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지만, 막상 돈이 있다고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안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면 벌수록 돈 생각을 더 하게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옳소! 근데 확실히 돈에 여유가 생기면 삶도 여유로워지는 거 같아요. 그게 어느 정도 이상이면 다 똑같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려면 멀었기에 푼돈이라도 생기면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저는 누넌의 말이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 같아요.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면서 약간의 소비를 할 수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 말이죠. 대부분은 부유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돈의 부족으로 인한 결핍을 겪지 않으려는 걱정이 더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빈곤함만이 아니더라도 노후에 대한 불안, 자녀교육과 경쟁에 대한 불안 등은 주머니 사정과 무관하지 않죠. 반면 일정 수준 이상 수입이 늘어나면 그때부터는 결핍 때문에 돈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돈으로 이미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체험과 욕구에 집착한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돈으로 모든 걸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돈이 정말 충분히 많다면 살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얘기죠. 보다 많은 돈으로 기존에 살 수 없었고, 겪어볼 수 없었던 안락함과 쾌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돈이 더 이상 재정적 수단이나 화폐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일 것입니다. 부副 그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영향력에 심취한다고 해야 할까요.
돈에 대한 얘기를 적다 보니 책 하나가 생각났는데요. 워킹푸어였던 미국인 여성이 쓴 <핸드 투 마우스>라는 에세이입니다. 절대적 빈곤층이어서 사회적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중산층도 아닌 워킹푸어의 삶이 무엇인지를 체험담으로 여과없이 적은 글이에요. 가령 '왜 가난한 이들은 더 나은 직업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저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미국 저임금 노동자 린다 티라도가 가난한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는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부자들이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거친 말로 분노를 쏟아내는 동시에 익살스러운 유머로 풍자한다.
저녁 시간대 중반까지는 첫 번째 일터인 바에서 일해야 했는데, 두 번째 일터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접대하는 종업원들은 사전 준비를 위해 오후 세네 시에는 출근해야 했으므로 내가 저녁시간대에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 때문에 식당에서 좋은 시간대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식당 일 때문에 바에서 열리는 파티 등 특별한 행사들, 즉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행사도 놓쳤다. 일이란 이런 식이다. 두 곳 이상의 일자리를 뛸 때마다 나는 스케줄이 겹쳐서 한 곳에서 버는 만큼을 다른 곳에서는 잃었다. 즉, 첫 번째 일터에서 특별행사나 추가 노동시간을 미리 보장받을 수 있다면 두 번째 일터는 구할 필요가 없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38~39,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내 주변에서는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잠재적 네트워크에서 단절돼 있음을 뜻한다. 내가 일과 관련한 인맥이 별로 없던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인맥을 쌓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급 인턴직, 또는 줘봤자 점심값 정도 주는 인턴직을 수락하는 것은 집세를 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65,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내 인생에서 그저 최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자동차 없이 일자리를 두 탕 뛰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한 일터에서는 3킬로미터 정도, 다른 일터에서는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소화할 수 없는 거리는 아니다. 재미로 그 거리를 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 뛴 다음엔 집에 가서 쉰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오전 다섯 시쯤 일터로 걸어가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 식당 종업원 일을 했다. 한 시쯤이면 집에 도착했고, 처리해야 할 잡일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뻗었다. 그리고는 오후 여섯 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바에서 일하기 위해 머리를 다듬고 5킬로미터를 걸어가 새벽 한두 시까지 바텐더로 일한 후, 동료에게 구걸하여 차를 얻어 타고 오거나 집으로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면 새벽 두세 시. 나는 잠시 쉬고, 쪽잠을 자고, 다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핸드 투 마우스 - 부자 나라 미국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빈민 여성 생존기 p.95, 린다 티라도 지음, 김민수 옮김
워킹푸어들이 당장 집에서 쫓겨나거나 굶지 않기 위해서, 진통제를 사기 위해서 얻는 일자리 대부분은 근무조건 자체가 고정적/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사장이나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갑자기 추가근무를 해야 하기도 하고, 출퇴근 시간이 바뀌기도 하고요. 근무 시간 자체가 고정적이지 않다 보니 개인이 구직을 위해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투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건 미국의 특수성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밀집한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에서는 일터가 장거리인 경우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작가는 차를 굴릴 여유가 없다 보니 근무지까지 1시간을 넘게 걸어서 이동했다고 합니다. 왕복으로만 하루에 몇시간을 소모해야 하는거죠. 당연히 체력도 소진되고요. 열악한 근무환경은 건강과 외모에도 영향을 줘서 퇴근후 돌아오더라도 병이나 건강악화로 앓는 경우가 늘어나고, 자기 관리를 할 정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다른 자리를 찾아볼 생각도 못하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일을 할수록 오히려 현재의 가난에 종속되는 역설을 느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살다 오신 분께 들었는데 통근 시간이 '편도' 3-4시간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고 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운전을 하루에 7-8시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노동이라 삶이 굉장히 피폐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쌓이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 범죄로 이어지는 것 같고요. 왜 저들은 행복하게 '웃고' 있는가란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치미는 거죠. TMI지만,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의 경제력으로는 원하는 주거환경을 서울에서 누릴 수 없기에 통근시간을 포기하고 경기도로 이사 온 케이스입니다. 집이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못할 때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더라고요. 그나마 주변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저 책을 읽으면서 미국에서는 차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게 기본권의 많은 부분에서 제외된다는 의미로 느꼈어요. 아마 상황에 따라 평생 주를 벗어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더 나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주와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할텐데 그런 기회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람들은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해도 벗어날 길이 없을텐데 말이죠..
