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후 저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와 짧은 신호음이 들렸다. 그러자 레드릭은 몸을 일으키고는 몽키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제 더는 아이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바지와 재킷을 입었다. 몽키는 여전히 조잘거렸지만, 그는 정신을 딴 데 두고 입만 웃어 보였고, 그렇게 아빠 슈하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문 채 주변 세계를 차단해 버렸다.
노변의 피크닉 p.143~14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 부분에서 전 슈하트가 무서운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정황상 잠도 못자고 꼬박 밤을 새운 상황인데도 마음이나 육체의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일 앞에서는 가족이라도 마음을 차단하는 면모가 굉장히 차갑게 다가오네요.
저도 이 대목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2부 마지막에 가서 가족을 생각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드러나는 문단을 보면 이 정도 굳은 마음가짐과 집중이 아니면 안되겠다고 이해가 됩니디.
제가 레드의 상황이었다면 저렇게 버틸 수 있었을까 상상해보게 되네요. 레드가 거칠고 때론 부정한 일에 가담하기는 해도 근본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데 그의 인생이 매순간 순탄하지 않아 안타깝기도 하고요. 절친하던 친구가 죽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우호적이지도 않고, 생계를 위해 여전히 위험한 스토커 일에 매달리고 있고, 건강마저도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고요. 매페이지마다 쓴맛이 느껴집니다.
"너 거만해졌구나." 누넌이 나무라듯 말했다. "거만하다니. 돈을 한 장 한 장 세고 있는 게 싫을 뿐이지."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누넌이 정신을 딴 데 두고 대꾸했다. 그는 옆 의자에 놓인 레드릭의 서류 가방을 무심히 보더니 슬라브 문자가 새겨진 은판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다 맞는 말이야. 사람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지……"
노변의 피크닉 p.1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부정을 못하겠네요.
이 문장은 저도 수집해두었습니다.
이 문장이 조금 웃겼던 게, 제가 보기엔 건방지고 거만한 건 누넌 같아 보이는데 오히려 레드한테 거만하다고 하니 적반하장으로 보였어요. 제 머리 속에서 누넌은 빌보 배긴스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중입니다. 작고 통통 튀며, 피부가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딱 빌보가 떠올랐거든요. 또는 피노키오의 악당 마부처럼 속물적인 인상도 섞여 있을 것 같고요.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지만, 막상 돈이 있다고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안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면 벌수록 돈 생각을 더 하게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옳소! 근데 확실히 돈에 여유가 생기면 삶도 여유로워지는 거 같아요. 그게 어느 정도 이상이면 다 똑같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려면 멀었기에 푼돈이라도 생기면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저는 누넌의 말이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 같아요.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면서 약간의 소비를 할 수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 말이죠. 대부분은 부유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돈의 부족으로 인한 결핍을 겪지 않으려는 걱정이 더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빈곤함만이 아니더라도 노후에 대한 불안, 자녀교육과 경쟁에 대한 불안 등은 주머니 사정과 무관하지 않죠. 반면 일정 수준 이상 수입이 늘어나면 그때부터는 결핍 때문에 돈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돈으로 이미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체험과 욕구에 집착한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돈으로 모든 걸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돈이 정말 충분히 많다면 살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얘기죠. 보다 많은 돈으로 기존에 살 수 없었고, 겪어볼 수 없었던 안락함과 쾌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돈이 더 이상 재정적 수단이나 화폐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일 것입니다. 부副 그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영향력에 심취한다고 해야 할까요.
돈에 대한 얘기를 적다 보니 책 하나가 생각났는데요. 워킹푸어였던 미국인 여성이 쓴 <핸드 투 마우스>라는 에세이입니다. 절대적 빈곤층이어서 사회적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중산층도 아닌 워킹푸어의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담으로 여과없이 적은 글이에요. 가령 '왜 가난한 이들은 더 나은 직업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미국 저임금 노동자 린다 티라도가 가난한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는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부자들이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거친 말로 분노를 쏟아내는 동시에 익살스러운 유머로 풍자한다.
