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리스크다"라는 문장을 어딘가에서 인상 깊게 읽은 것이 기억납니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면,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삶의 불확실성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은 삶이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한 듯해요.
[김영사 / 책 증정]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편집자 & 번역가와 함께 읽기
D-29
전대호

아조씨
불확실성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불확실성이 삶이 흥미로운 이유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조씨
“ 우리는 테레사 수녀가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높은 정도로 자비로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존 F. 케네디의 자비로움과 프랭클린 루즈벨트 의 자비로움을 명확히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업적-정합성에-의한-진리성은 이 후자의 사례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처럼 진리성이 아름다움, 정의로움, 자비로움 같은, 삶에서 중요한 다른 덕목들과 유사하다는 점은 어쩌면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일일 것이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68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문장모음 보기

아조씨
“ '진리임'이 질이라면, '거짓임'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 숙고하다 보면 흥미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매우 초보적인 나의 견해를 밝히자면, 과학철학을 위해서는 '진리임'과 '진리 아님'이 여전히 상호 배제적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이는 단지 '아님'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진리임' 자체가 질적인 개념이라면, 이 행마는 그리 유용하지 않다. 또한 '거짓임'에 ' 진리 아님'보다 더 흥미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법하다. 어떤 명제에 의존할 경우, 그 명제가 기존 활동의 정합성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나는 그런 명제에 부여할 수 있는 거짓임 개념이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69~370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문장모음 보기

아조씨
글들이 안 올라오네용 ㅎㅎ 어떻게들 읽고 계신지 궁금..

아조씨
“ 나는 많은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많은 정합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는 그런 만 큼 진리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유신론자들은 이처럼 단서가 붙은 진리성을 거부할 성싶다. 아냐, 신이 존재한다면 절대적으로 존재해! 그렇다면 살면서 수행하는 어떤 활동이든지 신의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정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관건인 셈이고,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일 천국이라고 불리는 높은 곳에 살면서 모든 이의 기도를 경청하는,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이 우리가 말하는 신이라면, 나의 대답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설령 더 합리적으로, 전능하며 더없이 자비롭지만 웬일인지 인간의 삶에서 온갖 악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는 궁극의 존재가 신이라 하더라도, 나의 대답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에 일부 사회들이 잘 만든 신 개념에 기초하여 정말로 포괄적이며 정합적인 삶의 방식을 실제로 고안할 수 있다면(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그럼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88~389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문장모음 보기

