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는 나중에 입장을 바꾸게 될까봐
입장 자체를 내지 않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합니다.
[김영사 / 책 증정]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편집자 & 번역가와 함께 읽기
D-29

바닿늘

여우는
최근에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영화 및 책으로 접하였는데요. 그 스토리는 우리책 p.53~54의 '탐구는 환경에 대처하는 유기체의 필수 활동이며 삶의 모든 곳에서 이루어진다', '과학의 목표는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지구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 해 우주로 유인탐사선을 보낸다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그레이스와 로키가 과학적 탐구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능동적 앎"의 훌륭하고도 감동적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그레이스와 로키는 서로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감각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소통하는 법을 깨우치는데, 이를 통해 '어떻게를 앎'이 명제적 지식에 선행하며, 그러한 명제적 지식이 어떻게 능동적 앎에 의존하며 또한 기여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영사
아, 저는 아직 못 봤는데, 저희 책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나 보네요! 기회가 닿으면 한번 봐야겠습니다.

아조씨
“ 그렇다면 우리는 무한 층의 동굴 시스템 안에서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운명일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있는 동굴 바깥의 동굴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로 우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안쪽 동굴에서 벗어나기를 실천하면서 바깥쪽 동굴을 낳는다. 우리는 이 동굴을 둘러싼 또 다른 동굴을 창조하지 않으면서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동굴을 만드는 마이더스의 왕이다. 우리가 가는 모든 장소는 동굴의 내부로 바뀐다. (이쯤 되면 내가 플라톤의 비유를 변형하다 못해 해체한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166~167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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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저도 참 재미있게 읽은 대목입니다. 동굴 바깥으로 나가 직접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이런 장하석의 얘기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얘기에 충분히 공감하는데, 그건 제가 마주하는 진실은 늘 진실의 일부일 따름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위치로 옮겨가더라도 저는 진실의 다른 일부만 보게 되겠죠.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 대한 통속적인 해석에서 말하는 "동굴 바깥으로 나가기"를 제 나름대로 표현하면 "진실 전체를 마주하기"쯤 될 듯합니다. 저는 진실을 그렇게 온전히 마주하거나 움켜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굴 바깥에는 또 동굴이 있다는 장하석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요.
우리 각자가 무한 층 동굴 시스템 안에 있다는 결론은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일까요? 오히려 정반대로 그 결론은 우리를 진지한 대화로 이끄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내가 동굴 안에 있다는 것, 동굴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벗어난 다음에도 또 한없이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끝내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기꺼이 자기를 수정할 터입니다. 쉽게 말해서, 배우고 또 배울 터입니다.
완성은 없습니다.
MㅡM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어요. 진리를 추구해 이 동굴을 빠져나가고, 그 진리로 만들어진 동굴 안에서 또 다른 진리를 추구하고. 세상이 어떤 규칙으로 움직인다는, 그 규칙을 찾고야 말겠다는 게 과학자들의 동기겠지만, 그렇게 완벽한 규칙은 찾을 수 없다, 지금의 규칙일 뿐이라는 게 고무적입니다. 지금의 규칙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만 다음 동굴로 넘어가는 퀘스트를 깰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동굴은 또 각자의 동굴일테고요. 언어와 이런저런 한계들까지 다 포함해서 설명해주시는 게 재밌습니다.

김영사
네, 이런 부분이 장하석 선생님 책을 읽는 재미인 것 같아요. ㅎㅎ
전대호
동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저는 색안경을 벗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변형해서 곱씹었던 적이 있습니다. 왜, 각자의 관점에서 실재를 본다는 것을 각자의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색안경을 벗을 길은 없다면, 끊임없이 색안경을 바꿔 쓰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이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장하석이 해석하는 동굴 비유와 꽤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아조씨
“ 우리 자신이 선 자리에서 사물들을 보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음을 겸허히 인정하자. 그 자리가 현재 우리가 갇혀 있는 동굴이건, 자랑스럽게 발 디딘 봉우리건 간에 말이다. 모순적인 '어디도 아닌 곳에서의 관점'을 추구하는 것은 부질없다.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우리가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그림을 '실재'로 간주하자.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231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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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어디도 아닌 곳에서의 관점'은 'view from nowhere'의 번역입니다. 원문의 저작권자는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이에요. 같은 취지로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은 '신의 관점God's Eye View'를 언급했지요. 이 두 사람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국 철학자로 꼽을 만합니다.

