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해 한 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고, 모든 게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 눈으로 여러 번 봐 왔는데, 그런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변화를 찾는다. ”
『노변의 피크닉』 222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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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ori
크흐…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인류 중심적 사고와 시각에 대한 깊은 반성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우린 그저 지나다 들른 휴게소였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퍼스트 콘택트를 다룬 이야기임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 가장 놀라웠던 것 같습니다. ✨
렘과 다른 매력으로 이 책도 너무 좋았습니다.
은화
저는 오늘이면 책을 다 읽겠네요. 현재 4부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밥심 님의 말씀대로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중의 온갖 우여곡절이 정말 처절하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오네요. 레드가 겪어야 했던 인생 전체의 축약처럼 다가와 그의 울분이 더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은화
3부는 딕 누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는 '구역'의 연구소 장비 공급자 겸 중개상이지만 그 이상의 다른 임무도 부여받은 듯한 묘사들이 곳곳에 있네요. 레드릭 못지 않게 누넌 또한 입체적인 인물로 다가왔습니다.
1) 레드의 이야기로 계속 진행되다가 왜 3부에서 누넌의 시점으로 전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2) 3부까지의 묘사와 그의 배경을 보고 누넌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나요?
3) 누넌은 레드와 술 파티를 벌이기 직전 기기괴괴한 이 집안의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면서 레드의 가족을 포함한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길 바란다고 독백합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누넌은 레드와 절친한 관계 같나요? 그의 마지막 독백은 진심이라고 보시나요?
은화
1,2) 3부에서 레드가 아닌 누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는 같은 '구역'을 두고 각자 생각과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대비시켜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로 읽혔는데요. 구역 안에서 연구자로 활동하던 키릴과, 스토커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레드와 달리 누넌은 구역에 직접 다녀온 적은 없죠. 누넌은 구역을 통해 먹고 살고 부를 쌓지만, 그것의 실체에 대해 더 이상 접근하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저 연구소가 있고, 그 연구소에 장비를 납품하면 될 뿐이죠. 부정함과 악에 대해 멀리 거리감을 두는 태도라고 해야 할까요.
구역의 본성을 파헤쳐야 하는 탐구자(키릴)나, 구역과 사실상 한 몸이 되어 거기에 붙어 살아가야 하는 스토커와 달리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는 위치니까요.
이런 태도는 250~251쪽에 걸쳐 말한 심연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엿보입니다.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므로 그저 적당히 두려워하면 되지만, 밸런타인 교수 같은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지식의 대가로 더 많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한다고 말하죠. 어떻게 보면 구역과 이 모든 악惡의 고민을 지식인들에게 떠넘기는 태도로도 읽힙니다.
누넌은 구역과 방문에 대해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데요. 방문자들이 지구에 온 것은 그저 별다른 의도가 없는 소풍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교수의 해석을 탐탁지 않아 합니다. 인간 중심의 해석을 배제하려고 해도, 하몬트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에 악의가 없다고 넘기기에는 혐오스럽고 해로운 것들도 있기 때문이죠. 왜 방문자들이 악의가 없었다면 '마녀의 젤리' 같은 끔찍한 물건이 생겨야 했으며, 레드와 구타 사이의 딸이 왜 그런 운명을 겪어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누넌의 잘못은 아니라고 봐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의 배경과 위치 속에서 상황을 해석하잖아요.
따라서 제게 누넌은 대부분의 우리들 다수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세상의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과 의견이 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존재들. 일상과 업무에 몰두해 사느라 세계에 대한 판단을 다른 이들에게 맡긴 존재들. 진실보다는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쉬운 해석을 원하는 사람들. 세상의 어두움과 추함을 알지만 굳이 심연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은 평범한 우리들이죠.
