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부터
모임이 정식적으로 시작되었네요.
본격적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김영사 / 책 증정]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편집자 & 번역가와 함께 읽기
D-29

바닿늘
에디트
1. 실용주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영실 선생님입니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먼저 보고, 문제해결을 하셨죠. 그리고, 실용주의하면 '현학적이지 않다'라는 것과, 실현가능성 이라는 단어도 떠오르구요.
그런데, 실용주의와 관련한 내용에서 29쪽에 과학에 '깊이'란 없다. 어디에나 표면이 있다; 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앞뒤 맥락을 보면,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배제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굳이 깊이가 없다, 표면이 있다. 라는 것을 언급한 보다 명백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김영사
장영실의 과학 정신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에 이르러 그 나름대로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책 만들면서 실용주의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실학사상이 떠오르곤 했답니다. 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말씀하신 29쪽 부분은 인용문입니다. 원문은 "In science there are no ‘depths’; there is surface everywhere"입니다. 말씀하신 문장 바로 앞에 "어두컴컴한 먼 곳과 불가해한 깊이"라는 표현이 있는 걸로 보면 '깊이'는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 너머 숨겨진 궁극적 실재 따위를 이르겠고, 표면은 그와는 다르게, 인간이 실제로 관찰하고 측정하고 개입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 아닐까요?
꼼꼼히 읽고 계시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전대호
지적하신 문장이 빈 학단의 논리실증주의 선언문의 한 대목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은 아니고요. 논리실증주의는 오직 감각 데이터sense data와 형식논리만을 정당한 앎의 요소로 인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오로지 형식논리와 감각 데이터만으로 이루어진 과학이라면 '깊이'가 없는 과학이라고 표현할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키
"실용주의 정신이 권고하는 바는 철학이 삶에서의 다양한 실천으로부터 동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작가의 실용주의가 매우 와닿습니다. '실천에서 효과적'인 견해, "지식과 관련한 좋은 실천들을 이해하고 증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가치가 입증될 생각"들이 어떻게 구체화될지 기대됩니다
전대호
장하석 교수는 자신의 연구를 '상보적 과학complementary science'이라고 부릅니다. 과학을 돕겠다는 뜻을 확실히 밝히는 거죠. 그는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이 과학자를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테이블
1. '실용주의'라는 말을 들 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언제부터인가 정치 담론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래그머티즘과는 조금 결이 다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 봅니다.
2. 지식을 정보의 습득이 아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아는 능력'(knowing how)으로 정의한다면, 암묵지와 비슷한 의미일까요?
3. 작업적 정합성이란 활동의 여러 요소가 목표 달성을 위해 조화롭게 맞물려 '사리에 맞는(make sense)' 상태를 뜻한다는 정의는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요. 다만 "처음에는 엉성했지만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여러 동작이나 조건들이 조율되어 성공했던 경험이나 순간"은 너무 광범위한 얘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국어 서문과 들어가는 말을 읽어보고 있는데, 저자의 진리관이 언뜻 당연한 듯 하면서도(적어도 제 경우에는), 또 여러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어가며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대호
2. 암묵지와 '어떻게를 앎'은 겹칠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 따지면 다르죠. 암묵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앎'이니까 앎의 내용에 있어서는 '어떻게를 앎'일 수도 있고 '무엇을 앎knowing what'일 수도 있잖아요. 다른 한편, knowing how는 암묵적일 떄가 많겠지만 경우에 따라 명시적인 앎explicit knowledge일 수도 있죠. 예컨대 '나눗셈 할 줄 앎'은 얼마든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앎이잖아요.

테이블
예, 설명 감사합니다. 그러면 knowing how이 더 포괄적인, 아니면 좀더 화용론적인(이렇게 얘기하는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려나요.
mariposa
1. 최근 몇 달간 "실용주의"가 개인적 화두였습니다. 나는 학자나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실생활과 문화적 향유의 범위 안에서 쓸만한 사고 방식이 무엇일지를 찾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실용주의로 귀결이 된 듯합니다. 예전에는 실용주의에서 '세속적임'이라는 함축을 읽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더 잘, 가능하면 올바르게 살기 위한 관점으로서 강력한 후보입니다. 다만 내 목적은 진리 추구가 아니고, 책에서 강조하듯 '어떻게 (행위)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나와 아주 잘 맞는 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2. 저도 어떻게 하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일본어를 따로 공부한 경험은 희박한데도(어릴 적에 초급과 문법 정도) 원서를 읽게 됐습니다.
3. 2에서 이어서, 아마도 너무 읽고 싶고 굶주려서 무작정 원서를 사곤 사전과 검색에 의존해 꾸역꾸역 읽다 보니 읽히게 된 거 같습니다. 성취감을 느낄 모먼트는 없었고 하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영어도 읽다보니 읽히면 좋겠네요.