여우는
먼 옛날 인간들은 사냥감이나 자연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칭하는 방식으로 소통했을 것이고, 갓난 아기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세상을 배워나가죠. '저것은 이렇게 부르자'가 '이렇게 불리우는 저것이 있다'가 되고, '이렇게 불리는 것들의 원형(누메나)가 존재한다'가 되는 식으로, 선형상화의 오류 및 대응실재론 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가짜대응이든 간에 말이죠).
실재는 인간 정신에 의해 틀지어져 표현됨으로써 재현된다는 주장에도 공감이 됩니다. 쿠키커터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어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외계생명체인 로키는 시각이 아니라 음파로 세상을 인지합니다. 따라서 그레이스 박사가 동그란 벽시계를 보여주는 것은 로키에게 아무런 의미나 정보가 없습니다(반죽된 쿠키 도우 상태). 그래서, 시계의 숫자를 요철이 튀어나오도록 다시 붙여서 보여주자 로키가 그 동그란 물건이 시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시계를 가져와 보여줍니다(쿠키 커터를 거쳐 모양이 생긴 상태). 그들은 각자의 시계를 "시간"이나 "수"라는 누메나와 각각 대응 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페노메나적 시계끼리 대응시킴으로써 이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실용주의 과학철학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철학을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다'는 주장인 것 같아요. 정신에 의해 틀 짓는 사유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실재 개념을 이상화하거나 인간을 동굴 안에 같힌 죄수로 격하하지 말자. 흥미로운 2장이었습니다.

