공동체가 되어주는 삶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1인가구가 잘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친족 이외에 기댈 수 있는 연대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정상가족 서사가 굉장히 강해서, 그 외의 공동체를 만들기 굉장히 불리합니다. 동성결혼이 아직도 법제화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죠. 1인 가구 천만시대에, 다른 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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