김영사
https://share.google/VH8QSGydMbJcb5dpd
이 책을 주제로 작년에 나온 논문이 있군요! 한경국립대학교 브라이트칼리지 이정민 교수의 <장하석의 실재론, 조작적 정합성, 과학의 진보>라는 논문입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기 전인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여우는
진도가 좀 늦어 이제 막 3장을 다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경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실재'를 논하려면 반드시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실재에 대한 "무언가의 존재와 속성들에 의존하는 작업적으로 정합적인 활동들이 있는 만큼 실재한다"는 정의 자체에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엿볼 수 있고요.
- 무언가가 실재하느냐는, 그 무언가가 촉진할 수 있는 정합적 활동들이 있느냐에 달려 있지, 현재 우리의 인간 공통체가 그런 활동들을 ... (p.224)
- 정의는 입법의 성격을 띠기 때문 (p.268)
- 사회적 공동체도, 개인들이 상호 연결을 통해 변화하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다 (p.311)
또한,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출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 자기 이외의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 그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심오한 형이상학자들은 어쩌면 나 홀로 무인도에 내던져 있더라도 저 너머의 세상에 실재들 전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고고한 형이상학자'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아니면 진리에 신성함을 과도하게 부여해, 진리는 한낯 인간 따위의 정신에 의해 틀 지어진 것과 동 떨어져야만 한다는 종교적 사고 방식일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드네요.
전대호
직감으로는 장하석의 '실재' 가 성립하면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여우는 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말씀이 옳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전대호
직감으로는 장하석의 '실재' 가 성립하면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여우는 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말씀이 옳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만약에 '작업적 정합성을 띤 활동'이 여러 사람의 참여를 반드시 요구한다면, '실재'도 여러 사람이 있어야만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터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지 의문이네요.
예컨대 "내 앞에 놓인 땅바닥"을 생각해봅시다. 내가 전진하는 것을 포함한 온갖 정합적 활동(행진하기, 조깅하기, 자전거 타고 전진하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기 등)은 1)그 땅바닥의 존재에 의존하고, 또 2)그 땅바닥이 나를 떠받치기에 충분할 만큼 굳건함에 의존할 텐데, 그런 활동 중에는 여러 사람의 참여가 필수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단 한사람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당장 제가 든 예들은 저 혼자서도 정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활동으로 보입니다.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인용하셨는데, 이 말을 받아들이려면, 여러 전제를 수용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런 전제 없이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어쩌면 여우는 님은 "실재함"을 "여러 사람이 참과 거짓을 따지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등장함" 정도로 간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견해고, 이 견해를 바탕에 깔면, 여러 사람이 있어야만 실재성이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여우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실용주의적 과학철학은 '실재' 혹은 '실재함을 앎'에 대하여 가치중립적이지는 않은 것인가. 더 나아가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인가? 또한 이 책에서 말하는 실재 개념은 '결과적 성취(=즉, 정합성 높은 활동의 성취)'가 수반될 수 밖에 없는 개념인가?
- "우리의 앎은 우리가 더 많은 정합적 활동들에 종사할 수 있게 되고 정합성이 더 높은 활동들에 종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성장한다." (p.247)
- "실재로부터 배우는 바를 극대화하겠다는 결심" (p.252, 바로 다음 장에서 '이 정의는 실수였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 "나는 정합적 활동들을 지원할 좋은 존재론들을 세우는 일을 실용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간주한다." (p.254)
정합적 활동들을 촉진하는 여러 개념들 중에 사회에 해로운 것들도 많습니다(ex. 가짜뉴스, 프로파간다, 극단적 정치 활동, 시오니즘, 마녀사냥, 가부장제 ...) 물론, "도덕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가 경험적 영역에 속하는가는 논란이 많은 질문이며, 나는 여기에서 이 질문에 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지만(p.324), 오히려 저는 바로 그 점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이상, 정신에 의해 틀 지어지고 정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개념들 가운데 위와 같이 이 사회에 해로운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합적 활동을 수행하는 범위 내에서는 실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가치적으로 충돌하는 여러 개념들은 서로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는 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을까요?
인간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여러 충돌하는 가치들 가운데 더 보호해 주어야 할 것을 선택해야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도덕이나 인문학 혹은 정치의 문제이니 이 책의 논의 범위가 아닌 걸까요? 하지만 작업적-정합성에-의한-진리를 상정해야 하는 이유로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진심 어린 관찰 보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기초하여 우리가 작업적으로 정합적인 활동들을 아주 많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p.327)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질서있는 작동을 위한 법과 규범의 존재 역시 1차적 진리와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좀 두서 없긴 하지만, 온도나 산(acid)의 예시처럼 국소적이고 특정한 과학 개념에 관한 작업적-정합성에-의한-진리는 이해가 잘 되는데, 이를 넘어 더 넓은 범위에 적용해 이해해보려니, 정리되지 않은 여러 의문들이 마구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영사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이미 읽으셨거나 읽게 되시겠지만, 아래 부분들이 혹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까요?
명백히 비진리인 이론(예컨대 마법)도 작은 영역 안에서는 충분히 잘 작동하는(정합적 활동들을 지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이론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 영역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더라도 그릇된 것 같다. 이 문제는 4.4절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질 테지만, 우선 나의 견해를 밝히자면, 이 반론의 바탕에 깔린 것은 불필요한 두려움이다. 좁은 영역 안에서라고 한정하더라도, 마법 이론에(또는 기후변화 부정, 백신 거부, 어린-지구young-earth 창조론, 평평한 지구 우주론 등에) 진리성을 허락하는 것을 꺼려야 할 이유들이 있다. 실제로 마법 이론은 어떤 영역에서도 작업적으로 정합적인 활동들을 떠받치지 못한다. 마법 이론이 특정 영역에서 잘 작동했다는 주장은 심한 과장이다. _332~333쪽
진리의 다원성과 비절대성이 막돼먹은 혹은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아서 파인이(2007, 64쪽) 말하는 ‘멍청이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님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실천 시스템 안에서 작업적-정합성에-의한-진리는 우리의 바람이나 기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렇게 정신에 의해 틀지어지지만 통제되지 않는 진리의 다원성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_334쪽
주어진 진리는 어떤 진리든지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명심하는 것은 내가 ‘효과적인 거짓 믿음에 기초한 반론’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4.1절에서 나는 이 반론을 ‘마법 반론’이라는 덜 냉철한 이름으로 불렀다)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반론은 아주 간단하다. 주지하다시피 때로는 거짓인 믿음이 성공을 가져온다. 따라서 진리와 성공(더 정확히 말하면, 성공을 일으키는 요인)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반론의 요지다. 같은 유형의 반론을 나의 진리 개념에도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마녀의 실재성과 신의 다양한 속성을 비롯한 온갖 주제를 다룰 때 사람들은 거짓 믿음에 의존하여 작업적으로 정합적인 활동들을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지구가 평평하다는 견해에 기초하여 매우 정합적인 활동들을 많이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가 평평하다는 명제가 진리인 것은 확실히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유형의 사례 앞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정합적인 평평한-지구 활동들은 지구 전체가 아니라 지구의 국소적 구역이 평평하다는 견해에 의존하며, 이 견해는 충분히 진리다. 즉, 이 견해를 진리로 인정해도 해로울 것이 없다(Teller 2021, S5023쪽, 각주 20 참조). _364~365쪽
내가 짐작하기에 많은 독자는 이제껏 제시한 나의 견해를 접하고 상대주의를 우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것의 부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의 상대주의가 그리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진리에 관한 나의 견해들이 함축하는 바는 상대주의적이라기보다 다원주의적이다(Chang 2020b). _372쪽

