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모든 불행은 한 해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데 있다, 라고 누넌은 생각했다. 한 해 한 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고, 모든 게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 눈으로 여러 번 봐 왔는데, 그런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변화를 찾는다.
노변의 피크닉 22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다 부질없다. 다 괜한 짓이었다.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게 아닌가! 억제하지도, 멈추지도 못한다! 어떻게 해도 악의 씨앗이 자라는 걸 막을 수 없다, 고 그는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우리가 제대로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교활하고 영리해서도 아니다.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노변의 피크닉 222-223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대개는 아주 평면적인 정의만을 얘기합니다. 이성은 인간의 행동을 동물의 행동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의는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서도 말을 못할 뿐인 개와 그 개의 주인을 구분 짓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면적인 정의에서 좀 더 예리한 고찰이 파생하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활동에 대한 우울한 관찰에 기반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성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비합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러네요, 우리 이야기네요.” 누넌이 동의했다.
노변의 피크닉 22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럼 또 다른 정의,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 누넌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건 너무 과한데요…… 그건 우리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인간이란 동물과는 달리 앎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존재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었는데요.” “나도 읽었습니다.” 밸런타인이 말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인간,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 알고자 하는 열망을 쉬이 극복한다는 데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인간에겐 그러한 열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이해하려는 열망은 있지만, 이해하는 데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노변의 피크닉 229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말 돌리지 마세요. 그럼 이렇게 여쭤볼게요. 인간이 외계 생명체와 만났어요. 그들은 서로가 이성적 존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나는 모르겠소.” 밸런타인이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내가 그것에 관해 읽었던 글은 모두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접촉할 수 있다면 그건 그들이 이성적이란 의미다. 혹은 뒤집어서, 그들이 이성적이라면 우리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심리를 지닐 영광을 누리는 외계 생명체면 이성적이라는 겁니다. 뭐 그런 거지. 리처드, 보니것 읽어 봤습니까?”
노변의 피크닉 230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니까, 뭐죠. 그들은 우리를 알아채지도 못했다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잖아요……"
노변의 피크닉 232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상상으로는 뭐든 가능하다. 실제가 상상한 대로인 경우는 절대 없고.
노변의 피크닉 259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참 의미심장한 말 같지 않나요. 맥락상의 의도는 '누구나 최악의 상황을 걱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는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방문과 구역이 나타난 이후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공포와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죠. 기존 과학으로 설명 불가능한 것들을 넘어,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불가해한 사회현상들까지 보고되고 있고요. 오히려 <노변의 피크닉>에서는 이렇게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뭐든 가능하다. 상상이 현실 그대로인 경우는 절대 없고."
네, 그러네요. 인간이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인간의 상상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무엇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이걸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수십억 하고도 수십억 명은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알게 되더라도 10분쯤 두려움에 떨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리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노변의 피크닉 270-271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성적으로는 그냥 납득이 안 된다. 그렇게나 근사한데, 백년이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텅 비어 있다니, 거짓이라니, 살아 있지 않은 인형이라니. 여자가 아니라니.
노변의 피크닉 p.275~27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기억을 되짚어 보면, 어머니의 카디건에는 반투명 호박색 단추들이 달려 있었는데, 금색으로 빛나서 뭔가 각별한 달콤한 맛이 날 거란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자신은 그걸 너무나 입에 넣고 빨고 싶어 했다. 하지만 막상 그것들을 입으로 가져가 빨면 언제나 끔찍할 정도로 절망했는데, 그 절망의 경험을 매번 잊곤 했다. 심지어는 잊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기억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노변의 피크닉 p.27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도 예전에 호박단추를 유난히 좋아했어요. 금은 아닌데, 금 같은 투명한 질감이 신비로워 보였거든요. 근데 이렇게 문학적으로 녹여내다니~
제 과거를 들춰봤나 싶을 정도로 너무 자세해서 놀랐어요. 저도 어릴 때 단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특히 호박이나 마노 재질의 단추들은 색깔도 꼭 달고나나 사탕 같아서 정말로 저도 입에 대봤고요 ㅎㅎ
화제로 지정된 대화
벌써 레드의 이야기도 결말을 향해가고 있네요. 오늘부로 책의 마지막 부에 들어갑니다. 아직 작품을 읽고 계신 분들은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하는 경우, 모임에 들어올 때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살아 돌아온 죽은 자들……" 누넌이 중얼거렸다. "뭐요? 아…… 아닙니다. 그건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지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건 상상할 수 있는 일이랄까." (243쪽) "기본적인 원칙이라는 관점에서 당신이 말한 죽은 자들은 영구 축전기보다 더도 덜도 놀라운 게 아니란 걸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군. '바로 그'는 그저 열역학 제1법칙을 거스르는 거고, 죽은 자들은 그저 열역학 제2법칙에서 어긋날 뿐, 차이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혈거인들이지. 유령이나 흡혈귀보다 두려운 걸 상상 못 합니다. 그런데 인과관계에 반하는 것은 유령이 무더기로 오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이지……" (248쪽)
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외계인학이란 공상과학과 형식적 논리를 부자연스레 섞어 놓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 그 연구법의 근본에 있으니.
노변의 피크닉 227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가 마실 커피를 따랐다. 커피는 뜨겁고 진하고 달아서, 지금은 술보다 그걸 마시는 게 더 좋았다. 커피에서 집 냄새가 풍겨 왔다. 구타의 체취. 그냥 구타가 아니라, 가운을 입은 구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아직 볼에 베개 자국이 남아 있는 구타.
노변의 피크닉 p.27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우리 중에 이미 미남으로 불리던 이가 있었는데, 딕슨이란 자로 지금은 땅다람쥐라고 불린다. '고기분쇄기'에 갔다가 어쨌든 살아 남은 유일한 스토커다. 운이 좋았던 거다.
노변의 피크닉 p.29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땅다람쥐의 과거가 여기서 나오는군요. 그가 과거에는 미남이었다니. 참 기구하고도 아이러니한 운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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