오~ 제 이야기 같아서 읽고 싶네요. 어제 '추적60분'에서 지방의 중견 기업에서 성실히 일하던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회사의 계획적인 파산으로 사지에 몰린 모습을 보았어요. 이런 것들 때문에 다들 공부공부하나?란 생각도 들고...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못 배워서 이렇게 되었다는 자책을 하잖아요. 선택지가 없어지는 삶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에 대한 상상을 하니 괴로웠습니다.
생각 좀 안 해 봤으면 좋겠네요. 그런 인생~와우~!
"그런데 난 누가 날 위해 조건을 맞춰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난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맞췄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라서."
노변의 피크닉 p.1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대는 악에서 선을 행해야 할지니, 달리 선이 나올 데가 없기 때문이다.
노변의 피크닉 14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처음에는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가 했는데 읽다보니 점점 알게 되더라고요.
이 문장 보고 아침부터 웅장이 가슴해졌어요!
나는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건 역병이 아니라 공포였다고 생각한다. 정말 공포스러웠다.
노변의 피크닉 48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입 다물어, 그리고 주위를 제대로 잘 봐, 안 그러면 난쟁이 린던과 같은 일을 겪게 될 거야, 라고 일러 준다. 효과가 있었다. 난쟁이 린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래야지. 구역에서는 아는 길로 100번을 탈없이 다녔어도 101번째 죽을 수 있다.
노변의 피크닉 66p,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고 나서 그는 갓등에서 흘러나온 아늑한 불빛이 비추고 있는 복도의 부드러운 카펫 위를 걸었다. 이곳에서는 비싼 담배, 파리의 향수, 지폐가 가득 채워진 번쩍거리는 천연 가죽 지갑 냄새, 하룻밤에 500을 부르는 비싼 여인들 냄새, 묵직한 금으로 된 담뱃갑 냄새가 났다. 전부 싸구려 냄새다. 구역에서 자라고 구역을 빨아먹고 배불리 먹고 탈취한, 구역 덕에 살찌운 역한 곰팡이의 냄새. 이 곰팡이에겐 다 상관없었다. 특히 구역에 있던 모든 것을 배불리 먹고 실컷 훔친 다음에 벌어질 일, 그리고 구역의 것들이 밖으로 나가 세상에 뿌리를 내린 후의 일은 더더욱. 레드릭은 노크 없이 874호 문을 밀었다.
노변의 피크닉 154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앞 부분에서 레드릭이 거리의 공감각적인 냄새와 환상을 경험하는 부분과 대비되더라고요. 밝고 정신없는 도시의 풍경과 달리, 정적이고 조용하며 공기가 굳어있는 듯한 호텔 내부. 빠질 수로가 없어 고이기만 하다가 썩어 냄새가 나는 늪지대, 진창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저 호텔이 과연 하몬트에 원래부터 있던 건물일까 생각도 듭니다. 구역과 그 부산물의 재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온갖 검은돈과 사업가, 노름꾼, 탕자, 거물과 뒷세계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진 곳이 아닐까요. '구역'이 점차 마을 곳곳에 퍼져나가 주변 풍경을 바꾸는 모습에서 곰팡이라는 표현이 딱 적절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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