김영사
질문하신 내용에 딱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물은 H₂O인가?> 546쪽부터 시작되는 내용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책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문장인(ㅎㅎ) 아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미친 놈들은 어떻게 막을 거죠?”
한 부분 인용해볼게요.
"무수한 사람들이 창조론이 설득력 있다고 느끼는 것에는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다. 그렇게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그들을 설득하여 그 느낌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을 시도하라. 그 느낌은 광기에서 비롯된 집단 망상이라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정신의학에 입문하라! 더 그럴싸하고 창조적인 제안은 이것이다. 창조론자들의 생각은 검증 불가능하다는 주장만 되풀이 하지 말고, 창조론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의 생각을 검증할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안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550쪽)
전대호
제 여우는 님의 취지를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생각과 논의를 좀더 치밀하고 정밀하게 펼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정합적 활동들을 촉진하는 여러 개념들 중에 사회에 해로운 것들"이 있다고 지적하시면서 "가짜뉴스, 프로파간다, 극단적 정치 활동, 시오니즘" 등을 예로 드셨는데,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컨대 가짜뉴스가 정합적 활동들을 촉진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은 매우 위험하다"라는 가짜뉴스가 촉진하는 정합적 활동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그런 정합적 활동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 가짜뉴스를 철석 같이 믿고 백신 접종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어떤 활동을 시도한다면, 그 활동은 저의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아예 불가능해질 위험에 노출된 활동일 테고 따라서 정합성이 그리 높지 않을 터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거짓을 참으로 믿으면서 수행하는 활동이 정합성을 띠는 상황은 일시적으로, 또는 국소적으로만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짜뉴스에 휘둘려 사회적으로 해로운 활동을 하는 경우는 당연히 있습니다. 심지어 숱하게 있지요. 그런데 그런 활동이 과연 정합적인지 의문이네요.
혹시 여우는 님은, 가짜뉴스를 유포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는 악한 선동가의 활동이 정합적이라는 생각을 하시는 걸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이건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백신은 매우 위험하다"라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선동가 본인은 필시 그 가짜뉴스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의 활동이 더 높은 정합성을 띨 테죠. 만약에 선동가 본인이 그 가짜뉴스를 믿는다면, 그의 활동은 정합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우는
4장 도입부에서 '진리의 성립'과 '믿음의 정당화'를 소개하는데요.
'나의 모든 고양이는 검다'의 진리성에 대한 예시(p.322)에서, 보르헤스의 <픽션> 중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편이 떠올랐습니다.
화자에게 그의 친구 카사레스가 '우크바르'라는 지명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영미백과사전 제46권에서 읽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화자의 집에 있는 똑같은 백과사전 46권에는 그 내용이 전혀 없었어요.
다음날 카사레스가 자신의 집에 있던 백과사전을 가져와 보여줬는데, 두 책은 출판 연도, 목차, 판형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똑같은 책이었는데 카사레스의 책에는 우크바르에 대한 설명이 적힌 4페이지 분량이 더 붙어 있었어요.
이 경우 우크바르라는 지역이 있다는 명제는 진리일까요? 이 명제를 진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이 믿음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4장에서 진리의 성립과 믿음의 정당화를 읽으면서 우크바르에 대한 백과사전 예시를 대입해서 읽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4장도 기대가 됩니다.ㅎㅎ

