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 혼자의 시대 읽기

D-29
타인과 자아의 관계를 탐구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의 시선이 갖는 이 오묘한 순기능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우리가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을 마주할 때, 그 타자의 현존이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주한다’는 것이다. 판옵티콘의 일방적 감시와 달리 이 시선은 쌍방향이다. 이처럼 마주하고 응답할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람이 나를 보아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살피게 된다. 그것은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책임감이다. 그렇게 관계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돌봄이 자연스럽게 깨어난다. 그것이 ‘봐주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타인의 시선'의 순기능. 이성친구가 있으면 혹시 집에 올 수 있으니까 청소도 살림도 잘 해 놓게된다는 예시가 너무 찐 와닿아서 기억에 남습니다.
읽기 4주차입니다. 7장.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생애 - 8장. 마무리가 있는 인생.
1인가구의 가족 범위는 혼자 산다고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이들 마음속 가족 지도의 중심에는 부모와 형제자매가 여전히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1인가구를 ‘가족 밖의 사람’이라고 단정해 온 통념은 이들의 실제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경우, 이들의 가족 인식은 오히려 원가족의 오래된 기반 위에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영국 사회학자 존 버나즈Jon Bernardes는 가족의 자격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 수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가족시민권family citizenship이라고 불렀다.[ 8 ] 싱글 1인가구들은 물리적으로는 독립된 가구로 살아가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부모를 간병하고, 형제자매의 가정을 돕고, 조카를 챙기면서 성심껏 가족적 실천을 한다. 1인가구는 자칫 자신과 소원해질 수 있는 원가족을 전방위로 돌보며 쓸모 있는 가족구성원의 입지를 성취해나간다. 명사처럼 떨어져 있는 부모의 집과 형제가족의 집을 동사처럼 오가며 가족으로서의 연결을 이어간다. 이들은 가족의 바깥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심에서 가족을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원가족 안에서 명예 가족시민권을 획득해 나간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사회학자 재닛 핀치Janet Finch가 말한 가족시연displaying family이라는 개념은 이들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핀치는 가족은 일련의 퍼포먼스를 하면서 서로가 가족임을 내부나 외부에 시연한다고 설명한다. 명절에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기일에 같이 모여 제사나 예배를 드리고, 친인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부모의 기념일을 챙기고, 가족사진을 찍어 걸어두는 일이 가족시연의 예다. 이런 가족시연을 통해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가족다운 가족임을 인정받는다. 이 가족시연의 기본 형식 자체가 핵가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부부의 기념일, 자녀의 생일과 학교 행사들이 시연의 핵심 콘텐츠이다. 비혼 1인가구는 의도치 않게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엑스트라나 관객으로 역할이 정해져버리는 셈이다. 적지 않은 1인가구들이 부모와 형제자매의 가족에게 애정과 관심을 쏟으며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불균등한 구조하에서 합당한 배려와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된다. 1인가구가 느끼는 서운함은 누군가의 악의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핵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배제에 가깝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부모가 돌아가시면 “혼자만의 가족”이 될 것이라는 희은 씨의 위기감은 많은 장년기와 노령기 1인가구들에게는 현실이 된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1인가구 중 부모님이 안 계신 40대 중반부터 60대에 이르는 인터뷰 참여자들은 형제자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 범위를 묻는 질문에 ‘나 혼자’라고 답했다. 가정 내에서 하나의 관계가 변화하면 그와 연결된 다른 관계들도 변화한다. 원가족의 중심축 역할을 해주던 부모가 사라지면서 1인가구들의 가족 내 역할과 관계성 또한 바뀌게 된 것이다. 연구에 참여한 1인가구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당신의 가족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나 혼자’라고 답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비로소 내 가족이 자기 자신뿐인 1인가족이 된 것이다. 금전적으로 충분한 경제활동을 못 하게 되거나, 신체적으로 쇠약해지는 50대 중후반 이후가 주된 터닝포인트였다. 형제자매와 조카를 포함한 확대가족까지 내 가족으로 인식하는 젊은 1인가구와 비교했을 때, 노년기가 가까워지는 1인가구들에게 매우 급격한 가족 인식 범위의 축소가 일어난다. 물론 자신이 혼자라고 말한 고령의 1인가구들에게도 여전히 형제자매나 조카 같은 혈육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때문에 다른 형제자매 가족들이 부담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그러니까 괜히 가족에게 골드를 빼앗기지 말고 네 노후를 위해 쌓아두어라’는 메시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한 인간의 안녕은 경제적 자원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노년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골드가 아니라, 골드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을 지탱해 줄 관계와 공동체, 그리고 연결이다. 이 시점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한 소년에게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누어주고 나뭇가지를 땔감으로 내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는 나무에게 거름도 주고, 추운 겨울에 짚으로 보호대를 채워주고, 나이 들어 쓰러져 갈 때 버팀목을 대어주지 않았을까? 덜 기다리고 더 풍성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형제가 1인가구이고, 그다지 살갑지 못한 가족이어서 책에 나오는 확대가족보다는 교류가 별로 없는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1인 가구의 생애주기에서 다른 가족들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그가 필요로 할 때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인연의 끈이 풀리지 않은 채로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비혼 1인가구가 원가족에게 해왔던 실천을 공동체를 위해서도 했더라면, 그들이 가족에게서 그토록 얻기를 바랐던 시민권을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인터뷰와 각 인터뷰이들의 분석, 생활역량으로서의 문화자본, 살림과 돌봄, 대가족->핵가족->1인가족으로 진행되는 노동력 뽑아먹기의 경쟁적 진화 등 자료 수집과 분석도 심도 있고, 생각해볼만한 지점도 많이 제시한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다만, 셰어하우스, 커뮤니티공간, 협동조합식의 지역 공동체... 등의 논의는 있으나 실제화가 어렵거나 좌초된 경우가 주로 보이는 해결 방안만을 보여주는 데 머무른 건 좀 아쉽네요. 바우만의 리퀴디티 문제제기를 언급하고도 그 부분에 대한 무언가..가 없는 것 같아서요. 해결책이 어렵고 명쾌한 게 없으니 학자의 라이프워크가 될만한 거겠죠. 앞으로 논의를 더 기대해보게 됩니다.