김영사
여우는님 말씀들 보고 저도 <프로젝트 헤일메리> 보려고 예매했어요! ㅎㅎ 2장을 잘 읽어주신 듯해 저도 기분이 좋네요!
전대호
지칭(가리키기)과 이름이 언어적 소통의 출발점이었으리라는 추측은 꽤 그럴싸하지만, 어쩌면 허점이 있는 듯합니다. 과연 어떤 서술description과도 무관한 순수 지칭이 있을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런 지칭에 쓰이는 단어가 '저것' 또는 '이것'일 텐데, 이런 단어들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순수 지칭이 엄연히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우선 실재의 개별화부터 간단한 문제가 이닙니다. 제가 '여우는' 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것'이라고 말하면, 더 나아가 이름을 붙여 '여우는'이라고 부르면, 저는 '여우는'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개인을 가리키고 지목하는 것일까요? 만약에 제가 코의 모양에 몰두하고 있는 관상학자라면, 그 상황에서 제가 말하는 '이것'은 여우는 님이 아니라 여우는 님의 코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제가 피부색에 몰두하고 있는 화가라면, 제가 말하는 '이것'은 여우는 님의 얼굴 색의 미묘한 색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제가 저 멀리 우뚝한 산을 가리키며 '이것'이라고, 또는 '지리산'이라고 발화한다고 해봅시다. 제가 먼 산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또 산을 명확한(또는 대충 그을 수 있는) 경계선을 가진 개체로 간주하자는 암묵적 규칙을 전제하지 않으면, 제가 말하는 '이것'이나 '지리산'을 옳게 이해할 길이 없을 터입니다.
콰인의 '가바가이' 얘기가 이와 비슷한 취지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지칭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터입니다. 그 인정은 이른바 서술주의descriptionism로 나아가는 중요한 한걸음일 테고요.
최초의 소통에 관한 논의는 어차피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저도 나름의 이론이 있습니다. 저는 최초로 발화된 언어가 당연히 감탄사였다고 추측합니다. '으악!', '와!' '아이쿠!' '끼야호!' 등이 인류의 조상이 내지른 첫 마디였을 것입니다. 이런 발성이 복잡한 암묵적 규칙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을 테고, 그런 소통이 한참 무르익은 뒤에야 지칭이 작동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선형상화의 오류 및 단순소박한 대응실재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세음
“ p.49) 앎에 필수적인 행위자는 온전하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개인이다.
p.53) 경험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에 의해 채택된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p.54) 과학의 목표는 진리 그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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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온전하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개인'이 앎의 주체라는 얘기는 한편으로 당연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앞서 '어디도 아닌 곳에서의 관점'이라는 표현의 출처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얘기는 바로 그런 관점에 대한 배척을 함축합니다.
저는 훌륭한 원로 물리학자 한 분을 아는데, 그분은 물리학자의 관점을 '외계인의 관점'으로 규정하곤 했습니다. 마치 머나먼 별에 사는 외계인이 지구를 살펴보듯이, 초연하기 그지없는 관점에서 물리학을 탐구해야 한다는 뜻이었죠. '어디도 아닌 곳에서의 관점', '외계인의 관점', '신의 관점', 다 비슷한 태도를 뜻하는 표현일 텐데, 그런 초연한 태도가 과연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등의 질문이 절로 떠올라야 마땅합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우주로의 망명cosmic exile'도 있습니다. 우주로의 망명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철학자는 콰인Quine이고요.
흔히 과학자들은 소위 '객관성'을 성취하려면 그런 초연한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입니다. 객관성은 그렇게 쉽게 획득되지 않습니다. '온전하고(감정과 욕망 등을 두루 갖춘) 구체적이며(신체를 갖고 살아가며) 역사적인(물려받은 바를 출발점으로 삼는) 개인' 곧 특정한 맥락 안에 있는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하는 연구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도달할 수 있고, 오로지 그런 개인만이 진정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부터는 까다로운 철학적 논의가 되겠지만요.
아무튼 장하석은 그런 구체적인 개인이 과학의 주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세음
“ p.75)철학과 과학에서 우리는 문답이라는 2인칭 상호작용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질문과 대답을 거론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논쟁하기와 논증의 결별 그리고 정당화를 네가 나를 설득하기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p.137) 나는 실용주의가 진정으로 경험주의적인 과학철학이라고 보는데 그런 과학철학은 과학 탐구도 인간적 경험의 일종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정해야 한다...탐구가 경험과 맞물려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탐구과정 자체가 경험의 한 유형이다.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는 배우기 경험으로부터 배우기를 포함한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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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과학을 삶이라는 맥락 안에 넣고 고찰하려는 태도가 돋보이는 대목이죠. 저는 이것이 과학을 생산적으로, 또 올바로 보는 태도라고 평가합니다.
사실은 철학책을 읽을 때도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철학책의 저자가 모종의 상대와 논쟁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책속의 논증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불멸의 철학 고전으로 자리잡은 것이기도 해요. 물론 대화라는 형식에서 그 작품들의 위대함이 모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요.
더 나아가, 무엇이든지 더 큰 맥락 안에 넣고 고찰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제기해볼 만합니다. 외톨이 개체 따위는 아예 없고,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더 큰 무언가의 일부이거나 더 큰 공간(맥락, 환경, 관계망network...) 안에 들어있다(심지어 내장되어있다 = 뗄 수 없게 붙박여있다)는 식으로요.
제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저서를 여러 권 번역했는데, 그 독일철학자는 그런 공간을 '센스장field of sense'이라고 부릅니다. 독일어로 Sinnfeld인 이 중요한 용어를 이제껏 출판된 번역서들에서는 '의미장'이라고 옮겼었는데, 곧 나올 책(원제는 <Sense, Nonsense, Subjectivity>)에서는 '센스장'으로 옮길 것입니다.
아무튼 무엇이든지 그것이 속한 맥락을 함께 고려하면서 다뤄야 한다는 것은 매우 보편적이고 유익한 가르침이지 싶네요.
세음
“ p.143) 진술은 진술과 비교되지, 경험과 비교되지도 않고 세상과 비교되지도 않으며 다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따라서 진술-세상(또는 이론-세상) 대응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초적인 범주오류를 범하는 듯 하다.
p.145) 나는 정신에 의한 통제control와 정신에 의한 틀짓기framing를 구별하자고 제안한다. 타당한(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실재론적 직관은 단지 생각만으로는 실재가 어떠한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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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인용하신 143쪽 대목은 장하석이 아니라 노이라트의 말이군요. 꽤 수긍할 만한 말입니다. 장하석은 이 말에 거의 동의하는 듯하고요.
하지만 저는 약간 주저하는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진술-진술 대응만 인정하면, 소위 진리정합론, 곧 진리에 관한 정합이론을 채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하석은 1차 진리와 2차 진리를 구별하고 비교적 덜 중요한 2차 진리에만 진리정합론을 적용함으로써 저의 우려를 불식합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행마라고 봅니다.
진리정합론의 문제는, 진리를 오로지 진술의 영역 안에 가둔다는 점에 있습니다. 앞뒤가 맞는 말이라면 다 진리라는 식의 무책임한 얘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거죠. 거듭 말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장하석의 대응은 1차 진리, 곧 작업적 정합성에 의해 정의되는 진리를 기준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진술의 영역 바깥과의 접촉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전대호
framing of mind, 또는 mind-framing을 '정신에 의한 틀짓기'로 번역한 것에 나름의 자부심을 느낍니다. 물론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순리에 따른 번역이지만요. '틀짓다'가 국어사전에 있으면 좋겠다 생가하며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더군요.
여담이 지만 저는 '정신의 틀짓기'라는 표현을 썼더랬는데, 저자는 그 표현이 '정신을 틀짓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다면서 '정신에 의한 틀짓기'로 명료화하자고 했습니다. 명료한 것은 좋은 것이므로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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