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가 마실 커피를 따랐다. 커피는 뜨겁고 진하고 달아서, 지금은 술보다 그걸 마시는 게 더 좋았다. 커피에서 집 냄새가 풍겨 왔다. 구타의 체취. 그냥 구타가 아니라, 가운을 입은 구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아직 볼에 베개 자국이 남아 있는 구타.
노변의 피크닉 p.27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우리 중에 이미 미남으로 불리던 이가 있었는데, 딕슨이란 자로 지금은 땅다람쥐라고 불린다. '고기분쇄기'에 갔다가 어쨌든 살아 남은 유일한 스토커다. 운이 좋았던 거다.
노변의 피크닉 p.29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땅다람쥐의 과거가 여기서 나오는군요. 그가 과거에는 미남이었다니. 참 기구하고도 아이러니한 운명이네요.
그래, 꽤 괜찮은 스토커가 됐을 거다…… 이런 제기랄, 내가 아서에게 미안해하는 건가? 뭐가 미안하단 말인가. 언제 다른 누가 내게 미안해하는 적이 있던가……? 사실 그랬다. 미안해했다. 키릴이 나에게 미안해했다. 딕 누넌이 나에게 미안해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구타에게 마음을 주는 만큼 미안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마 미안해하고 있을 거다.
노변의 피크닉 p.29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러다가 가슴팍에 아직 거의 가득 찬 설명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리고는 광기 어린 기쁨에 휩싸였다. 귀여운 것, 내 사랑.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어가기만 한다면. 이제 조금 남았다. 가자고 레드, 빨강머리. 그렇지, 그렇게. 이제 조금 남았어. 신이고 천사들이고 나발이고. 늪지와 천사장들, 방문자들, 그리고 대머리수리의 영혼 전부 지옥에나 처박히길……
노변의 피크닉 p.30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불에 타 버린 길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20~30미터 정도였지 그 이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겁에 질려 앞을 보지 않고 달궈진 프라이팬 위의 바퀴벌레처럼 지그재그로 기어 왔던 것이다.
노변의 피크닉 p.30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감사해요, 슈하트 씨! 당신이 저를 끌어내 주셨군요." 레드릭은 침묵했다. 이건 또 무슨 거지 같은 말인가. 감사하다니! 너는 나의 인질이 된 거다. 내가 널 구함으로써.
노변의 피크닉 p.30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지나갈 거다, 지나갈 거야. 레드릭은 생각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내 일생이 이러했다. 몸은 똥통에 박혀 있고, 머리 위로는 번개가 치고. 그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노변의 피크닉 p.31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괜한 짓을 하는군. 그가 행복하게 생각했다. 너는 지금 아버지를 상기시키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그런데, 상관없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통증으로 신음했다. 옷이 몸에, 화상 입은 피부에 완전히 들러붙어 이제는 그 안에서 뭔가가 아프게 터졌고, 마른 붕대가 상처에서 떨어져 나가듯 뭔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노변의 피크닉 p.31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한 모금만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슈하트 씨?” 레드릭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가슴팍으로 집어넣어 버리고선 말했다.