김영사
나와 잘 맞는 책을 만나는 건 큰 기쁨이죠!
전대호
1.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는데,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장하석의 실용주의란 '실천하겠다는 다짐', '어떻게든 해나가겠다는 다짐'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mariposa
지금 궁금한 점은,
내가 원래 품고 있었고 이 책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여긴 "목적을 품은 인간 행동"(52p) 에 유용할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목적론적이라고 볼 수 있는가, 혹은 비판하는 게 타당한가? 라는 점입니다. 목적론이란 말을 이 경우에 쓸 수 있는지도 잘... 여튼 궁금하네요.
전대호
'목적론'이라고 하면 대개 '세상만사가 정해진 목적(종착점)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있다'라는 주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에 관한 견해인 거죠. 목적론의 정반대는 기계적 인과론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첫째 톱니바퀴가 돌아서 인접한 둘째 톱니바퀴가 또 돌고, 그 다음 톱니바퀴도 돌고 하는 식으로, 어떤 목적도 없이 인과관계로 맞물린 사건들이 일어나는 방식으로 세상만사가 돌아간다는 견해 말입니다.
그러니 목적을 품은 인간 행동의 맥락 안에서 앎을 고찰하겠다는 장하석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일단 '목적론'과 거리가 멉니다. 실용주의는 목적론이나 기계적 인과론 같은 거창하 보편적 세계관을 배척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늘 목적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앎은 그런 삶의 맥락 안에서만 유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장하석은 목적을 중심으로 사고한다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이건 앎을 인간화하는 것이지, 무슨 거창한 목적론을 펴는 것이 아닙니다.
mariposa
역시 달랐군요. 감사합니다. 철학 용어들에 익숙지 않아서 소박하게 의문을 떠올리고 맙니다. 새삼 번역자분과 소통할 수 있어서 좋네요. ◠ ̫◠
에디트
@전대호 '과학에 깊이란 없다. 어디에나 표면이 있다'는 것이 사실 저에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보통 학문은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장하석 교수님은 오히려 그 '불가해한 깊이'보다는 우리가 접촉가능한 표면들의 연결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뜬금 없을지 모르지만, 제가 평소 관심두고 생각해온 에디트 슈타인의 현상학을 떠올렸습니다. 현상학 역시 '사물 자체로 돌아가라'라는 것을 표상하고,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 그 자체를 정직하게 응시할 것을 말하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실례가 안된다면, 번역가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표면의 과학철학을 현상학이 추구하는 현상으로의 회귀를 과학적 활동의 영역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아도 될까요? 혹은 번역과정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사유에 대해서 감지하신 부분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전대호
'과학에 깊이란 없다'는 말은, 과학이 개별 경험을 뛰어넘는 어떤 거창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싶어요. 바꿔 말해 '깊이'를 배척한다는 말은 '형이상학'을 배척한다는 뜻이겠죠.
노이라트 등의 논리실증주의선언에 담긴 '깊이' 배척 정신과 현상학의 '사태 자체로' 구호는 그렇게 형이상학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 뚜렷한 차이도 있는 듯해요. 빈 학단은 과학지식이란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는 반실재론적 입장으로 기울거든요. 반면에 현상학, 특히 후설은 확고한 실재론자고요. '우리는 앎을 통해 우리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와 접촉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양쪽의 대답이 갈릴 듯합니다. 빈 학단은 '아니다' 또는 '접촉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듯해요. 반면에 후설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장하석의 대답일 텐데, 그것도 단연코 '그렇다'입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이 실재론이고요. 얼핏 보면 장하석의 입장이 과학적 진리를 도구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텐데, 그건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아조씨
“ 어떤 단어가 부정적 함의들로 너무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 단어의 오용과 남용을 교정하려 부질없이 애쓰는 대신에 간단히 그 단어를 버려야 할 경우가 때때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 기에 '실용주의'라는 용어는 버려지지 않고 변호되고 향상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진리', '실재'도 마찬가지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26~27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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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우리나라에도 정치 현실 때문에 오염되었던 좋은 단어들이 꽤 있었죠. 예컨대 민정당 때문에 "민주"와 "정의"가 상당히 외면당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정의당"이 생겼을 때 저는 그 명치에 고개를 갸웃거렸었지요. 하지만 "정의"라는 좋은 단어를 버리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은 짓이죠. 장하석의 대응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조씨
맞습니다. 좋은 단어들은 응당 그래야 할 텐데, 저는 다시 이 부분을 보다보니 저자가 앞서 언급한 "버려야 할 경우"가 외려 궁금해졌어요. 어떤 말들이 있을지 잘 떠오르지 않는데, 역자 선생님과 여러 동지들의 고견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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