저녁 시간대 중반까지는 첫 번째 일터인 바에서 일해야 했는데, 두 번째 일터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접대하는 종업원들은 사전 준비를 위해 오후 세네 시에는 출근해야 했으므로 내가 저녁시간대에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 때문에 식당에서 좋은 시간대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식당 일 때문에 바에서 열리는 파티 등 특별한 행사들, 즉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행사도 놓쳤다. 일이란 이런 식이다. 두 곳 이상의 일자리를 뛸 때마다 나는 스케줄이 겹쳐서 한 곳에서 버는 만큼을 다른 곳에서는 잃었다. 즉, 첫 번째 일터에서 특별행사나 추가 노동시간을 미리 보장받을 수 있다면 두 번째 일터는 구할 필요가 없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38~39,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내 주변에서는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잠재적 네트워크에서 단절돼 있음을 뜻한다. 내가 일과 관련한 인맥이 별로 없던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인맥을 쌓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급 인턴직, 또는 줘봤자 점심값 정도 주는 인턴직을 수락하는 것은 집세를 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65,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내 인생에서 그저 최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 없이 일자리를 두 탕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한 일터에서는 3킬로미터 정도, 다른 일터에서는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소화할 수 없는 거리는 아니다. 재미로 그 거리를 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 뛴 다음엔 집에 가서 쉰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전 다섯 시쯤 일터로 걸어가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 식당 종업원 일을 했다. 한 시쯤이면 집에 도착했고, 처리해야 할 잡일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뻗었다. 그리고는 오후 여섯 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바에서 일하기 위해 머리를 다듬고 5킬로미터를 걸어가 새벽 한두 시까지 바텐더로 일한 후, 동료에게 구걸하여 차를 얻어 타고 오거나 집으로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두세 시. 나는 잠시 쉬고, 쪽잠을 자고,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95,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워킹푸어들이 당장 집에서 쫓겨나거나 굶지 않기 위해서, 진통제를 사기 위해서 얻는 일자리 대부분은 근무조건 자체가 고정적/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사장이나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갑자기 추가근무를 해야 하기도 하고, 출퇴근 시간이 바뀌기도 하고요. 근무 시간 자체가 고정적이지 않다 보니 개인이 구직을 위해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투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미국의 특수성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밀집한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에서는 일터가 장거리인 경우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작가는 차를 굴릴 여유가 없다 보니 근무지까지 1시간을 넘게 걸어서 이동했다고 합니다. 왕복으로만 하루에 몇시간을 소모해야 하는거죠. 당연히 체력도 소진되고요. 열악한 근무환경은 건강과 외모에도 영향을 줘서 퇴근후 돌아오더라도 병이나 건강악화로 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자기 관리를 할 정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다른 자리를 찾아볼 생각도 못하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을 할수록 오히려 현재의 가난에 종속되는 역설을 느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살다 오신 분께 들었는데 통근 시간이 '편도' 3-4시간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운전을 하루에 7-8시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노동이라 삶이 굉장히 피폐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쌓이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 범죄로 이어지는 것 같고요. 왜 저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는가란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 거죠. TMI지만,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의 경제력으로는 원하는 주거환경을 서울에서 누릴 수 없기에 통근시간을 포기하고 경기도로 이사 온 케이스입니다. 집이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고요. 그나마 주변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저 책을 읽으면서 미국에서는 차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게 기본권의 많은 부분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로 느꼈어요. 아마 상황에 따라 평생 주를 벗어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주와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할텐데 그런 기회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람들은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해도 벗어날 길이 없을텐데 말이죠..
오~ 제 이야기 같아서 읽고 싶네요. 어제 '추적60분'에서 지방의 중견 기업에서 성실히 일하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회사의 계획적인 파산으로 사지에 몰린 모습을 보았어요. 이런 것들 때문에 다들 공부공부하나?란 생각도 들고...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못 배워서 이렇게 되었다는 자책을 하잖아요. 선택지가 없어지는 삶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에 대한 상상을 하니 괴로웠습니다.
생각 좀 안 해 봤으면 좋겠네요. 그런 인생~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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