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어디서나 '제일 나쁜 사람들'은 '너도 이제 공범이야'라고 말하거나 너나 나나 똑같다고 피장파장을 내세우는 사람들 같네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척 말하지만, 사실은 상대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은 비열함이 담겨 있으니까요.
그는 바로 그녀에게, 지나 버브리지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고, 그 모든 상황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너클을 쥐고서 차로 돌아왔다는 것과 버브리지가 어떻게 애원했는지까지도. 그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들, 그녀와 아티를 들먹이며 애원했다고, 그리고 금빛 구체를 약속했다는 것도 말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변의 피크닉 16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2부가 시작되면 레드가 다친 버브리지에게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죠. 이때까지만 해도 레드는 다친 안경잡이를 구역에 놓고 혼자 도망쳤던 “개자식” 대머리수리 버브리지랑 똑같은 인간이 되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버브리지가 “금빛 구체” 이야기를 하죠. 구체에게 아이들의 건강을 빌어서 아이들이 다 괜찮다고요. 탈출하던 중에 차에서 내린 레드는 너클을 쥐고 버브리지에게 다가가지만 버브리지가 구체를 찾을 수 있는 지도와 다른 모든 정보를 준다고 하니 너클을 내려놓아요. 이는 레드가 버브리지를 살려준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금빛 구체에 있다는 거겠지요. 처음에는 레드가 금빛 구체가 탐이 나서 그런가? 싶었는데 위에 지나를 만나는 장면을 읽으니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레드는 버브리지의 말을 듣고, 자기도 금빛 구체를 찾아서 자기 딸 몽키가 여느 아이들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버브리지가 구체에게 소원을 빈 덕분에(?) 지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고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레드도 구체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몽키를 평범한 아이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거겠죠. 몽키는 스토커인 아버지 때문에 몸에 긴 털이 난 외양을 가지게 되어,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살고 있죠. 몽키의 친구들은 지금은 몽키랑 잘 놀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다른 어른들처럼 몽키를 차별하게 될 테고요. 레드는 딸을 향한 사랑만큼이나 죄책감도 커서 딸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니 금빛 구체를 찾으러 갈 것이고, 그러려면 버브리지가 가진 정보가 필요하겠지요.
레드를 둘러싼 사건에만 집중하느라 금빛 구체와 몽키를 잊고 있었네요! 이렇게 보니 지나를 둔 버브리지와, 몽키를 둔 레드 둘 다 스토커만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정체성도 공유하고 있고요. 버브리지의 가족은 외형적으로는 멀쩡할지 몰라도(건강, 재산, 노후) 가족이라는 의미의 본질은 무너져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젊은 날에 대한 벌이겠지요.
레드가 지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 않은 이유, 이건 책을 읽으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데 은화님의 질문 덕분에 요리조리 생각해보게 됐어요. 우선, 레드가 지나 입장을 생각해서 말을 안 한 거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버브리지가 구역에서 목숨을 구걸하고자 지나와 아티를 들먹이며 애원했다는 걸 지나가 알면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요. (제가 지나라면 그럴 것 같아요.) 그리고 지나가 가진 건강미가 실은 본인이 그렇게 싫어하는 아버지가 구역의 “금빛 구체”한테 부탁해서(?) 받은 결과물이라는 걸 알면 또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요.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요.) 게다가 이제는 레드 본인도 그 구체를 찾아가 몽키를 위한 일을 도모하겠다? 레드는 이런 속마음을 지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제 레드 입장에 서서 더 생각해보면, 레드는 버브리지가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같아요. 자기가 몽키를 사랑하듯이 버브리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래서 지나가 아버지의 다리 절단 소식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모습에,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까요. (말하면 뭐하나, 하는 심정?) 아버지를 구해왔다고 화를 내는 지나의 뺨을 때리는 장면도 그렇고요. 자기도 같은 아버지라고 이 순간만은 버브리지에게 이입이 되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더 할 얘기는 없었다. 대머리수리 버브리지가 구역에서 참 착한 애들의 안녕을 자기 소원으로 빌었군. 아버지를 아끼고 존경하는 애들을 위해.”