작품 내적으로도 이런 누넌의 거리두기는 레드가 처했던 곤궁을 부각합니다. 레드가 감옥에 가있던 동안, 또 출소하고 나서 그와 구타 그리고 몽키가 어떤 일들을 겪어야 했는지 우리는 상상밖에 할 수 없죠. 구타와 몽키의 사연이 궁금하긴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는 타인이 되어 있습니다. 단지 레드가 사는 아파트의 위치와 분위기를 통해 그가 이제는 원래 살던 집에서도 쫓겨났거나 환영받지 못해 이사를 왔을 것이라는 추정만 할 수 있죠.
레드의 집에서 누넌이 술파티를 벌이는 장면에서 저는 두 상반되는 이미지가 겹쳐 보입니다. 불이 거의 다 꺼져있고 바닥과 벽지도 다 뜯겨 귀신이 나올것만 같은 어두운 폐건물. 그 안에서 유일하게 고급스런 가전과 가구가 들어찬 레드의 집안 풍경. 어둠과 빛이 서로 아주 어색하게 섞여 있는 모습이죠. 그 어색함은 몽키와 누넌, 레드,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누군가라는 괴기한 4인의 파티로 극에 달합니다.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의 몽키와 원래부터 살았다는 듯이 마루에 앉아 있는 시체. 그걸 당연한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또는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하는) 레드.
이 조합을 레드 본인의 눈과 입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제3자인 누넌의 눈과 마음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질감과 공포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느낌이랄까요. 밸런타인 교수가 말한 문장이 딱 누넌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밤새 공포에 떨며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던 동물과 새, 벌레들이 자기 피난처에서 기어 나옵니다. 그때 이들이 보게 되는 건 뭐겠습니까?" p.231
은화
3) 누넌의 말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해요. 구타와 레드가 고통 속에서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더 자비로울 거라는 의도에서 한 말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스토커 가정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도 섞여 있을 테고요.
밸런타인 교수가 앞에서 그런 말을 했죠. 우리는 아직 혈거인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무서워 하는 것도 우리의 상상력과 공포의 정도를 뛰어넘지 못하지만, 현실과 세상의 인과관계가 역전되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라고요. 지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공포이지만 또한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죠.
반면 '구역'의 등장 이후 벌어지는 일, 구타 가족이 겪고있는 현실과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는 예측이 안됩니다. 아무리 딸이라고,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해도 몽키는 사람의 모습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잘못한 게 없이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해오고, 남들의 감시와 눈초리를 피해 도망다니듯 살아왔는데도 레드의 가족은 점점 구석으로 쫓겨나야 합니다. 이보다 더 안좋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형편은 점점 심연으로 내려가고 있죠.
그래서 이 3부 마지막 장의 누넌의 심리는 매우 복잡해 보입니다. 누넌은 유물의 유출을 막아야 하는, 장비공급자 이외의 임무도 부여받은 입장으로 구타와 레드에게 순수한 우정 만으로 접근한 건 아닌 듯 한데요. 그럼에도 레드와 오랜 시간 교류하며, 또 구타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인간적 감정도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레드의 아파트에 찾아간 건 정황상 레드릭과 대면해 대머리수리에 대한 정보 또는 무언가를 캐낼 의도였던 것 같으나 막상 그의 집안 꼴을 보고 일에 대한 생각은 싹 날아가 버린 모습인데요.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레드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구역과 범죄에 계속 의존하며 사느라 나날이 인간에서 멀어지고 있는 레드릭의 일가를 경멸하는 것도 같습니다. 온전히 업무상의 목적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친구로서 도울 수도 없으며,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하기에는 두려운 그들에 대한 모든 복잡한 감정선이죠.
차라리 이 모든 게 지옥으로 떨어졌다면 훨씬 깔끔하게 모든 게 끝나고 마무리 되었을 거라는, 이런 심적인 고생을 할 필요도 없을 거라는 탄식에 가까운 말 같습니다.
