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이 거리에 살던 거의 모두가 역병을 앓았기 때문에 이곳을 역병지구라 부른다.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대부분 노인이었지만, 노인이라고 다 죽은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역병이 아니라 공포였다고 생각한다.
노변의 피크닉 47-4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건 그렇고, 이곳에 폭발이 있긴 했지만 이들이 폭발로 눈이 먼 것 같지는 않다고, 커다란 천둥소리에 먼 거라고들 한다. 듣자마자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큰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그럴 리 없으니 잘 좀 기억해 봐요!, 라고 말한다. 아니, 그들은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천둥이 쳤고, 그로 인해 눈이 먼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 말고는 천둥소리를 들은 이가 없다……
노변의 피크닉 4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기 지푸라기에 휘감겨서 땅에 닿을 듯 걸려 있는 게 그때 그 로프다……
노변의 피크닉 p.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로프가 허공에 떠있는 기괴한 장면이 그려지네요. 뱀이나 회충처럼 뒤틀린 밧줄에 '지푸라기'가 덕지덕지 붙은 채 지상위에 있는... 지푸라기의 모습이 아마도 자석에 달라붙는 쇠가루 같은 재질이 아닐까 상상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영상으로 구현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역시 타르콥스키 영화를 봐야 하나! ㅋㅋ끙)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콥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데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오, 위키를 찾아보니 타르콥스키 <잠입자>의 각본 작업을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맡아서 했네요. (타르콥스키는 엄청 독특하고 까다로울 것 같은데 의외로 협업이 됐나 보군요.) 그래도 역시 소설이랑 영화랑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ㅎㅎ
<솔라리스> 영화를 렘이 싫어한 이유는 결말 때문이라고 하는데 제가 봐도 타르콥스키 감독이 조금 오버한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아예 각본에 참여했다고 하니 별 문제는 없었겠네요. 기대와는 달리 <솔라리스> 영화에서 타르콥스키는 변화무쌍한 바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정거장 내부 세트엔 공을 좀 들인 것 같았지만요. 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에 촛점을 맞춘 듯한 연출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를 잘 모르지만 타르콥스키가 이런 성향이라면 <stalker>에서도 구역의 기기묘묘한 이미지를 표현하기보단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더 치중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측이니 모르죠. 소설 읽고나면 영화를 바로 보고 확인하려 합니다.
@밥심 님의 예측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잘은 몰라도 타르콥스키 스타일이라면 저같은 관객이 재미를 느낄 만한 장면 묘사는 잘 없을 듯하네요. 롱테이크로 찍은 인물의 고뇌와 철학적 메시지에 주력할 듯… (노변의 피크닉은 헐리웃 스타일로 영화를 찍어도 잘 어울리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 왔다. 구역이다! 즉시 살갗에 오한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매번 이 오한을 느끼는데, 이게 구역이 나를 맞이하는 방식인지, 스토커의 신경이 장난치는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노변의 피크닉 p.49~5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바람이 멈춘 듯했으며 불길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엔진만이 잠에 취한 듯 평온한 소리를 낸다. 주위에는 태양 빛이 비추고 더운 공기로 가득하다……
노변의 피크닉 p.5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구역'의 모습은 햇빛이 내리쬐는 평온한 자연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의 상식을 부정하는 현상이 가득한 게 대비되네요. 제목은 피크닉이라고 표현하지만 구역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죠. 햇살 때문에 공기는 후끈하고, 초목이 우거지며, 사람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중간에 나오는 '모기지옥'이라는 단어가 재밌네요. 마치 땅 위의 개미지옥 구멍에 개미가 발을 디뎠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듯, 허공에 있는 어떤 강력한 중력왜곡? 현상 때문에 물체가 사라지는 특이점이 있나 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모기로 단어를 바꿔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어떤 존재인지 특성을 여전히 알 수 있어서 재밌네요.
오래된 쓰레기 더미 위로, 깨진 유리와 천 쪼가리들 위로 어떤 떨림이, 어떤 진동이, 뭐랄까 마치 정오의 철제 지붕위에 드리운 뜨거운 공기처럼 일렁였다. 그건 작은 언덕을 간신히 넘어서서 나아가고, 또 나아가더니 표시대 바로 옆으로 우리 앞을 가로질렀고, 길 위에 잠시 멈춰 0.5초 동안 머물렀다가―아니면 나에게만 그렇게 보인 걸까?―벌판으로, 덤불 너머, 썩은 담장 너머 그곳으로, 오래된 자동차의 묘지로 빨려 들어갔다.
노변의 피크닉 p.5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머리에 잘 안 그려지지만 이 장면에서 비문증이 생각났어요. 가끔 눈과 빛의 각도가 맞으면 눈 앞에 반투명한 뭔가 떠다니는 게 보이죠. 희미하지만 분명한 덩어리와 형태가 느껴지는 덩어리의 움직임.. 구역에 여러 번 다녀온 주인공 같은 베테랑도 알 수 없는 현상이 곳곳에 널려있으니 왜 다들 '구역'에 간다고 하면 제정신이 아닌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구역은 당신이 악인인지 선인인지 아무 관심이 없으니, 너에게 고맙지, 민달팽이. 넌 바보였고 아무도 네 진짜 이름 따윈 기억도 못 하지만, 영리한 자들에게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를 몸소 보여 줬으니 말이야……
노변의 피크닉 p.5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나는 그 타이어가 거슬렸다. 타이어의 그림자도 어딘가 비정상이다. 태양은 우리 등 뒤에서 비추는데 타이어 그림자는 우리 쪽으로 드리운다.
노변의 피크닉 p.6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구역에서는 아는 길로 100번을 탈없이 다녔어도 101번째에 죽을 수 있다.
노변의 피크닉 p.6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1부를 읽었는데 중간부터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네요. ㅋㅎ 그리고 1부에서 독신인 레드릭 슈하트가 2부에선 기혼이 되고 특정 직업이 없다고 차례에 나와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 짐작이 됩니다.
주인공 나이가 각각 1부랑 2부에서 23세, 28세인데 정말 젊네요. 아무리봐도 말이나 행동에서 20대가 아니라 최소 30대 이상의 관록? 이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만큼 구역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뜻일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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