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 님 글을 읽다보니, 구역은 ‘방문자’들의 폐기물 하치장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구역의 물건들은 방문자들이 지구에 피크닉 왔다가 버리고 간 쓰레기에 불과한 것일까요.
[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향팔

은화
우리도 쓰레기를 버릴 때 별 생각 없이 버리는 것처럼 외계인도 별다른 의도 없이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ㅎㅎ
이전 스타니스와프 렘이 모임에서도 외계인들이 버린 쓰레기와 폐기물 때문에 지구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단편이 있었는데 그 내용도 떠오르고요.
전 책 시작 부분에서 '구역'의 좌표가 지구본을 돌리면서 선을 쏘인듯 이어진다고 교수가 말한 부분이 생각납니다. 어쩌면 외계에서 실험이나 그냥 관찰 목적으로 방사선마냥 강한 무언가를 쏜 게 아닐까 하는..

은화
“ 상식에 의거하지 않고, 어떠한 도덕적 망설임도 없이 두 악한은 생명 없는 지구의 바위에 상해 버린 젤라틴 풀 여섯 통과 알부민 페이스트 두 통을 쏟아붓고는, 그 혼합물 위에 발효한 인산, 오탄당, 과당,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곰팡이가 핀 아미노산 세 병을 비우고는, 끈끈한 더미를 왼쪽으로 휜 석탄 삽과 역시 왼쪽으로 휜 부지깽이로 섞어서, 장래의 모든 지 구상 생명체의 단백질을 왼쪽으로 휘어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p.75,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폴란드가 낳은 SF 문학의 거장이자 소설가, 극작가, 미래학자, 문명학자, 과학 철학자, 문학 평론가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는 전방위적 문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가 공인된 폴란드어 판본, 원전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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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그 왼쪽으로 휘는 성질과, 이러한 악의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서 오늘날까지 작용하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함으로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지은 이 아르테팍툼 아브호렌스, 끔찍한 인공물이 고통받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가요? ”
『노변의 피크닉』 p.7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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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오, 렘의 단편에 그런 내용이 있군요. 지난 모임에 참여를 못했는데, 렘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분 작품에도 부쩍 호기심이 생깁니다.

꽃의요정
렘 님은 그믐에서 읽었던 3개의 작품으로, 제 마음의 아파트 중 펜트하우스에 입주하셨습니다.

향팔
오.. 꽃의요정님 말씀에 더 구미가 땡깁니다요 ㅎㅎ <솔라리스>부터 읽어보려고요! 지난 렘책 모임에서 나누셨던 얘기들도 중간중간 열어보면서요.

꽃의요정
근데 지구인들도 그럴 거 같아요. '지구만 깨끗하면 되지 뭐'란 생각으로 어느 행성을 식민지화해서 그곳에 쓰레기부터 갖다 버릴 것 같아요. 다들 '쓰레기'는 내 눈 앞에만 없으면 된다는 생각이잖아요.

향팔
같은 생각입니다. 당장 서울에서 나오는 쓰레기만 봐도 다른 지역으로 계속 떠넘기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우리 동네’에 소각장 생기는 것도 억울하다 주장들을 하고 있고요.

은화
“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후 저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와 짧은 신호음이 들렸다. 그러자 레드릭은 몸을 일으키고는 몽키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제 더는 아이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바지와 재킷을 입었다. 몽키는 여전히 조잘거렸지만, 그는 정신을 딴 데 두고 입만 웃어 보였고, 그렇게 아빠 슈하트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문 채 주변 세계를 차단해 버렸다. ”
『노변의 피크닉』 p.143~14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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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이 부분에서 전 슈하트가 무서운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정황상 잠도 못자고 꼬박 밤을 새운 상황인데도 마음이나 육체의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일 앞에서는 가족이라도 마음을 차단하는 면모가 굉장히 차갑게 다가오네요.
밥심
저도 이 대목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2부 마지막에 가서 가족을 생각하는 주인공의 마음이 드러나는 문단을 보면 이 정도 굳은 마음가짐과 집중이 아니면 안되겠다고 이해가 됩니디.

은화
제가 레드의 상황이었다면 저렇게 버틸 수 있었을까 상상해보게 되네요. 레드가 거칠고 때론 부정한 일에 가담하기는 해도 근본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데 그의 인생이 매순간 순탄하지 않아 안타깝기도 하고요.
절친하던 친구가 죽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우호적이지도 않고, 생계를 위해 여전히 위험한 스토커 일에 매달리고 있고, 건강마저도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고요. 매페이지마다 쓴맛이 느껴집니다.

은화
“ "너 거만해졌구나." 누넌이 나무라듯 말했다.
"거만하다니. 돈을 한 장 한 장 세고 있는 게 싫을 뿐이지."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누넌이 정신을 딴 데 두고 대꾸했다. 그는 옆 의자에 놓인 레드릭의 서류 가방을 무심히 보더니 슬라브 문자가 새겨진 은판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다 맞는 말이야. 사람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지……" ”
『노변의 피크닉』 p.1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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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돈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부정을 못하겠네요.
밥심
이 문장은
저도 수집해두었습니다.

은화
이 문장이 조금 웃겼던 게, 제가 보기엔 건방지고 거만한 건 누넌 같아 보이는데 오히려 레드한테 거만하다고 하니 적반하장으로 보였어요.
제 머리 속에서 누넌은 빌보 배긴스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중입니다. 작고 통통 튀며, 피부가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딱 빌보가 떠올랐거든요. 또는 피노키오의 악당 마부처럼 속물적인 인상도 섞여 있을 것 같고요.



향팔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않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지만, 막상 돈이 있다고 돈 걱정 내지는 돈 생각을 안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돈을 벌면 벌수록 돈 생각을 더 하게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꽃의요정
옳소! 근데 확실히 돈에 여유가 생기면 삶도 여유로워지는 거 같아요. 그게 어느 정도 이상이면 다 똑같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거기에 도달하려면 멀었기에 푼돈이라도 생기면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은화
저는 누넌의 말이 일반적인 수준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 같아요. 경제적 여유가 없거나, 자기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면서 약간의 소비를 할 수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 말이죠. 대부분은 부유해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돈의 부족으로 인한 결핍을 겪지 않으려는 걱정이 더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빈곤함만이 아니더라도 노후에 대한 불안, 자녀교육과 경쟁에 대한 불안 등은 주머니 사정과 무관하지 않죠.
반면 일정 수준 이상 수입이 늘어나면 그때부터는 결핍 때문에 돈에 집착하기 보다는, 그 돈으로 이미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경험해봤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체험과 욕구에 집착한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돈으로 모든 걸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돈이 정말 충분히 많다면 살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얘기죠.
보다 많은 돈으로 기존에 살 수 없었고, 겪어볼 수 없었던 안락함과 쾌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돈이 더 이상 재정적 수단이나 화폐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일 것입니다. 부副 그 자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영향력에 심취한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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