은화
“ 그들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한다. 콧대만 높아서는…… 사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 모두를, 평범한 사람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그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만, 그들은 적어도 무엇을 얼마만큼 모르는지는 이해한다. 그 헤아릴 길 없는 심연을 보면서도 그리로 내려갈 수밖에 없음을 안다. 울렁거리지만, 내려가야만 하는데,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심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중에 거기서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생각한다…… ”
『노변의 피크닉』 p.250~25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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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구역'과 미지에 대한 설명 같지만 한 편으로는 양심과 악행에 대한 말 같기도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세상의 진실을 알수록 악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어려우며, 때로는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순간들이 있죠. 차라리 무지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속 편하게 행동할 수 있었겠지만, 인지하고 있고 예측할 수 있음에도 정해진 심연으로 걸어가야 하는 자의 고민과 고뇌란 참으로 암울하죠.
은화
"뭘 위해 건배하죠?" 그녀가 말했다. "하나도 이해가 안가요! 우리가 뭘 어쨌다고요? 어쨌든 이 도시에서 우리가 가장 나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노변의 피크닉』 p.26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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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구타의 몇 안되는 이 대사에서 그녀의 삶이 짓누르는 무게와 답답함을 느꼈어요. 하몬트 사람들을 병자 취급하며 격리시키는 정부도, 레드 가족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따돌리는 이웃들도, 레드와 똑같이 또는 더 큰 거물들이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데도 레드만 옥살이를 해야 했던 상황도 모두 하나 같이 그들에게 친절함이라곤 보이 지 않습니다.
구타의 말처럼 그들보다도 더 나쁜 인간들, 더 나쁜 존재들이 사방에 가득한데도 말이죠.
향팔
“ 뭐, 나야 좋지. 나는 칭찬받는 걸 좋아하니. 특히 미스터 렘천이 마지못해 하는 칭찬을. 이상하다. 어째서 우리는 칭찬받는 걸 좋아하나? 그런다고 돈이 불어나는 것도 아닌데. 명예? 우리가 명예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명예로웠다. 이제 세 명이 그를 알게 됐으니.’ 뭐, 베일리스까지 치면 넷이라 하자. 인간이란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 우리는 애들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듯 칭찬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요컨대 열등감, 콤플렉스가 문 제다. 칭찬은 우리의 콤플렉스를 보듬어 준다. 정말이지 바보 같다. 나는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누군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건가? 나이 들고 뚱뚱한 리처드 H. 누넌을? 그런데 이 H는 또 뭔가? 무슨 상관인가! 물어볼 데도 없고…… 미스터 렘천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 않은가…… 아, 생각났다! 허버트다. 리처드 허버트 누넌. 계속 퍼붓는군…… ”
『노변의 피크닉』 193-194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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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모든 불행은 한 해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데 있다, 라고 누넌은 생각했다. 한 해 한 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고, 모든 게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 눈으로 여러 번 봐 왔는데, 그런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변화를 찾는다. ”
『노변의 피크닉』 22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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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다 부질없다. 다 괜한 짓이었다.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게 아닌가! 억제하지도, 멈추지도 못한다! 어떻게 해도 악의 씨앗이 자라는 걸 막을 수 없다, 고 그는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우리가 제대로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교활하고 영리해서도 아니다.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
『노변의 피크닉』 222-223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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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대개는 아주 평면적인 정의만을 얘기합니다. 이성은 인간의 행동을 동물의 행동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의는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서도 말을 못할 뿐인 개와 그 개의 주인을 구분 짓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면적인 정의에서 좀 더 예리한 고찰이 파생하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활동에 대한 우울한 관찰에 기반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성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비합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러네요, 우리 이야기네요.” 누넌이 동의했다. ”
『노변의 피크닉』 22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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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그럼 또 다른 정의,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
누넌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건 너무 과한데요…… 그건 우리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인간이란 동물과는 달리 앎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존재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었는데요.”
“나도 읽었습니다.” 밸런타인이 말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인간,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 알고자 하는 열망을 쉬이 극복한다는 데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인간에겐 그러한 열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이해하려는 열망은 있지만, 이해하는 데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