김영사
책 만드는 입장에서 가벼이-죄송합니다; 말씀드리자면... 파본이군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김영사
안녕하세요. 모임지기입니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함께 읽기, 벌써 마지막 화제를 등록할 시간이네요. 4장은 '진리' 개념을 다루었습니다. '진리'는 완벽하고 영원한 것인가, 충분히 좋은 것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파트였습니다. 5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 '지식' '실재' '진리'의 새 개념을 바탕으로 저자의 '행동하는 실재주의'를 주창합니다. 짧지만 가슴이 웅장해지는 맺음말과 애정 가득한 '옮긴이의 말'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5차: 4월 25일(토)~4월 29일(수)_ 5장 실재론~맺음말, 옮긴이의 말
4월은 30일까지건만 그믐은 29일이 모임의 최대 기간이라, 4월 29일에 저희 모임은 끝납니다. 물론 책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언제든 찾아 펼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들입니다. 아래 질문에 자유롭게 답해주세요. 부디 이 책이 여러분에게 어떤 위로와 용기를 주었기를 바라봅니다.
1. 저자가 제안하는 ‘행동하는 실재주의’는 우리가 믿는 바에 만족하며 머무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 '과학'이나 '앎'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2. 이 책을 읽은 후 여러분은 스스로가 이전보다 더 '현실적인realistic' 사람이 되었다고, 혹은 그래야겠다고 느끼시나요?
3. 역자 전대호 선생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의 논의를 멋진 춤에 비유했습니다. 4월 한 달간 이 어려운 춤을 함께 추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스텝(문장이나 개념)은 무엇이었나요?
4. 맺음말에서 저자는 미국의 졸업식을 뜻하는 'commencement(시작)'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이 책의 끝이 새로운 탐구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이 책을 접하고 새롭게 탐구하고 싶은 질문이나 분야, 읽어보고 싶은 책이 생겼다면 공유해주세요.

바닿늘
N
1.
얕게 아는 수준이지만.. 칸트 철학을 배우며 저 스스로가 관념론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번에 '실재론 VS관념론' 요런 구도 조차도 이분법적 사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소득입니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또 알게된 느낌도 듭니다.
2.
아주 아주 조금이나마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된 거 같고, 이 표현보다.. 현실적으로 방향이 바뀐듯한 느낌도 듭니다.

