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도시에서는 저런 게 유행이었다.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노는 것. 우리가 활기차고 끈기 있고 의지가 굳은 젊은이들을 길러 낸 것이다……
노변의 피크닉 p.19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발을 흔들며 눈앞을 오가는 구두코를 음울하게 바라보면서 누넌은 그까짓 당신네 포상이야, 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네 그따위 훈장들은 화장실에나 걸어 뒀다고. 자기가 무슨 현자인 줄 아나, 상대가 어리면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네놈이 말 안해도 난 여기서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잘 아니까 내 적에 대해 설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하란 말이다. 내가 언제 어떻게, 뭘 망친 건지…… 그 개자식들이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어디서, 어떻게, 대체 무슨 빈틈을 찾아낸 건지……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다. 난 뭣 모르는 애가 아니란 말이다. 벌써 반백 년을 살았고, 그따위 훈장이나 받자고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아니다……
노변의 피크닉 p.20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속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누넌에게서 직장인 또는 하급자의 설움이 느껴지네요. 50대가 되어서도 누군가에게 치여 사는 모습을 보니 이 인물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싫은 소리와 타박을 받으면서 모멸감을 뒤로 삼키는 내면 묘사가 좋았습니다.
"… 회장님, 제 구역에서 밀렵은 사실상 끝난 것 같습니다. 위 세대는 떠났고, 젊은 세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게다가 수작업의 이점도 예전만 못하죠. 기술이, 스토커 로봇이 도입되고 있어요."
노변의 피크닉 p.20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제 벌써 새로운 스토커들, 사이버네틱스로 무장한 스토커들이 등장했다. 과거의 스토커는 동물적인 집요함을 갖춘 지저분하고 음침한 인간으로, 구역을 조심조심 기어가 큰돈을 벌어들이곤 했다. 신세대 스토커는 넥타이를 맨 멋쟁이 엔지니어로, 구역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어딘가에 앉아 입에는 담배를 물고 팔꿈치 옆에는 에너지 음료가 든 잔을 두고 편안히 앉아서 화면들을 본다. 샐러리맨인 것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장면이다.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논리적이다.
노변의 피크닉 p.22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여기도 자동화, 기계화의 길을 피하지 못하는군요; 더 이상 예전처럼 노하우와 지식과 경험으로 무장하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후줄근한 스토커가 아니라, 양복을 빼입고 음료 한 잔을 들고 여유롭게 원격으로 로봇을 조종하며 물건들을 회수해 오는 엔지니어. 소설임에도 낯설지가 않네요.
누넌은 계속 지껄이면서, 구역이 낳은 그 끔찍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맙소사. 대체 이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노변의 피크닉 p.27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특히 3부의 마지막 부분은 읽으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마치 누넌이 되어 함께 술자리에 동석한 기분이었습니다. 인연으로 엮여 있음에도 정작 어떤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죠. 어울리지 않는 것들만을 억지로 모아 강제로 한 자리에 앉힌 느낌이랄까요. 누넌의 생각대로 '의도된 게임과 역할극'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유희를 즐겨야 하는 자리.. 차마 분위기 때문에, 레드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누넌. 똑같은 심정이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려는 레드의 객기. 당연한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하지만 그 안 곳곳에 부자연스러움이 가득하네요.
이 번 장을 읽고 노변의 피크닉 이유가 궁금했는데 완전 반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인간적인 사고와 시각으로 움직이는지 뼈 때리는 강력한 한방으로 느껴졌습니다.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노변의 피크닉 p.22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외계인학이란 공상과학과 형식적 논리를 부자연스레 섞어 놓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 그 연구법의 근본에 있으니."
노변의 피크닉 p.22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아니면 이런 가설도 있습니다. 방문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사실상 현재 우리는 접촉 상태지만, 우리가 그걸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방문자들은 구역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소상히 연구하면서 '미래에 닥칠 잔혹한 기적들'을 준비중이다."
노변의 피크닉 p.23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주석에도 쓰여 있지만 <솔라리스>의 표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가우면서도 신기하네요. 책장에 있던 <솔라리스>를 꺼내 마지막 장을 저도 다시 펼쳐봤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에 읽은 것도 아닌데 마지막 장을 다시 읽는데 '이런 느낌이었나?' 싶은 신선함이 또 몰려오네요. 당시에는 이야기의 흐름에 압도되어 마지막 장 문장을 그냥 물 흐르듯이 읽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까 새로워요.
책을 반납해서 당장 확인할 수 없어 아쉽네요.
도서관에 갔다가 <솔라리스> 마지막 문단을 다시 읽고 왔습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렘에게 보내는 헌사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나는 지금껏 수백 명 목숨을 집어삼키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인류로 하여금 미약한 소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헛수고를 거듭하게 만들고, 무심결에 나를 티끌보다 가볍게 들어올리는 이 액체 상태의 거인이 나와 그녀, 두 사람의 비극에 마음을 움직이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의 활동은 분명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에 봉인되어 있는, 어쩌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르는 실낱같은 기회마저 영원히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가구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고, 그녀의 숨결을 여전히 기억하는 공기 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야만 할까? 무엇을 위하여? 그녀가 돌아온다는 희망으로? 내게 희망 따위는 이제 없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일말의 기대감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녀가 내게 남긴 유일한 자취다. 내가 여전히 기대하는 완결과 환멸과 고통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오! 저도 그 주석 부분 읽고 <솔라리스> 마지막 문장 읽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222쪽 모든 불행은 한 해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데 있다, 라고 누넌은 생각했다. 한 해 한 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아채지 못 한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이 변한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고, 모든 게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 눈으로 여러 번 봐 왔는데, 그런데도 변화가 일어나는 그 순간은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변화를 찾는다. 223쪽 그저 세상이 이렇기 때문이다. 방문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다. 돼지는 어떤 상황에서든 진흙탕을 찾아낼 테니…. 233쪽 “잠깐만 좀 들어보십시오. ‘그대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왜 위대한가?‘” 밸런타인이 인용구를 읊었다. “’두 번째 자연을 창조해서? 우주의 에너지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동력으로 이용해서? 아주 짧은 기간에 지구란 행성을 장악하고 천체로 통하는 창을 내서? 아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전했고 앞으로도 보전할 생각이기에 위대하다’” 251쪽 인류의 가장 영웅적인 행동은….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 낼 생각이라는 거다… 256쪽 우리는 왜 이토록 젠장맞게 아등바등하나? 돈을 벌려고? 하지만 아등바등 살기 바쁜데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노변의 피크닉 3부,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3부를 읽고 4부로 넘어갔는데 구역에서 처절하게 벌어지는 주인공의 생사고투에 대한 묘사가 대단하네요.
3부를 읽다 보니 누넌이 아마도 겉으로만 장비 중개상일 뿐 사실은 연구소나 정부에서 심은 끄나풀 같네요. 레드릭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좀 씁쓸해집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인간,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 알고자 하는 열망을 쉬이 극복한다는 데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인간에겐 그러한 열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이해하려는 열망은 있지만, 이해하는 데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가설은 완벽하게 아무것도 몰라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능성을 줍니다…… 인간에게 극도로 단순화한 세계 시스템을 제시하고 그 단순화한 모델을 토대로 어떤 사건이든 해석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 없지. 외운 형식 몇 개에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실용적인 사고와 상식이라 불리는 것을 더하면 될 뿐."
노변의 피크닉 p.22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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