노변의 피크닉 p.31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늪지대에 있던 불지옥에서 빠져나왔을 때 처음 걱정한 것 보다는 몸이 훨씬 멀쩡한 상태로 살아 나왔다고 언급하죠. 이때까지만 해도 레드의 화상은 견딜만 했습니다. 그리고 레드는 의도치 않게, 어떤 목적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이유 없이 선행을 하기도 했죠. 버브리지가 싸지르고 간 똥통을 지나갈 때 레드는 태도를 바꿔 모질고 비정한 인간이 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몸에 있던 물집들이 터지면서 몸에 고통을 주죠. 그런데 작가는 굳이 물집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 안에서 뭔가가 아프게 터졌고, 마른 붕대가 상처에서 떨어져 나가듯 뭔가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레드는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모른 척 하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이고, 역겨운 버브리지를 버려두지 않고 살려왔으며, 딸을 위해 그네를 만들었고, 키릴이 좋아할 것 같아 충만한 깡통을 선물로 줄 생각이었던 사람입니다. 행동과 말투가 거칠고 사나우며, 늘 남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불법적인 일로 먹고 사는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임에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도와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레드가 자신과 함께 구역을 지나온 아서를 앞에 두고는 이제 비정해지죠. 출발하기 전만 해도 농담도 주고 받고, 자신이 좋아하는 술도 잘 건네주던 레드는 이제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도움의 손길을 거두고 냉정해집니다. 그 순간 터지고 떨어져 나가 그를 아프게 한 건 물집만은 아닐지도요. 어쩌면 그의 본성 깊은 곳에 있던 선함, 양심, 그의 인간성일지도 모르겠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책의 제목처럼 하몬트로, 그리고 '구역'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피크닉을 다녀오는 기분의 작품이었습니다. 일부러 마지막 몇 장은 남겨뒀다가 저녁 늦게 읽었는데 결말의 비장함에서 전율을 느꼈어요. 마지막 주차의 내용으로 4부와 결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1) 4부는 기존과 달리 제목부터 남다릅니다. 1,2,3부는 레드와 딕 누넌의 결혼 여부나 직업이 소제목으로 적혀있는 반면 4부는 어떤 설명도 적혀있지 않는데요.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시나요? 2) 레드릭은 다가올 일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한편으로는 그를 도와주기도 하고, 또 끝에 가서는 그의 최후를 방관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레드를 어떻게 보시나요? 그는 비정하고 악한 인간이 된 걸까요? 아니면 아직 선함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3) 마지막 장의 열린 결말에서 여러분은 각자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 것이라고 상상하셨나요? 레드는 금빛 구체에 무사히 도달했을 것 같나요? 그가 어떤 소원을 빌었을 것 같나요? 4) 책 전반의 느낀 점과 감상을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저는 이 소설이 선택한 방식의 열린 결말이 마음에 듭니다. 애당초 “구역”의 정체에 대해서는 가설만 있을 뿐이지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배경 및 설정에서 결말이 구체적이고도 뚜렷한 방향으로 제시된다면 뭐랄까 이야기의 결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날 것 같았거든요. 선한 주인공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대상은 역시 가족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소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나 싶네요. 보통 이야기는 주인공이 편안하게 지내다가 갑작스레 나락으로 떨어진 후 개고생을 하다가 이를 극복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소설 역시 초중반까지는 비슷하게 진행되었지만 결말에서 다르게 풀어서 신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아내를 흠모하는, 어쩌면 주인공에겐 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빌런이 될수도 있었던 누넌의 이야기를 따로 빼준 것도 좋은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말에 영화를 보려했는데 다른 책들 읽느라 못 봤어요. 이번 주에 영화를 보며 이 소설의 여운을 느껴보려 합니다.
전 '구역'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방사능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근데 왜 거기에 다녀왔거나 다녀 온 사람들의 자식들의 몸에 이상이 생기냐'는 부분에서...인간의 몸에 이상이 생기게 하는 게 방사능이라고만 생각하는 무지랭이 인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르콥스키의 <스토커>를 찾다가 포스터 이미지를 가져왔어요. 첫번째 그림이 러시아에서의 첫 포스터 같습니다. 책 표지로도 제격이네요. 문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건 방문자일까요, 아니면 구탈린이 말한 악마의 '구역' 그 자체일까요. 언덕 위 세 인물이 누구인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좀 더 현대적인 실사 포스터의 배경사진인데 아마 주변 지형의 분위기를 보니 채석장 같네요.
어제도 두 시간 반짜리 영화 중 한 시간을 보고 잠들었네요. ㅋㅎ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 명이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영화가 소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구역"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은 맞는데 사뭇 차이가 있으므로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감상한다는 기분으로 대하면 될 것 같아요. 영화 시작하고 40분 쯤 되었나 "구역"에 주인공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때까지 칙칙했던 흑백 화면이 화사한 컬러 화면으로 바뀌었을 때 잠깐 놀랐습니다.
아..볼 책도 볼 영화도 너무 많네요! 근데 스토커도 너무 보고 싶네요. 사실 타르콥스키의 솔라리스는 영어 자막 뿐이라 보다가(사실 좀 지루했어요) 포기했거든요. 유튜브 한글 자막 기능 있다는데 그 정도의 열정이 안 생겼고요. 스토커도 열정이 사라지기 전에 꼭 봐야겠어요.
