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전 60쪽까지 읽었는데 일단 흥미진진하네요. 깡통을 비롯한 요상한 이름들이 붙여진 사물(?)들의 정체도 궁금하고 레드릭 슈하트가 리더로서 어떤 활약을 보일지도 기대되고요.
53쪽까지 읽었는데 @밥심 님 말씀대로 너무 재미있어요! 지금까지 sf소설을 왜 잘 안 읽고 살았나 싶습니다. 텅빈 깡통, 꽉찬 깡통, 불타는 솜털, 악마의 배추, 마녀의 젤리 등등 이런 것들은 정체가 뭘까요 ㅎㅎ
“저기, 키릴! 만약 당신한테 충만한 ‘깡통’이 있다면 어떨 거 같아? 응?” “충만한 ‘깡통’?” 그는 되물으며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하기라도 한 양 눈썹을 씰룩인다. “그러니까, 그거. 당신의 그 자기성 트랩. 뭐더라…… 물체 77-B 말이야. 바로 그건데 그 사이에 뭔가 빌어먹을 것이, 푸른 뭔가가 있는 거야.”
노변의 피크닉 26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충만한 깡통이라는 표현이 쫌 어색하다고 생각했어요. 찾아보니 한국어판에서 ‘깡통’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러시아어 원문으로는 ‘비어 있는(пустой)’에서 파생된 단어 ‘공갈젖꼭지(пустышка)’였고, 이걸 영어판에서는 그냥 ‘empty’라고 번역했네요. ‘충만한 깡통’은 ‘a full empty’라고 되어 있고요. full empty라… 저 말을 들은 키릴의 반응이 이해가 됩니다 ㅎㅎ 그나저나 그 사이에 있는 “뭔가 빌어먹을 것, 푸른 뭔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지 ㄷㄷ 왠지 무서와요
역시 번역은 쉽지 않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향팔 님은 전에 러시아에서 상당 기간 머문 적 있다고 하셨는데 러시아어나 러시아 역사 등을 공부하신 건가요.
네, 벌써 20년은 된 이야기네요 ㅎㅎ 러시아에 딸랑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갔었어요. 떠나기 전에 두달 벼락치기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다녀와서도 취미삼아 쪼끔 더 공부했는데 이젠 다 잊어버렸답니다.
저게 민달팽이가 죽은 도랑인데, 그들이 깐 길에서 고작 2미터 거리다…… 굵은뼈가 민달팽이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멍청한 자식, 도랑에서 떨어져. 안 그러면 묻어 줄 시체도 남지 않을걸……” 앞을 내다본 말이었다. 결국 그는 시체조차 남지 않았으니…… 구역에서 노획물을 갖고 돌아오면 기적, 살아 돌아오면 성공, 순찰대의 총을 맞아도 운이 따른 거고, 나머지는 운명이다……
노변의 피크닉 39-40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레드는 키릴을 엄청 좋아하나봐요. 레드가 아무리 구역을 잘 안다고 해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곳인데, 1년째 깡통과 씨름 중인 키릴에게 “가여움”을 느끼고, 그의 연구 업적을 위해 거길 간다는 걸 보면요.
됐다. 나의 키릴이 완치됐다. 귀가 쫑긋 서고 꼬리도 빳빳해졌다. […] 어니스트는 텅 빈 ‘깡통’ 하나에 현금으로 400은 쳐주니까, 나라면 충만한 ‘깡통’으로 그 망할 자식의, 그의 더러운 피를 다 뽑아낼 거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내 옆에서 키릴이 말 그대로 되살아났고 다시 쌩쌩해져서 멋진 소리까지 내니 말이다.
노변의 피크닉 27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만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레드, 슈히트가 23살이 아니라 43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폭싹 삭은(?) 사람의 모습으로 상상되면서 읽히네요. 연구원이라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거친 성격이고요 ㅎㅎ
연구원이라는 것도 말이 연구원이지, 키릴의 연구 내용을 잘 모르는 걸 보면 레드는 그냥 조수 내지는 현장(구역) 가이드인 것 같고, 아무래도 본업은 스토커에 집중돼 있나봐요. 야생의 사냥꾼 스탈케르!
이 거리에 살던 거의 모두가 역병을 앓았기 때문에 이곳을 역병지구라 부른다. 사망자도 발생했는데, 대부분 노인이었지만, 노인이라고 다 죽은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역병이 아니라 공포였다고 생각한다.
노변의 피크닉 47-4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건 그렇고, 이곳에 폭발이 있긴 했지만 이들이 폭발로 눈이 먼 것 같지는 않다고, 커다란 천둥소리에 먼 거라고들 한다. 듣자마자 눈이 멀어 버릴 정도의 큰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그럴 리 없으니 잘 좀 기억해 봐요!, 라고 말한다. 아니, 그들은 대답을 바꾸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천둥이 쳤고, 그로 인해 눈이 먼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 말고는 천둥소리를 들은 이가 없다……
노변의 피크닉 4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기 지푸라기에 휘감겨서 땅에 닿을 듯 걸려 있는 게 그때 그 로프다……
노변의 피크닉 p.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로프가 허공에 떠있는 기괴한 장면이 그려지네요. 뱀이나 회충처럼 뒤틀린 밧줄에 '지푸라기'가 덕지덕지 붙은 채 지상위에 있는... 지푸라기의 모습이 아마도 자석에 달라붙는 쇠가루 같은 재질이 아닐까 상상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영상으로 구현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역시 타르콥스키 영화를 봐야 하나! ㅋㅋ끙)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콥스키 감독의 <솔라리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데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오, 위키를 찾아보니 타르콥스키 <잠입자>의 각본 작업을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맡아서 했네요. (타르콥스키는 엄청 독특하고 까다로울 것 같은데 의외로 협업이 됐나 보군요.) 그래도 역시 소설이랑 영화랑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ㅎㅎ
<솔라리스> 영화를 렘이 싫어한 이유는 결말 때문이라고 하는데 제가 봐도 타르콥스키 감독이 조금 오버한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아예 각본에 참여했다고 하니 별 문제는 없었겠네요. 기대와는 달리 <솔라리스> 영화에서 타르콥스키는 변화무쌍한 바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정거장 내부 세트엔 공을 좀 들인 것 같았지만요. 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에 촛점을 맞춘 듯한 연출이었습니다. 그의 영화를 잘 모르지만 타르콥스키가 이런 성향이라면 <stalker>에서도 구역의 기기묘묘한 이미지를 표현하기보단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더 치중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측이니 모르죠. 소설 읽고나면 영화를 바로 보고 확인하려 합니다.
@밥심 님의 예측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잘은 몰라도 타르콥스키 스타일이라면 저같은 관객이 재미를 느낄 만한 장면 묘사는 잘 없을 듯하네요. 롱테이크로 찍은 인물의 고뇌와 철학적 메시지에 주력할 듯… (노변의 피크닉은 헐리웃 스타일로 영화를 찍어도 잘 어울리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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