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노변의 피크닉 p.22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외계인학이란 공상과학과 형식적 논리를 부자연스레 섞어 놓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 그 연구법의 근본에 있으니."
노변의 피크닉 p.22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아니면 이런 가설도 있습니다. 방문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사실상 현재 우리는 접촉 상태지만, 우리가 그걸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방문자들은 구역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소상히 연구하면서 '미래에 닥칠 잔혹한 기적들'을 준비중이다."
노변의 피크닉 p.23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주석에도 쓰여 있지만 <솔라리스>의 표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가우면서도 신기하네요. 책장에 있던 <솔라리스>를 꺼내 마지막 장을 저도 다시 펼쳐봤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읽은 것도 아닌데 마지막 장을 다시 읽는데 '이런 느낌이었나?' 싶은 신선함이 또 몰려오네요. 당시에는 이야기의 흐름에 압도되어 마지막 장 문장을 그냥 물 흐르듯이 읽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새로워요.
책을 반납해서 당장 확인할 수 없어 아쉽네요.
도서관에 갔다가 <솔라리스> 마지막 문단을 다시 읽고 왔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렘에게 보내는 헌사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나는 지금껏 수백 명 목숨을 집어삼키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인류로 하여금 미약한 소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헛수고를 거듭하게 만들고, 무심결에 나를 티끌보다 가볍게 들어올리는 이 액체 상태의 거인이 나와 그녀, 두 사람의 비극에 마음을 움직이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의 활동은 분명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에 봉인되어 있는,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는 실낱같은 기회마저 영원히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가구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녀의 숨결을 여전히 기억하는 공기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야만 할까? 무엇을 위하여? 그녀가 돌아온다는 희망으로? 내게 희망 따위는 이제 없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자취다. 내가 여전히 기대하는 완결과 환멸과 고통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오! 저도 그 주석 부분 읽고 <솔라리스> 마지막 문장 읽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222쪽 모든 불행은 한 해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데 있다, 라고 누넌은 생각했다. 한 해 한 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아채지 못 한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고, 모든 게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 눈으로 여러 번 봐 왔는데, 그런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은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변화를 찾는다. 223쪽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233쪽 “잠깐만 좀 들어보십시오. ‘그대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왜 위대한가?‘” 밸런타인이 인용구를 읊었다. “’두 번째 자연을 창조해서? 우주의 에너지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동력으로 이용해서? 아주 짧은 기간에 지구란 행성을 장악하고 천체로 통하는 창을 내서? 아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전했고 앞으로도 보전할 생각이기에 위대하다’” 251쪽 인류의 가장 영웅적인 행동은….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 낼 생각이라는 거다… 256쪽 우리는 왜 이토록 젠장맞게 아등바등하나? 돈을 벌려고? 하지만 아등바등 살기 바쁜데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노변의 피크닉 3부,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3부를 읽고 4부로 넘어갔는데 구역에서 처절하게 벌어지는 주인공의 생사고투에 대한 묘사가 대단하네요.
3부를 읽다 보니 누넌이 아마도 겉으로만 장비 중개상일 뿐 사실은 연구소나 정부에서 심은 끄나풀 같네요. 레드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좀 씁쓸해집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인간,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 알고자 하는 열망을 쉬이 극복한다는 데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인간에겐 그러한 열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이해하려는 열망은 있지만, 이해하는 데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가설은 완벽하게 아무것도 몰라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능성을 줍니다…… 인간에게 극도로 단순화한 세계 시스템을 제시하고 그 단순화한 모델을 토대로 어떤 사건이든 해석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 없지. 외운 형식 몇 개에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실용적인 사고와 상식이라 불리는 것을 더하면 될 뿐."
노변의 피크닉 p.22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내가 그것에 관해 읽었던 글은 모두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접촉할 수 있다면 그건 그들이 이성적이란 의미다. 혹은 뒤집어서, 그들이 이성적이라면 우리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심리를 지닐 영광을 누리는 외계 생명체면 이성적이라는 겁니다. 뭐 그런 거지."
노변의 피크닉 p.23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니까, 뭐죠. 그들은 우리를 알아채지도 못했다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잖아요……"
노변의 피크닉 p.23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실험실의 원숭이는 빨간 버튼을 누르면 바나나를 받고 하얀 버튼을 누르면 오렌지를 받으면서도, 버튼을 누르지 않고서는 어떻게 해야 바나나와 오렌지를 얻어 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버튼과 바나나와 오렌지가 어떤 관계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지요."
노변의 피크닉 p.23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우리가 사용처를 찾은 물체들이 있습니다. 방문자들의 사용하는 방식으로는 아마 절대 아닐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그걸 사용하고 있지요. 내가 확신하건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현미경으로 못을 박고 있는 꼴일 겁니다."
노변의 피크닉 p.23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지금은 기술력이 우리 발목을 잡고 있지만, 50년 후에는 그런 왕의 인장들을 만드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그걸로 호두를 마음껏 부술 수 있게 되겠지."
노변의 피크닉 p.24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리처드,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구역을 20년 동안 들쑤시고 다녔지만, 구역이 품고 있는 것의 1,000분의 1도 알지 못합니다."
노변의 피크닉 p.24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개인적으로 과학소설을 읽을 때면 이런 부분을 좋아합니다. 238p부터 248p에 걸쳐서 밸런타인 교수의 입을 통해 우리는 '구역'의 속성 또는 추측의 아주 일부를 접하죠. 계속 앞에서 나오는 불가사의한 현상과 용도를 모를 물건들은 정체가 무엇인지 장막 뒤에 가려져 있다가 장막의 틈새로 실루엣을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독자는 글을 통해서 구역에 대해 누넌이나 밸런타인 이상으로 알게 되는 게 없습니다. 교수가 알려주는 정보도 인간의 기술력으로 알게 된 단편적 지식에 불과하며, 그 지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장담하지 못하죠. 이 세계관이 무엇인지, 그 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작중 인물들의 설명을 빌어 독자에게 최소한의 '이해의 실마리'는 던져주되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런 설명을 전 좋아해요. 아무것도 모를 때면 차라리 속 편하지만 어중간하게 알면 감질나서 더 궁금하게 만들죠. 그렇기에 더 모든 것들이 미궁에 빠져들고요. 작품의 미스테리함과 불가사의함, 기묘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이런 전개를 얼마나 잘 밀고 당기며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가 작가들의 역량이겠죠. 그야말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기분입니다.
책을 반납해야해서 조금 빨리 완독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주말엔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볼 예정입니다.
저도 지금 3장 읽고 있는데, 3장에서 중요한 내용이 다 나오네요! 가슴이 먹먹해지신다니, 마지막이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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