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샤워실 문을 잠그고, 술병을 꺼내 마개를 열고서는 빈대처럼 입을 딱 붙이고 빨아들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무릎도 공허하고, 머릿속도 공허하고, 가슴도 공허하다. 센 술을 물 마시듯 쉴 새 없이 들이켠다. 살아 있다. 구역이 놓아줬다. 망할 구역이 놓아준 거다. 이런 빌어먹을. 제기랄. 살아 있다. 초행자들은 그걸 쥐뿔도 이해 못한다. 아무도, 스토커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더니 눈물이 내 양 볼을 타고 흐른다. 센 술 때문이거나, 나도 모르는 이유 때문이거나. 나는 술병에 술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때까지 빨았다. 나는 젖어 있는데, 술병은 말랐다. 늘 그렇듯 마지막 한 모금이 부족했다. 뭐, 됐다. 그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이제는 다 해결할 수 있다. 살아 있으니.
노변의 피크닉 67-6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은화 님이 내주신 1번 숙제를 보고 책의 해당 부분을 다시 넘겨봤어요. 구역이 주는 엄청난 공포와 압박에서 살아 돌아와서 한순간 긴장이 탁 풀릴 때 뭔가 허무한 느낌이랄까,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극심한 피로를 느꼈을 듯합니다. 키릴과 텐더 같은 초행자들과 같이 갔으니 더 그럴 테고요. 거기다 스토커로 사는 삶의 비애? 이런 고충을 세상에서 나 혼자만 느끼고 있다는 외로움 등의 감정이 마구 섞여있을 것 같아요.
나는 무엇이 나를 여기에 묶어 두는지 당장 말해 주기로 한다. “뭐겠어요! 어린 시절의 달콤한 추억이죠. 시립 공원에서의 첫 키스, 엄마, 아빠, 바로 이 바에서 처음으로 취했던 기억, 친애하는 경찰서에……─이때 나는 주머니에서 코 푼 손수건을 꺼내 눈을 덮는다─아니요. 절대 안 떠납니다.”
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레드는 고아고, 거칠게 커온 듯하고, 어린 시절 가족들과 달콤했던 추억 따윈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더구나 “친애하는 경찰서”에 들락거렸던 얘기를 흘리면서 코 푼 손수건으로 우는 시늉까지… 잔뜩 비꼬고 있네요.
“앨로이시어스 맥노트 씨! 당신 말이 다 맞습니다. 우리 작은 도시는 촌구멍이에요. 이제껏 촌구멍이었고, 지금도 촌구멍이죠. 다만 지금─나는 말을 잇는다─이 도시는 미래로 뚫린 구멍입니다. 우리가 이 구멍에서 당신네 비열한 세계로 끌어 올리는 것들이 모든 걸 변화시킬 거예요. 삶은 달라질 거고, 바로잡힐 거고,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게 주어질 겁니다. 그게 당신이 말한 구멍이에요. 이 구멍을 통해 지식이 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갖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줄 거고, 다른 행성들에도 가고, 그 밖에도 또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여기 우리의 촌구멍……” 이 대목에서 나는 급히 입을 다물었는데, 어니스트가 상당히 놀란 기색으로 날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어색해졌기 때문이다. 난 남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말하는 걸 정말로 안 좋아한다. 그러니까, 마음에 와닿은 말도 내 입으로 그대로 다시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말들은 내 입에서 나가면서 어딘가 비틀린다. 키릴이 말을 할 때면, 넋 놓고 언제까지고 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키릴과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왜인지 잘 안된다. 어쩌면, 키릴이 비밀리에 어니스트에게 노획물을 줘 본 일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뭐, 상관없지만……
노변의 피크닉 84-8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레드는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인 키릴을 동경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키릴의 말을 믿고 싶어하고, 또 어느 정도는 공감도 하겠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전혀 믿지 않는 것 아닐까요. 키릴은 좋은 사람이지만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레드는 하몬트를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론 떠날 수 없는 것 같아요. 애증의 고향 같은 거죠. 하몬트를 딱히 사랑할 이유는 없지만 이곳엔 연인 구타도 있고 친구 키릴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레드가 구역의 스토커라는 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라, 관 속처럼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고,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래서 구역을 증오하면서도 구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제가 당신네 유럽을 모를 것 같습니까? 당신네 따분함을 못 봤을 거 같아요? 낮에는 내내 일하고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보고 밤에는 역겨운 매춘부의 침대로 파고들어 사생아들을 만들어 내고. 당신네 파업, 시위, 허울만 남은 정치…… 나는 관 속에 들어가 있는 당신네 유럽을 봤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요.” “그런데 왜 하필 유럽 얘길 하는 거죠?” “아, 어디든 똑같지 않습니까. 유럽에 추위만 더하면 남극인 거고.” 그런데 놀라운 건, 내가 그에게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 나에겐 우리의 구역이, 지겹고 역겨운 데다 살인까지 자행하는 구역이 그들의 유럽이나 아프리카보다 백배는 더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딱 저치 같은 저능아들 무리에 섞여 퇴근하는 나, 그들의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낀 나, 이 모든 것에 진절머리를 느껴 아무 의욕도 없는 나의 모습이 그려졌을 뿐이다.