1) 목차의 소제목에서 레드의 직업과 결혼여부를 통해 독자는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질풍노도의 미혼 시기를 거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책임감과 애착이라는 경험을 하죠. 소제목은 단순히 레드의 상태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의 정서적/심리적 배경상황을 알려주는 지표이면서 동시에 그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암시하는 역할도 합니다. 혼자였을 때는 독립적이고, 마땅히 쓸 곳도 없으면서 재물의 축적과 소비를 통한 해소에 매달렸죠. 재밌게도 레드릭이 심리적으로 고립되고 방황하던 미혼일 때는 연구원이라는 고정된 직업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오히려 기혼자가 되어서는 가족이라는 기반을 세우지만 정작 그는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수입이 불안정해집니다. 즉 직업과 가정은 어떤 인간을 정의하고, 그의 가치관과 상태를 확인하는 지표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돌연 4부에서는 이런 수식어가 다 없어져 있습니다. 4부의 전개가 특이한 또다른 점은 레드의 개인적인 과거를 엿볼 수 있는 회상과 독백이 많이 나오죠. 가족이나 주변인물에 대한 묘사가 많던 1,2,3부와 대조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4부를 읽으면서 구타와 레드릭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던 게 아닐까 상상했어요. 아내를 두고도 다른 외간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점, 더이상 가족 얘기나 묘사가 없는 점이 신경쓰였거든요. 어쩌면 구타와 헤어지고 별거를 하고 있거나,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레드는 왜 자신이 금빛 구체를 찾아가기로 동의했는지 물음을 갖는 것으로 4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계속 레드는 여러 상황과 자신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죠. 구역의 특이현상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물들에게 반응만 하던 그의 기존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인지 자문하죠. 레드는 버브리지의 탐욕이나, 쿼터블래드의 간섭, 딸과 아내에 대한 책임감, 구역의 전리품을 원하는 바깥세계의 유혹으로부터 고립되어 자신의 안으로 계속 파고들어갑니다. 구역은 분명 위험하고 살벌한 곳이지만 과연 바깥 세상이라고 해서 거기서의 삶이 구역보다 덜 위험하고 덜 힘들었을까요? 오히려 작품을 보면 레드는 구역 바깥에서 자기 자신의 삶과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심리적 갈등과 제약속에 묶여 꼼짝 못하고 끌려다니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구역은 레드가 도망치고 싶어도 못 벗어나는 모든 사회의 제약과 압박과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피크닉'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부양자로서의 위치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스토커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니까요. 사회가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또 자신의 자아와 근원과 욕망에 대한 답을 찾으러 가는 여정으로서 모든 수사를 빼고 '레드릭 슈하트, 31세'라고만 집어넣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4부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레드가 몽키에 관한 소원을 빌기 위해 금빛 구체를 찾아갈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 하아… 이 작품은 정말 심오하군요. 장대한 철학소설 같기도 하고요. SF문학을 몇권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작품은 참 다르게 다가오네요. 가슴이 꽉 메이고, 결말까지 읽고난 후의 느낌을 어떤 말로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만 레드가 몽키만을 위한 소원을 빌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모든 것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 두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운명, 두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 이 악취 나는 세상의 모든 나사를 바꿀” 소원을 품고 금빛 구체 앞에 나아갔을 거라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그건 ‘구역’의 종말이자, 세상 모든 것의 끝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는 이제 더는 생각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기도를 하듯 그저 절망적으로 스스로에게 되뇔 뿐이었다. "나는 짐승이다. 당신이 보다시피, 나는 짐승이다. 나는 말을 모르고, 나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생각할 줄 모르고, 그 더러운 놈들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그렇게…… 대단하고 전지전능하다면…… 해결하란 말이다! 내 영혼을 들여다보라. 거기에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을 거라는 걸 난 안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내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긴 적이 없으니까! 그건 내 것, 한 인간의 것이다! 당신 스스로 내 안에서 내 소원을 꺼내 보라. 내가 나쁜 것을 원할 리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게 아무래도 좋지만, 그 녀석이 했던 말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 모두에게 행복을 드려요! 공짜로 드려요! 기분 상한 채로 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노변의 피크닉 330-331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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