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헉, 어린 시절에 레닌그라드 봉쇄를 겪었다니요. 생존했다는 자체가 놀랍고 다행입니다. 동생 보리스가 국가와 체제에 비판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도 이해가 되네요. 그렇게 끔찍한 참극에서 살아남아 이런 작품을 남겨주어 감사하고요. (형제가 얼굴은 똑같이 생겼지만 인생관이나 세상을 보는 눈은 서로 상이했나보군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SF소설들에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스며있어 태클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는데, 정치관이 서로 달랐다는 것도 희한합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전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전 모임에서 읽었던 스타니스와프 렘도 폴란드에서 직접 게토와 나치 점령의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가리지 않고 체제 자체에 비판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었거든요. 개인은 아무리 악하더라도 그가 저지를 수 있는 악행에 한계가 있지만, 관료화 된 악행은 실현되는 순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세 문인들 모두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것 참 흥미롭군요, 필먼 박사님. 그런데 저는 기술적인 발견을 말씀드린 거였는데요. 우리 지구의 과학과 기술에 활용할 수 있을 발견들 말이죠. 여러 저명한 연구자들은 방문 구역에서 발견된 것들은 우리 역사의 흐름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예상하지 않습니까." "음, 나는 그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노변의 피크닉 p.1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니까 저희 하몬트에서는 공포와 위험을 무릅쓰고 구역에 잠입해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전부 가져오는 젊은이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군. 우리가 관할하는 일은 아닙니다."
노변의 피크닉 p.2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어떤 '깡통'이 됐든, 그게 어떻게 변하든, 그걸 부수거나, 산으로 녹이거나, 압력을 가해 으스러뜨리거나, 용광로에서 녹여야 했다. 그리하여 그가 모든 걸 이해하게 되는 날, 그에겐 영광과 찬사가 쏟아지고 전 세계 과학계는 심지어 환희로 차 전율하겠지. 하지만 그 순간은, 내가 알기론 요원하다. 여태껏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그저 고생만 해 뭔가 흐리멍덩해지고 과묵해졌으며 병든 개의 눈을 해 가지고는 눈물까지 고여 있다.
노변의 피크닉 p.2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나는 안다. 그는 마치 구역을 완벽하게 알고 이해한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니까, 그는 금방 죽을 운명이다.
노변의 피크닉 p.2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내게도 잘못이 있다. 과자로 애를 꼬셔 놨더니, 과자는 항아리 속에 있고, 항아리는 화난 아저씨들이 지키고 있었던 꼴이니……
노변의 피크닉 p.35~3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 트럭들은 정말 불쾌하다니까! 13년을 밖에 서 있는데도 새 것 같잖아…… 스무 보 떨어져 있는 벤진 운반차는 체에 걸러진 것처럼 혼자 녹슬어 있는데, 트럭들은 이제 막 벨트컨베이어에서 완성되어 나온 것 같다고…… 구역이란!"
노변의 피크닉 p.3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구역에서 노획물을 갖고 돌아오면 기적, 살아 돌아오면 성공, 순찰대의 총을 맞아도 운이 따른 거고, 나머지는 운명이다…….
노변의 피크닉 p.4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기 과학의 영웅들이 인류와 지성, 그리고 성스러운 영혼의 제단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러 간다, 아멘, 이런 의미로. 아니나 다를까, 15층이나 되는 연구소의 창문마다 동정을 표하는 아가리들이 나타났다. 그저 손수건을 흔들지 않고 오케스트라가 없다 뿐이지.
노변의 피크닉 p.4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말해두는데, 이 우주복은 쓰잘머리가 없다. 우주복 없이도 나는 정말 꽤 오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만큼은 살 건데, 지금처럼 간절한 순간에 그 한 모금을 못 마시면 우주복이 다 무슨 소용인가!
노변의 피크닉 p.5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앞에서는 우주복을 칭찬하며 이게 없었다면 살지 못했을 거라고 떠받들다가 '구역'에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흉보고 불평하는 태도의 전환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대비 때문에 주인공의 불안감이 느껴지네요.
저는 이 우주복을 입는 공간 이름이 ‘부인실’이라는 게 특이했어요. 왜 부인실일까 ㅎㅎㅎ 나름 옷을 챙겨 입는 방이라, 파우더룸 같은 의미일까요. 공포의 구역으로 향하는 남성들의 파우더룸이라… (현장에 여성 근무자는 없는 것 같죠?)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가서 인식을 못했는데 부인실이라고 표기했군요. 음.. 왠지 '화장실'이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탈의실도 아니고 부인실이라니. 삭막하고 살 떨리는 '구역'의 연구기관에 몇 안되는 유머코드이려나요 ㅎㅎ
오늘부터 읽기 시작했어요! “이 판본은 2003년 스탈케르출판사에서 간행한 「스트루가츠키 형제 작품집」 11권 제2쇄를 기준으로 한다.” 책을 낸 러시아 출판사 이름이 ‘스탈케르’네요! 러시아어로 스탈케르는 스토커와 같은 말이니(@밥심 님께서 알려주신 타르콥스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노변의 피크닉>에 나오는 ‘스토커’를 따서 출판사 이름을 지은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왠지 SF장르 전문 출판사일 듯 싶네요 ㅎㅎ 출판사명을 스트루가츠키 형제 소설에서 따올 만큼 이분들이 갖는 작가로서의 위상이 높은갑네요.
시어도어 스터전이 쓴 서문에서 ‘작가연맹 내 sf 작가가 가장 큰 나라가 헝가리라는 것을 모른다’ 라는 문장을 읽고 헝가리 sf 작가가 누가 있나 생각해봐도 떠오르지않고 검색해봐도 잘 안 나옵니다. 상당한 수준의 작가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만큼 우리에게 동구권 문학작품들이 잘 소개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겠죠.
저도 위키피디아에서 헝가리 SF작가 명단을 찾아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네요 😅
전 60쪽까지 읽었는데 일단 흥미진진하네요. 깡통을 비롯한 요상한 이름들이 붙여진 사물(?)들의 정체도 궁금하고 레드릭 슈하트가 리더로서 어떤 활약을 보일지도 기대되고요.
53쪽까지 읽었는데 @밥심 님 말씀대로 너무 재미있어요! 지금까지 sf소설을 왜 잘 안 읽고 살았나 싶습니다. 텅빈 깡통, 꽉찬 깡통, 불타는 솜털, 악마의 배추, 마녀의 젤리 등등 이런 것들은 정체가 뭘까요 ㅎㅎ
“저기, 키릴! 만약 당신한테 충만한 ‘깡통’이 있다면 어떨 거 같아? 응?” “충만한 ‘깡통’?” 그는 되물으며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하기라도 한 양 눈썹을 씰룩인다. “그러니까, 그거. 당신의 그 자기성 트랩. 뭐더라…… 물체 77-B 말이야. 바로 그건데 그 사이에 뭔가 빌어먹을 것이, 푸른 뭔가가 있는 거야.”
노변의 피크닉 26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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