우주먼지밍
N
1. 최근에 읽어온 책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세상에서 절대적 앎은 없다고들 말합니다. 최근에 과학의 역사와 관련하여 배운 멋진 표현으로 "폐기된 이론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한때 탄탄한 이론이었으며 진리로 여겨졌던 것들이 폐기되면서 인간의 앎이 계속하여 확대되었다구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이론들이 폐기될까요? 지금은 여전히 어렵고 신비로운 양자의 세계도 후손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양자이론 또한 폐기될 수도 있겠지요.
2. 네! 저는 '가차없는 경험주의가' 되고자 다시 한번 결심했습니다.
최근의 저는 그 어떤 분야(과학/철학/사회학 등)의 글을 읽어도 제 회사의 문제와 연관하여 읽곤 합니다. 제가 속한 조직은 현재 안팎으로 거센 비판을 받고 있어요.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 우리 조직이 너무나도 관계 기관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모사고 있으며, 때때로 현장과 유리된 방침을 세운다고들 합니다. 저는 아주 낮은 직급의 사람이지만... 그 어떤 사안에 있어도 현실적인 사안을 풀어갈 수 있는 실용적인 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3. " 우리는 경험을 감각지각의 내용을 서술하는 명제들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관찰, 실험, 경험적 증거의 본성에 관한 통상적인 견해를 중대하게 업데이트하고 다시 생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있다."(128쪽)
" 궁극적으로, 우리가 유일하게 보유한 배움의 원천은 인간의 본성에 의해 조형되는 인간적 경험이다." (129쪽)
읽으면서 인덱스를 엄청나게 붙였어요. 그중에 제 미숙하고 어설픈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즉 과거를 반성하게 해주는 문장을 골랐습니다. 도저히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고를 수가 없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는 '집-학교'였고, 직장 생활을 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 이 기간 동안은 '집-회사'였어요. 이제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조직생활을 하면서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제가 속한 조직에서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 없더라고요. 조직의 규범에 순응하고 조직문화에 저를 끼워 넣어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름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전혀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경험이 쌓이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조직에서 겪는 온갖 것들을 읽으면서 해소하는 편입니다. 우리 조직의 고질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왜 우리는 바보가 되어가는 것인지...
제 배움이 느린 이유는 결국 경험이 미천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고통을 종류별로 겪어야 할까... 그러나 이것이 배 움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으로 저는 하루를 더 버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험이라는 단어 앞에 괄호를 묶어야 한다면, " (실패와 고통에 기반한) 경험이에 말로 진정한 배움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4. 저는 너무나 무지한 사람이고, 습득하는 속도는 매우 느립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읽고자 하는 욕구는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접하고 나서 장바구니에 담은 책은 윌리엄 제임스의 <아픈 영혼을 위한 철학>입니다. 원래도 사려고 했던 책인데 얼른 주문해야겠습니다.
전대호
N
경험이 실패 및 고통과 결부되어있다는 우주먼지밍 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주의자가 되기가 실은 어렵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경험이란 게 무슨 즐거운 체험 활동일 수도 있지만,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경험은 뼈아픈 배움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왜 운동선수들이 말하기를, 진 경기에서 더 많이 배운다고 하잖아요.
경험의 아픔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 헤겔을 꼽을 만합니다. <정신현상학>에서 제가 인상깊게 기억하는 대목 하나는 '죽음을 마주하는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헤겔의 글이 늘 그렇듯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지만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어쩌면 어떤 경험이든지 진정한 경험이라면 '죽음을 마주하기'라는 끔찍한 성분을 많거나 적게 함유하기 마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의식[생사를 건 싸움에서 무릎을 꿇고 노예의 역할을 맡은 자]은 [무릎을 꿇던 순간에] 자기 안에서 전율했고, 이 의식 안에 고정되어있던 모든 것이 떨었다. 이 같은 순수하고 일반적인 운동, 모든 존속의 절대적 유동화야말로 자기의식의 단순한 본질, 절대적 부정성, 순수한 자기를 마주함이다."
죽음의 순간이 닥쳐 눈앞이 캄캄해질 때, 반석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녹아내릴 때, 그때 비로소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는 얘기 같죠?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경험이란 것이 자기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장하석 교수가 모국에서 철학자로서 더 많이 알려지고 회자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