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관과는 충돌하지만, 우리의 감각이 제한적이고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저장의 주강이 현실은 더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는 아직 잘 못했지만)
2. 우리의 인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와 비슷하게 모든 대상물이 이상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만, 실재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아직까지는 양자역학 한계까지 활용하는 기술은 나오지 않았지만 향후에는 분명히 기술적 도약이 나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김영사 / 책 증정]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편집자 & 번역가와 함께 읽기
D-29

마키아벨리1

아조씨
일정에 따라 3장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심오한 형이상학자들에게는 이 모든 논의가 상당히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여기에서 펼치는 생각은 많은 철학자가 즐겨 논하는 실재the reality, 혹은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 'Reality'(실재)-곧 존재 전체totality of existence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의미의 실재가 관여하는 정합적 활동들을 도무지 생각해내기 어렵다. 이런 거창한 실재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또는 신비주의적인 담론에서만 등장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사리에 맞게 그런 담론에 참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며 공식적인 저술을 통해 그런 담론에 뛰어들 생각이 없다."(250~251쪽)는 부분을 읽고,
그 앞에 나온 "엑스칼리버는 허구적 영역 안에서 실재하는 대상이다"(248쪽)라는 말과 "실재성(실재함)은 정도 차이가 있"다(276쪽)는 말을 떠올려보니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저자는 그런 '존재 전체'로서의 실재는 구체적인 작업적 효용이 없는, 오만한 구성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했는데, 저자의 표현대로 '많은 철학자'가 그것을 '즐겨 논한다'면(물론 저는 철학에 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와 관련한 인물이나 저서 등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요), 적어도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신비주의적 담론'이라는 영역 안에서 그런 대문자 실재는 딱 그만큼은 실재한다는 것일까요?
아무튼 실재성에도 정도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흥미롭습니다. 더 읽어보겠습니다. :)
전대호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존재 전체는 적어도 형이상학적 담론의 영역 안에서만큼은 실재하지 않을까?'
간단히 대답하면, 예, 실재합니다! 형이상학적 담론 안에서만큼은 '존재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쓰임새가 있고, 적어도 형이상학적 담론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치부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쓰임새를 가진 '존재 자체'는 그 담론 안에서 엄연히 실재합니다.
문제는 형이상학자들이 '존재 전체'를 그런 식으로 모종의 담론 영역 안에서만 유의미한 개념으로 내세우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럴 리가 없죠. 그들이 내세우는 '존재 전체'는 그야말로 만물을 포괄하는 절대적 전체잖아요. 필시 그들은 '존재 전체'를 그런 식으로 특정 담론 영역과 관련지어 제한하는 것 자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강변되는 '존재 전체'라면, 장하석 교수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죠.
'존재 전체'를 형이상학적 담론 안에서만 유의미한 개념으로 보고 고찰하는 작업이 있다면, 그 작업을 메타-형이상학 또는 형이상학 비판이라고 부를 만한데, 사실 그 작업은 아조씨가 인용하신 대목에서 장하석이 이미 하고 있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존재 전체' 혹은 '실재 전체' 혹은 '궁극의 전체 집합'은 자기모순적이고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훌륭한 철학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그 주장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지요. 전문용어로 하면, 모든 센스장을 아우르는 궁극의 센스장은 없다, 라고 표현합니다. 제 식으로 표현하면, 만물이 속한 궁극의 맥락은 없습니다.
그런 궁극의 통일된 맥락이 없다는 생각은 존재론적 다원주의, 또는 다원주의적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한걸음입니다.
전대호
'존재 전체'를 운운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한눈에 굽어보는 궁극의 지혜를 꿈꾸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심 있는 인간이라면 그런 꿈을 품어볼 만하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것은 가늠할 길 없는 풍요가 아닐까 싶어요. 괴테가 말한 '찬란한 생명의 나무des Lebens goldender Baum'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파우스트를 찾아온 젊은이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유혹적으로 말하죠.
Grau, teurer Freund, ist alle Theorie, / Und grün des Lebens goldner Baum
(잿빛이야, 소중한 친구, 모든 이론은/ 푸른 건 찬란한 생명의 나무라네.
잿빛 이론(통일된 존재 전체 )과 푸르고 찬란한 생명의 나무(가늠할 길 없이 다원적인 풍요)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어느 쪽이 플라톤이 말한 선(좋음)의 이데아에 더 가까울까요? 대답은 자명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장하석, 가브리엘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다원주의자예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김영사
잘 읽고들 계신지요. 3장은 '실재'를 다루었는데요, '레고주의'라는 재미있는 개념도 나왔습니다. 오늘부터는 4장 '진리'를 함께 읽습니다.
4차: 4월 19일(일)~4월 24일(금)_ 4장 진리
'진리'가 뭔지는 내가 잘 안다고, 누구나 아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지요. 4.1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렇게 간단명료한 사안이 아니며, 이 사안과 관련하여 당신이 느낄지도 모르는 자기만족은 이 디스토피아적인 21세기 벽두에 이미 사라졌어야 마땅하다. 지금 지구 곳곳의 많은 사회는 진리를 둘러싼 매우 기초적인 몇몇 문제에 관하여 합의에 도달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안타깝게도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가장 사려 깊은 첨단 인문학 연구 중 일부는 전통적인 진리, 사실, 객관성, 합리성 개념에 파괴적인 의심의 빛을 비추면서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내왔다."
4장은 내용이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쩌면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정치적 양극화, 가짜 뉴스 등의 사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트럼프 이야기도 나오고, 평평한 지구 이야기도 나오지요. 아무리 진심으로 말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활동의 성공(작업적 정합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저자의 단호한 기준은, '가짜 뉴스'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현실적인 잣대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사안이나 태도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시면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실마리 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4장에서 종종 언급되는 인물인 리 매킨타이어의 책들도 한국에 번역,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께 들춰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이번에는 특정한 질문이나 주제는 남기지 않겠습니다. 책을 읽으시면서 느낀 점, 궁금한 점, 와닿은 문장, 자신의 경험 등 모두 환영합니다.