노변의 피크닉 86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레드는 다른 인간들을 다 혐오하지만, 예외적으로 키릴과 구타에게만은 진실하다고 느꼈어요. 키릴이 레드를 연구소에 꽂아주고, 스토커인 그를 어느 정도는 사회인으로 살게끔 도와준 듯하고, 레드는 그런 키릴의 순수함과 학자적 열정을 좋아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키릴은 레드와는 아주 다른 인간이라, 레드 입장에선 살짝 동경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요. 레드가 거칠고 부정적인 어둠이라면, 키릴은 부드럽고 긍정적인 빛 같다고나 할까요. 레드가 ‘충만한 깡통’을 가지러 구역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한 걸 보면 키릴을 정말 좋아한 모양인데(물론 특별수당도 걸려 있지만), 그의 죽음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랑하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결국 그를 죽게 만든 꼴이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니 레드가 샤워실에서 눈물을 흘릴 때, 키릴에게 드리운 은빛 거미줄의 잔상 때문에 본인도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던 건 아닐까도 싶네요.
사실 전 1부를 읽을 때 거미줄이 진짜로 차고에 있던 사물이 아니라, 레드릭 본인의 어떤 관념이나 자기암시에 의한 환상이 아닐까 상상도 해봤어요. 정말로 그게 '구역'에서 일어나는 특이현상인지, 아니면 레드릭의 과민한 신경증의 발현이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게 재밌네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차고 안에 은빛 거미줄이 있다가 사라지고, 키릴은 그걸 보지도 못했고, 등을 계속 확인했지만 없었던 걸 생각하면…. 더구나 구역에선 인간의 머리 속에 무슨 작용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충만한 깡통'이란 단어가 오늘의 키워드로 다가왔어요. '하얀 콜라' 이런 것처럼요.