지나가 버브리지를 구해온 레드에게 욕을 하고 따지는 걸 보면, 아버지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는 거겠지요. 그 이유는 일단 이게 제일 클 것 같아요. 지나가 어렸을 때 버브리지는 “자기 아이들한테 전혀 관심이 없었고 벌써부터 개자식의 면모를 약간 보이고 있었는데, 술을 퍼마시고는 악랄한 즐거움을 느끼며 아내를 때리곤 했다는 점에서 그랬다. 시끄럽게, 모두 들으란 듯이…… 그렇게 죽기 전까지 때렸다.” 그리고 지나가 이미 “금빛 구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버브리지가 구체에 관한 약속으로 레드를 꼬신 일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는데요. 추리를 해보면 이미 예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버브리지의 약속을 믿고 금빛 구체를 찾으러 갔던 사람이 또 있었던 거라면? 그런데 그가 버브리지에게 속았거나, 끔찍한 일을 당했거나, 뭐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지나는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바로 그렇게 그는 너희 바보들을 다 속여 먹는다고…… 너희 뼈를, 뇌가 없는 너희 대가리를 밟고 지나가지…… 잠깐, 잠깐만…… 목발을 짚고서도 너희의 해골을 짓밟을걸. 그러고 나서는 너희에게 형제애와 자비도 베풀 거라고!” 그녀는 이미 악을 쓰고 있었다. “너에게 금빛 구체를 약속했겠지, 그렇지? 지도와 함정도 말했고? 멍청한 자식! 얼간이! 너의 그 주근깨투성이 추한 얼굴을 보니 뭘 약속했는지 알겠어…… 그래, 너한테 지도도 주겠지. 신이시여, 바보 같은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의 어리석은 영혼에 안식을 주소서……”
노변의 피크닉 172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1) 170~171p에서 레드가 땅다람쥐에게 잔을 받은 뒤 지나에게 '원해?'라고 묻는 장면이 있는데요. 방금 전에 지나가 그에게 도발하듯 물어본 질문을 받아치는 구도가 의미심장하다고 느꼈습니다. 레드가 말한 '원해?'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레드릭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의 본성은 선량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만 그 외의 인물들에게는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반응을 보이죠. 필요하면 폭력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생계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엮이는 사람들에게 더더욱 그렇고요. 이 장면에서 레드는 자신을 대접하는 땅다람쥐를 진중하게 대하는 느낌을 줍니다. 묘사를 보면 땅다람쥐는 몸이 뒤틀려 있는 듯 한데, 보기에 매우 거북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149p에서 레드는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누군가 마련해준 자리를 편하게 힘들이지 않고 얻기 보다는 자신만의 노력으로 자격을 얻겠다고 말하죠. 남에게 어떤 식으로든 빚지기 싫어하며 일종의 신조나 긍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생관이 느껴집니다. 레드가 싫어하고 경계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본인들은 형편 좋게 앉아서 다른 사람의 고생한 결과물을 대신 누리거나, 빼앗는 입장이란 점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핵심 가치관이나 신념이 없으며 단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인을 대하죠. 어니스트는 스토커들의 장물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아가는 듯 한데 어디까지나 레드와 사업적인 관계일 뿐, 진행된 사건들을 보면 좋은 사이라고 할 수가 없죠. 호텔의 매수자와 방문자들은 돈으로 스토커들의 목숨값을 쉽게 지불하는 속물적인 유형들로 묘사되고요. 쿼터블래드 대위는 군인의 입장이지만 그에게서는 이중적인 권위자의 태도가 느껴집니다. 지나는 아버지의 돈으로 호의호식 하고 있고요. 이 인물들은 '구역' 때문에 살고 있지만 정작 구역의 실체를 마주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구역'에 어떤 무서운 것들이 숨어 있는지, 구역에 다녀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스토커에게 의존하고 미워하고 거래합니다. 레드가 우호적으로 반응한 사람들, 가족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은 그처럼 '구역'에 직접 갔다 오거나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는 처지입니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결과가 잘되든 잘못되든 모두 감내하죠. 땅다람쥐 딕슨은 시중을 드는 자신의 일을 위해 망가진 몸을 개의치 않고 열성을 다해 레드를 대접합니다. 레드가 지나의 고급 술은 무시하고 대신 딕슨의 샴페인을 받아 축배를 하며 들이마시는 것은 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저는 레드가 그녀에게 물은 '원해?'의 의미를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버브리지가 쌓아 올린 돈 위에서, 남이 맞춰준 조건 안에서 고생도 모르고 자란 너와 네 술 한 잔 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노력한 딕슨의 술 한 잔이 내게는 더 가치 있고 자격 있는 삶이다' 비록 짧은 상황 묘사지만 그 안에 레드릭의 가치관을 담아낸 구도가 인상 깊었어요. 비록 스토커라는 부정한 인생을 살아갈지언정 자신의 삶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습니다.
2) 인간으로서는 버브리지를 혐오하지만, 같은 스토커이기에 그리고 딸을 둔 아버지의 입장을 알기에 살려서 데려왔다고 생각해요. 버브리지가 그에게 노획물과 지도, 정보를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레드의 평소 행동과 성향을 생각해 보면,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버브리지를 제거할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너클을 끼고 돌아갔다는 묘사에서 왠지 그런 의도가 엿보였거든요. 자신에게 따지는 버브리지에게 내버려두지 않고 데려왔다고 반박하는 말이 레드의 도덕관을 잘 설명하는 부분 같습니다. 죽여버릴 수도,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지만 죽음으로 남을 단죄하기 보다는 살아서 고통을 받게 하더라도 삶을 선택한 점. 인류애나 의무감 같은 적극적인 선의가 아니라, 양심에 따른 최소한의 선을 지키려는 인생.