마키아벨리1
제게는 너무 어려워 따라가기 정말 쉽지 않지만, .... 학생시절 논문을 쓰면서 리뷰어에게 과학지식과 자신의 생각을 잘 구분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제게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을 확립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책은 제 경험을 극대화하여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것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적인지를 매우 엄밀하게 따지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김영사
객관과 주관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인 것 같아요. 우리가 그동안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것들 이면에는 '신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개념화 과정이 있음을 이 책은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한 실재, 즉 "정신에 의해 틀지어져 있지만 정신에 의해 통제되지는 않는 것"이라는 개념과 마키아벨리1님이 말씀하신 '객관과 주관'을 연결지어 생각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조씨
“ '근사적 진리'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며, 우리가 실제로 거론하는 것은 진리를 향한 '접근'이고, 진리 자체는 여전히 예/아니오의 문제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진리에 관한 양자택일을 고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다. 정반대로, 1.6절에서 살짝 언급한 대로, 현재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 분야에서 다가 논리가 활약한다는 사실은 양자택일적 진리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 합법적이며 잠재적으로 매우 유용한 행마임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할 만하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31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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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씨
절대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해독제로서 항상 '이 진술은 어디에서/언제 진리인가?'라고 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유익할 성싶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32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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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씨
실제로 삶은, 확실성이 불충분한, 의심하고 검사할 여지가 있는 가설들에 의존하여 수행하는 놀이에 매우 가깝다.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57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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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삶은 리스크다"라는 문장을 어딘가에서 인상 깊게 읽은 것이 기억납니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다면,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삶의 불확실성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은 삶이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한 듯해요.

아조씨
불확실성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불확실성이 삶이 흥미로운 이유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조씨
“ 우리는 테레사 수녀가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높은 정도로 자비로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존 F. 케네디의 자비로움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자비로움을 명확히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업적-정합성에-의한-진리성은 이 후자의 사례들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처럼 진리성이 아름다움, 정의로움, 자비로움 같은, 삶에서 중요한 다른 덕목들과 유사하다는 점은 어쩌면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일일 것이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68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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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씨
“ '진리임'이 질이라면, '거짓임'은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 숙고하다 보면 흥미로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매우 초보적인 나의 견해를 밝히자면, 과학철학을 위해서는 '진리임'과 '진리 아님'이 여전히 상호 배제적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이는 단지 '아님'의 의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진리임' 자체가 질적인 개념이라면, 이 행마는 그리 유용하지 않다. 또한 '거짓임'에 ' 진리 아님'보다 더 흥미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법하다. 어떤 명제에 의존할 경우, 그 명제가 기존 활동의 정합성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나는 그런 명제에 부여할 수 있는 거짓임 개념이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69~370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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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씨
글들이 안 올라오네용 ㅎㅎ 어떻게들 읽고 계신지 궁금..