1. 복합적인 감정 때문일 듯 한데 안도감이 제일 클 것 같아요.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곳에 갔다가 생존해서 귀환했을 때 그런 마음이 크게 들지 않을까요. 2. 최근에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읽어서인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이민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에 더 신경이 쓰이네요. 고향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3. 거칠게 살아가는 자신과는 다른, 어쩌면 자신이 누리고 싶었던 삶의 모델이라고 키릴을 생각했던게 아닐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1) 67p에서 레드릭은 '구역이 놓아줬다. 망할 구역이 놓아준 거다. 이런 빌어먹을. 제기랄. 살아 있다.' 라고 말합니다. 살아서 멀쩡히 돌아왔는데도 이를 전혀 기뻐하지 않죠. 자신의 경험이나 능력을 통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며, 단지 '구역'이 선심을 썼기에 지금까지 스토커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어떤 자조감이나 회의감이 밑바닥에서 느껴집니다. 현재는 2부 중간을 읽고 있는데, 레드의 보다 구체적인 배경이나 과거가 나와야 알겠지만 그는 다른 직업을 가질 여유가 없어 보이거든요. 그의 교육 수준이나 가정 배경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레드 본인의 학력이나 돈 씀씀이를 볼 때 안정적인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당장 손에 쥘 현금이 필요한 삶을 살고 있죠. 이는 악순환인데, 레드릭이 돈이 궁하기 때문에 엄청난 부담감과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자극에 노출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보다 자극적인 해소 수단에 빠집니다. 술을 입에 달고 살고, 카드놀이나 슬롯 머신으로 기껏 번 돈을 날리고 있죠. 돈을 원하지만, 정작 그 돈이 들어왔을 때 순간의 욕구를 참아 만족을 이연시킬 정도의 심리적/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화가 많이 나거나, 짜증과 피로가 누적되면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어려우니까요. 레드릭은 결국 구렁텅이에 빠져있다고 생각됩니다. 궁핍한 삶 → 급전을 마련할 수 있는 위험한 직업 → 불확실한 보상과 높은 스트레스 → 당장의 불안과 욕망을 해소할 욕구의 폭발 → 배설하듯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소비 → 이하 반복... 인 셈이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부터 끊어야 할지 모르겠는 악순환이 레드릭은 지긋지긋할 겁니다. 살아야 하기에 버티기만 하는 삶 속에서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죠. 이후의 2번 질문과도 연관되는데, 전 레드릭이 앨로이시어스에게 답한 빈정 섞인 응답에서도 그렇고 내심 현재의 삶이 끝장났으면 하는 욕망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읽고 있는데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가져볼 수 없는 그의 인생은 오히려 '구역'이 그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역이 놓아줬다'라고 말한게 아닐까 싶네요. 구역을 통해서만 먹고 살 수 있으나, 그 구역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하지 못하며 지옥 같은 두려움을 안고 가야 하는 인생.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영역마저도 '구역'에게 뺏긴 슈하트는 '이번에도 죽지 못했다'는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린 것 같습니다.
2) 전 그래서 레드릭이 기회만 된다면 하몬트를 떠나고 싶어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구역'에 경제적으로/심리적으로 종속되어 있기에 하몬트를 떠날 수 없죠.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 구타가 있기에 그는 책임도 져야 하는 입장이고요. 자신이 무언가를 정말 너무나 싫어하는데도 그것을 뿌리칠 수 없을 때 사람은 자괴감을 느끼죠. 남는 수단은 자신의 처지를 낮추고 자조함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입니다. 슈하트가 거친 삶을 살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듯 살아가는 이유도 이런 심리적 기반 때문인 것 같고요. 스스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으로서 언제든 허무하게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인생을 산달까요. 그런 복잡한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민국의 사무직 관리가 와서는 속 편하게 '왜 나이도 젊은 사람이 아직도 이런 곳에 남아있냐'라고 말했기에 레드는 더 빈정댄 것 같습니다. 자신 같은 사람들의 현실을 모르는 정부와 외부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부러 하몬트에 남는 이유와 명분을 말하지만, 그건 떠나고 싶어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조롱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고요.
3) 지금까지 나온 인물들 중 키릴은 몇 안되게 레드를 '대가 없이' 좋아하고 따르던 사람입니다. 순찰대와 UN장교들은 그를 권위적으로 대하며 항상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죠. 보르시치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업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온통 '구역'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몬트 외부 세계의 사람들이나 과학자들은 그가 보기엔 몸 편하게 앉아 자신이 지옥에서 퍼내온 물건들의 이익을 가져가는 착취자나 위선자들이고요. 하지만 키릴은 레드의 눈으로 보기엔 바보스러울 정도로 '구역'이 주는 선물을 통해 미래가 바뀔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레드에게 말해왔고요. 주변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 보이는 슈하트에게 키릴은 몇 안되는 정신적 탈출구였을 겁니다. 실제로 키릴이 말한 미래가 가능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그런 분위기와 이상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27p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됐다. 나의 키릴이 완치됐다. 귀가 쫑긋 서고 꼬리도 빳빳해졌다." 마치 개처럼 키릴을 묘사했죠. 순수한 충성심과 인간을 따르는 마음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개를 사랑하죠. 말 그대로 레드에게 키릴은 개와 같은 동반자라는 심리를 한 문장으로 담아냈네요.