3) 현실적으로는 레드의 성격상 누군가의 밑에서 고용되어 일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몬트의 전통적인 모습은 쇠락하고 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구역' 때문에 몰려들고 있기 때문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지 않기도 하고요. 슈하트의 과거사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그도 지금의 스토커가 되기 위해 성장기 시절부터 이쪽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른 거물들처럼 사업을 하기에는 자금이 없고, 연구소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기에는 그의 과거와 평판이 걸림돌이 되며 당장의 주머니 사정이 계속 스토커 생활에 눈을 돌리게 만들죠. 하지만 이런 외적인 요소는 레드에게는 부차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가치관을 볼 때 레드릭은 구역에 빌붙어 사는 남들처럼 될 바에는, 옳지 않은 생업이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1번 물음의 답과 같은 연장선이죠. 남이 주는 연봉에 맞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위계와 사회 속에서, 돈을 세며 묶여 살기 보다는 위험하더라도 자신이 각오한 만큼 보상 받는 '구역'이 레드에겐 더 가식 없고 솔직한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구역으로 인해 곰팡이처럼 퍼져나가는 메트로폴과 그 뒷세계가 음험하게 묘사되죠. 어쩌면 '구역'을 드나드는 레드의 일은, 그가 불신하고 더럽게 여기는 도시와 세상으로부터의 피크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구멍에서 당신네 비열한 세계로 끌어 올리는 것들이 모든 걸 변화시킬 거예요. 삶은 달라질 거고, 바로잡힐 거고, 모두에게 필요한 모든 게 주어질 겁니다. 그게 당신이 말한 구멍이에요. 이 구멍을 통해 지식이 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갖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줄 거고, 다른 행성들에도 가고, 그 밖에도 도 원하는 곳은 어이든 갈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여기 우리의 촌구멍......
노변의 피크닉 84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키릴이 죽는 대목은 흡사 '왕좌의 게임'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뜬금포로 죽는 장면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키릴, 사랑하는 나의 친구, 당신이 실수한 거야. 미안, 그런데 당신이 아니라 구탈린이 옮았어.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구역에 선의라곤 없어.
노변의 피크닉 104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149쪽 다 맞는 말이야. 사람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지…. 154쪽 이곳에서는 비싼 담배, 파리의 향수, 지폐가 가득 채워진 번쩍거리는 천연 가죽 지갑 냄새, 하룻밤에 500을 부르는 비싼 여인들 냄새, 묵직한 금으로 된 담뱃값 냄새가 났다. 전부 싸구려 냄새다. 184쪽 저는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이제 자수하러 갑니다. 2년 6개월, 혹인 3년형을 선고받을 거예요. 아내가 생활비 없이 남게 됐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그녀를 돌봐 주십시오. 부족함 없게요. 알아들으셨습니까? 알아들으셨느냐고 물었습니다만?
노변의 피크닉 2부,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전 '구역'에서 가지고 오는 물건을 왜 그렇게 돈을 주고 사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고요. 그냥 지구의 과학법칙에 어긋나는 작용? 작동을 해서?인 걸까요? 보석 사듯이 신기해서?
그러게요.. 구역의 물체들은 현재로서는 인간에게 위험하거나, 원리도 모르는 물건이 대부분인데 말이죠. 그래도 골동품이나 희귀한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으니 부호나 권력자들은 '구역'의 물건이라는 이유 그 자체로 얻고 싶어하나 봐요. 원래는 매매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되는 물체들이니까요. 다만 인간에게 해로운 것들도 있는 걸 생각해보면.. 안좋은 목적으로 본인들이 개발하고 활용하려는 세력들이 탐낼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시장에 나오는 방법도, 유통되는 과정도 모두 불법적인데 이런 데 손을 뻗치는 세력은 일반적인 목적이 아닐테니까요.
스토커들로부터 구역의 물건을 사들여서, 그걸 군사적 목적이나 테러 목적으로 원하는 세력들에게 팔면 톡톡히 돈을 벌 것 같아요.
근데 사용할 줄은 아는 건가요? 제가 읽은 부분까지는 다들 그 물건들을 가지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ㅎㅎ
글쎄요 ㅎㅎ 지금 암것도 모르더라도 일단 적보다 먼저 확보하고 있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바로 그’라는 구역에서 가져온 물건은 자동차 동력원으로 잘 사용하는 내용이 3부에 나오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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