아조씨
“ 나는 많은 사람이 신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많은 정합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점을 인정하며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는 그런 만큼 진리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정작 유신론자들은 이처럼 단서가 붙은 진리성을 거부할 성싶다. 아냐, 신이 존재한다면 절대적으로 존재해! 그렇다면 살면서 수행하는 어떤 활동이든지 신의 존재에 의존함으로써 정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관건인 셈이고,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일 천국이라고 불리는 높은 곳에 살면서 모든 이의 기도를 경청하는, 수염을 기른 백인 남성이 우리가 말하는 신이라면, 나의 대답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설령 더 합리적으로, 전능하며 더없이 자비롭지만 웬일인지 인간의 삶에서 온갖 악이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는 궁극의 존재가 신이라 하더라도, 나의 대답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에 일부 사회들이 잘 만든 신 개념에 기초하여 정말로 포괄적이며 정합적인 삶의 방식을 실제로 고안할 수 있다면(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그럼에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
『새로운 실용주의 과학철학 - 현실적인 사람들을 위한 실재론』 388~389쪽,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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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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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주제로 작년에 나온 논문이 있군요! 한경국립대학교 브라이트칼리지 이정민 교수의 <장하석의 실재론, 조작적 정합성, 과학의 진보>라는 논문입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기 전인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여우는
진도가 좀 늦어 이제 막 3장을 다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경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실재'를 논하려면 반드시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실재에 대한 "무언가의 존재와 속성들에 의존하는 작업적으로 정합적인 활동들이 있는 만큼 실재한다"는 정의 자체에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엿볼 수 있고요.
- 무언가가 실재하느냐는, 그 무언가가 촉진할 수 있는 정합적 활동들이 있느냐에 달려 있지, 현재 우리의 인간 공통체가 그런 활동들을 ... (p.224)
- 정의는 입법의 성격을 띠기 때문 (p.268)
- 사회적 공동체도, 개인들이 상호 연결을 통해 변화하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다 (p.311)
또한,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출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 자기 이외의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각이 자신에 의해서만 보증된다. 그것은 사실 지각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심오한 형이상학자들은 어쩌면 나 홀로 무인도에 내던져 있더라도 저 너머의 세상에 실재들 전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고고한 형이상학자'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아니면 진리에 신성함을 과도하게 부여해, 진리는 한낯 인간 따위의 정신에 의해 틀 지어진 것과 동 떨어져야만 한다는 종교적 사고 방식일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드네요.
전대호
직감으로는 장하석의 '실재' 가 성립하면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여우는 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말씀이 옳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전대호
직감으로는 장하석의 '실재' 가 성립하면 여러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여우는 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그 말씀이 옳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군요. 만약에 '작업적 정합성을 띤 활동'이 여러 사람의 참여를 반드시 요구한다면, '실재'도 여러 사람이 있어야만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터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지 의문이네요.
예컨대 "내 앞에 놓인 땅바닥"을 생각해봅시다. 내가 전진하는 것을 포함한 온갖 정합적 활동(행진하기, 조깅하기, 자전거 타고 전진하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기 등)은 1)그 땅바닥의 존재에 의존하고, 또 2)그 땅바닥이 나를 떠받치기에 충분할 만큼 굳건함에 의존할 텐데, 그런 활동 중에는 여러 사람의 참여가 필수적인 것들도 있겠지만 단 한사람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요? 당장 제가 든 예들은 저 혼자서도 정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활동으로 보입니다.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을 인용하셨는데, 이 말을 받아들이려면, 여러 전제를 수용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런 전제 없이 선뜻 수긍하기는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어쩌면 여우는 님은 "실재함"을 "여러 사람이 참과 거짓을 따지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등장함" 정도로 간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견해고, 이 견해를 바탕에 깔면, 여러 사람이 있어야만 실재성이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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