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다 왔다. 구역이다! 즉시 살갗에 오한 같은 게 느껴졌다. 나는 매번 이 오한을 느끼는데, 이게 구역이 나를 맞이하는 방식인지, 스토커의 신경이 장난치는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노변의 피크닉 p.49~5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바람이 멈춘 듯했으며 불길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엔진만이 잠에 취한 듯 평온한 소리를 낸다. 주위에는 태양 빛이 비추고 더운 공기로 가득하다……
노변의 피크닉 p.5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구역'의 모습은 햇빛이 내리쬐는 평온한 자연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간의 상식을 부정하는 현상이 가득한 게 대비되네요. 제목은 피크닉이라고 표현하지만 구역에 가는 사람들에게는 목숨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죠. 햇살 때문에 공기는 후끈하고, 초목이 우거지며, 사람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중간에 나오는 '모기지옥'이라는 단어가 재밌네요. 마치 땅 위의 개미지옥 구멍에 개미가 발을 디뎠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듯, 허공에 있는 어떤 강력한 중력왜곡? 현상 때문에 물체가 사라지는 특이점이 있나 봅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모기로 단어를 바꿔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어떤 존재인지 특성을 여전히 알 수 있어서 재밌네요.
오래된 쓰레기 더미 위로, 깨진 유리와 천 쪼가리들 위로 어떤 떨림이, 어떤 진동이, 뭐랄까 마치 정오의 철제 지붕위에 드리운 뜨거운 공기처럼 일렁였다. 그건 작은 언덕을 간신히 넘어서서 나아가고, 또 나아가더니 표시대 바로 옆으로 우리 앞을 가로질렀고, 길 위에 잠시 멈춰 0.5초 동안 머물렀다가―아니면 나에게만 그렇게 보인 걸까?―벌판으로, 덤불 너머, 썩은 담장 너머 그곳으로, 오래된 자동차의 묘지로 빨려 들어갔다.
노변의 피크닉 p.5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머리에 잘 안 그려지지만 이 장면에서 비문증이 생각났어요. 가끔 눈과 빛의 각도가 맞으면 눈 앞에 반투명한 뭔가 떠다니는 게 보이죠. 희미하지만 분명한 덩어리와 형태가 느껴지는 덩어리의 움직임.. 구역에 여러 번 다녀온 주인공 같은 베테랑도 알 수 없는 현상이 곳곳에 널려있으니 왜 다들 '구역'에 간다고 하면 제정신이 아닌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구역은 당신이 악인인지 선인인지 아무 관심이 없으니, 너에게 고맙지, 민달팽이. 넌 바보였고 아무도 네 진짜 이름 따윈 기억도 못 하지만, 영리한 자들에게 어디로 가면 안 되는지를 몸소 보여 줬으니 말이야……
노변의 피크닉 p.5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나는 그 타이어가 거슬렸다. 타이어의 그림자도 어딘가 비정상이다. 태양은 우리 등 뒤에서 비추는데 타이어 그림자는 우리 쪽으로 드리운다.
노변의 피크닉 p.6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구역에서는 아는 길로 100번을 탈없이 다녔어도 101번째에 죽을 수 있다.
노변의 피크닉 p.6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1부를 읽었는데 중간부터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네요. ㅋㅎ 그리고 1부에서 독신인 레드릭 슈하트가 2부에선 기혼이 되고 특정 직업이 없다고 차례에 나와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 짐작이 됩니다.
주인공 나이가 각각 1부랑 2부에서 23세, 28세인데 정말 젊네요. 아무리봐도 말이나 행동에서 20대가 아니라 최소 30대 이상의 관록? 이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만큼 구역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뜻일수도...
본인 말대로 “한평생을 늑대처럼 살아”와서 그런가봅니다.
햇빛이 쏟아지고 주위에는 인적이 없다. 그리고 불현듯 지금 당장 구타가 보고 싶어졌다. 그냥 보고 싶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손을 잡고 싶다. 구역에 다녀온 자에게는 한 가지 바람만 남는다. 여자 친구의 손을 잡는 것. 특히 스토커의 자식들, 스토커들한테서 어떤 아이들이 태어나는지에 대한 그 모든 말들이 떠오를 때면…… 그런데 지금 구타는 됐다. 지금 나는 초장부터 최소한, 센 술이 필요하다.
노변의 피크닉 7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 책을 읽다보면 체르노빌 생각도 나네요.
저도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상현상을 보며 원전 사고가 떠올랐는데 의외로 이 작품이 출간된 건 체르노빌 사고보다 훨씬 전이더라고요. 작품발표 : 1972년 체르노빌 : 1986년
뭔가 현실을 예언한 작품 같기도 해서 더 놀랍습니다.
나는 그를, 구탈린을 아주 좋아한다. 나는 주로 괴짜들을 좋아한다. 그는 돈이 있으면 누구에게서든 노획물을 흥정도 하지 않고 부르는 가격 그대로 사서는 밤이 되면 사들인 노획물을 도로 구역으로 가져가 묻어 놓는다……
노변의 피크닉 91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주스러운 구역. 구역으로부터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어딜 가든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든 구역, 구역, 또 구역이다…… 구역에서 영원한 세계와 평화가 흘러나온다는 키릴의 말을 생각해 보는 것은 물론, 좋다. 키릴은 좋은 사람이고, 그를 바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고, 오히려 똑똑한 축에 속하지만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른다. 그는 얼마나 많은 개자식들이 구역 주변을 얼쩡거리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이제는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누군가가 ‘마녀의 젤리’를 필요로 하는 일이.
노변의 피크닉 97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키릴, 사랑하는 나의 친구, 당신이 실수한 거야. 미안, 그런데 당신이 아니라 구탈린이 옳았어.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구역에 선의라곤 없어.
노변의 피크닉 104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한평생을 늑대처럼 살았고, 한평생 나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백 년 만에 선심을 쓰기로, 선물이란 걸 하기로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거지 같은 생각으로 그에게 그 ‘깡통’에 대해 말했을까……? 그 일을 떠올리자마자 목이 죄어 왔다. 내가 아마 정말로 울부짖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이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듯했는데, 구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노변의 피크닉 10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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