은화 님의 글을 읽기 전엔 레드릭에 대해 '알콜중독의 피폐한 젊은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읽은 후에는 결국 인간이란 지켜야 할 존재(사랑하거나 받을)가 없이 괴로운 상황에 노출될 때, 특히 젊을 때 레드릭 같은 모습이 되기 쉬워질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갈수록 사는 게 힘들고 내가 왜 애를 낳아서 이렇게 지구에 쓰레기를 버리고, 낭비를 하고 살아야 하나란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란 끈 때문에 저를 파괴하며 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삶의 부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역으로 저를 지켜준다는 쓸데없는 이야기였습니다. ^^;; (아직 '구타'에 대한 부분을 안 읽어서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1)전 구역에서 키릴과 함께 있을 때 제대로 조언해 주지 못한 감정과 그에 대한 직감적인 무언가 때문이라고 느꼈습니다. 2)구역에 대한 두러움과 호기심 같은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스토커로서 일할 수 있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동료 이상으로 자신을 인정해 준 진정한 동료여서 그런 것 아닐까요? 1부 내용은 무언가 짐작하기에 궁금함 투성이라 질문만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안개같이 가려진 무언가를 걷어내기 위해 빠르게 읽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는 책입니다!
저 사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고 75p까지 읽다가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아하! 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요. 아마 더 읽어 봐야 발제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영영 못 하거나...ㅎㅎ)
전반적으로 1부에서 느껴지는 주된 분위기는 '불안함'이었습니다. 레드릭의 심리와 행동이 안정되어 있지 않죠. 그의 경제상황이나 직업의 기반도 불안정합니다. 그리고 '구역'이라는 환경 자체의 예측불가능한 속성이 더해져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불안함이 전달되죠. 불안은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거나,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 발생하죠. 이런 통제불능에서 오는 '무기력감과 불안'은 작품에서 계속 액자처럼 반복하여 되풀이 되는데요. 가령 '구역'의 경우, 구역은 인간이 원한 적이 없으며 '방문'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구와 인간은 그저 방문을 받아들여야 했을 뿐이죠. 비록 시간이 지나 UN과 국제기구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의 기본 상식에서 벗어나 있고요. 슈하트 같은 스토커들은 불안정한 구역에서, 언제 뭐가 나올지 모르는 환경에 노출된 채,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노획물을 위해 스스로를 밀어 넣습니다. 더 좁게 들어가면 당장 다음 둔덕에 무슨 보이지 않는 이상현상이 있을지 알 수 없죠.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자연환경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위험합니다. 마치 '무해한' 버섯처럼 의심 없이 접근했다가 치명적인 결과를 마주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슈하트는 구역에만 들어서면 오한을 느끼고, 밖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됩니다. 아니, 다른 인간이 되어야만 하죠. '구역'이라는 낯선 곳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슈하트는 구역에 들어가면 살아도 살아있는 몸이 아니며, 자신의 모든 감각과 정신을 구역에게 바치듯이 헌납했다가 구역이 이별을 허락해야만 떠나는 인질의 처지가 되어 버렸죠. 자신의 인격도, 정신도, 심리도 모두 구역에게 바친 레드릭은 인생에 의지할 만한 것이 얼마 없고 그로 인해 근원적인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 불안을 잊고자 자극과 중독에 매달리고요.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이 휑하니 비어있고 구멍이 뚫려 있으며 그 빈자리는 '구역'이 들어차 있습니다. 레드릭이 구역에서 노획물을 가져오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구역에게 스스로를 빼앗기고 있는 중일 겁니다. 레드릭만이 아니라, 모든 스토커와 구역으로 먹고 사는 인간들 전부 처지가 다르지 않죠. 자신들이 구역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구역이 오히려 그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언제나 개자식이었기 때문이지, 대머리수리." 레드릭이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개자식이라. 맞는 말이야. 개자식이 아니면 안 되지. 하지만 다들 개자식 아니었나. 파라오도, 민달팽이도. 그런데 나만 남았네. 왜인지 아나?"
노변의 피크닉 p.11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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