1인가구가 겪게 되는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공동체의 부재인데, 동시에 가장 해결이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없어지기는 쉬워도 만들기는 어렵고, 그래서 기존 공동체 - 혈연가족이나 교회 등- 이 나름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존속하고 있고요. 학자 한명의 연구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겠고 1인 가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제고될수록 대안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심하게 아팠던 경험은 1인가구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전통적인 생애주기에서는 결혼, 출산, 분가, 사별처럼 가족구성원의 변화가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가족적 사건을 경험하지 않는 1인가구들에게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생애사적 사건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대부분이 자신의 건강 변화를 꼽았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이처럼 내가 만난 1인가구들은 죽는 순간, 즉 사망death이라는 사건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모든 인간은 혼자 사망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더라도 사망 자체는 한 개인이 고스란히 겪어야 할 본래적으로 고독한 순간이다. 그래서 1인가구라는 이유로 혼자 맞게 될지 모를 사망의 순간을 특별히 더 두려워하진 않았다. 오히려 적지 않은 1인가구가 염려했던 지점은 사망에 이르기 전에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카스텐바움과 모어먼의 죽어감-사망-사후로 이어지는 죽음의 과정으로 보자면, 죽어감dying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죽기 전에 크게 아프지 않고 사망하길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병을 앓고 있거나, 가까운 사람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바람이 더 컸다. 백승민 씨처럼 부모님이 병환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모습을 지켜본 1인가구들은 자신은 이런 고통 없이 “깔끔하게” 떠날 수 있길 바랐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하지만 이렇게 죽음 앞에서 나름 초연한 태도를 보이던 1인가구들조차 공통으로 두려워하는 죽음의 장면이 있었다. 22명 중 20명에 이르는 압도적 다수가 가장 두려워한 죽음의 지점은 죽기 이전도 죽는 순간도 아니었다. 바로 죽음 이후after death의 상황이었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이처럼 1인가구가 느끼는 고독한 죽음에 대한 공포는 혼자서 죽는 사건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홀로 “발견될” 자기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두려움은 인간의 죽음 경험이 지극히 사회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방증한다. 사실 죽음 이후는 죽은 자가 인식할 수 없다. 본인이 직접 맞닥뜨리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1인가구가 죽기 전에 자신이 몸소 겪게 될 고통보다 죽은 다음에 자기 모습이 타인에게 추하게 비춰질까 봐 걱정했다. 자기 죽음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맥락화하는 것이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유희영 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애도의 과정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받고 싶다고 덧붙였다. 비록 죽기 전에 가족구성원에게 “당신은 좋은 아내였어, 좋은 엄마였어”라는 말을 들을 순 없겠지만, 한 명의 사회구성원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사회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면 무의미하지 않은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수행해 왔던 애도를 사회가 함께하면서 죽음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원하는 것이다. 희영 씨가 인정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소셜 아이덴티티 즉, 사회적 존재감이다. 한 인간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존중하면서 사회 안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애썼다’라는 위로와 함께 ‘네가 우리의 구성원이어서 기뻤어, 함께 해주어서 고마웠어’라는 메시지를 사회로부터 받고 싶어 했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이처럼 내가 만난 1인가구들은 자신의 ‘인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예의가 갖춰진 끝을 맞이하기를 소망했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그래서 이 혼자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고독한 죽음을 존엄한 죽음으로 감싸는 공동체적 포옹일 것이다. 고독사 사망자를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애도하는 과정. 망자와 그 주변에 예의를 다하는 사회적 장례시스템. 이처럼 마무리가 있는 생애가 가능하다면, 위기에 처한 1인가구들을 애써 발굴하려 하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손을 내밀며 사회 밖으로 나올 것이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가 고독한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본질적 해법이다. 이를 위한 장례희망들이 저마다의 삶에서 상상되길 바란다.
필연적 혼자의 시대 김수영 지음
죽음은 오롯이 혼자서 겪는 과정이고, (내세를 믿지 않는다면) 죽고 나서 감정을 느낄 나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느껴질까봐 걱정하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사람의 고통과 죽음은 그냥 물리적인 사건이 아닌 사회적으로 해석되는 사건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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