맵고 칼칼한 소스를 끼얹었다는 표현이 재밌어요. 따개비나 장어와 오렌지 이야기도 그렇고 작가님이 중간중간 재밌는 요소들을 많이 넣어놓으셨네요. :)
발라 이야기에서는 소설 바벨이 생각나요. 발라의 고급 문헌 분석기술로 원래의 해석을 뒤엎어서 교회의 권위에 제동을 거는 것이 이 시기에 아주 용감한 연구였을 것 같아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3.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D-29

도롱

도롱
1,2 장에 고전 서적들이 수도원 관리 하에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았어요.
로마 제국의 붕괴(476년)는 텍스트 생산·유통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파피루스 공급망이 끊겼다. 전문 필사 작업장이 사라졌다. 도시들이 축소되거나 폐허가 되었다. 교육받은 독자층이 급감했다. 이것은 제도적 붕괴에 의한 자연적 소멸이었지, 교회의 의도적 탄압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수도원이 고전 텍스트를 보존한 주체였다.
베네딕트 수도원 규칙(6세기)은 수도사들에게 하루 두 시간 이상의 독서를 의무화했다. 필사실(scriptorium)에서 수도사들이 고전 텍스트를 베꼈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가 수도원 도서관에 살아남은 것은 이 때문이다. 카시오도루스(490-585)는 명시적으로 세속 학문과 기독교 학문을 결합한 수도원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도롱
그렇다면 , 무엇이 고전을 주변화했는가? 네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다.
첫째: 양피지의 희소성과 팔림프세스트
파피루스 공급이 끊기자 양피지가 주요 필사 재료가 되었다. 양피지는 훨씬 비쌌다. 선택이 불가피했다. 무엇을 베낄 것인가. 수도원 공동체의 입장에서 성서·전례문·교부 문헌이 우선이었다. 고전 텍스트는 경제적 이유로 후순위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팔림프세스트다.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해 기존 텍스트를 긁어내고 위에 새로 썼다. 19세기에 화학적 방법으로 밑에 있던 텍스트를 복원하자, 키케로의 잃어버린 저작 「공화국에 관하여」 일부,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논문들이 나왔다. 고전 텍스트가 기독교 텍스트 밑에 문자 그대로 묻혀 있었다.
둘째: 제도적 관심의 재편
중세 대학(12세기 이후)과 그 이전 수도원 학교의 교육 목표는 구원을 위한 지식이었다. 지식의 목적이 바뀌면 어떤 텍스트가 중요한지도 바뀐다. 키케로의 수사학은 설교를 위해 유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신학 논증을 위해 필요했다. 유용한 고전은 흡수되고, 유용하지 않은 고전은 방치되었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이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같은 텍스트들은 기독교 윤리·신학과 정면 충돌했다. 이것들은 필사되지 않았고 서서히 잊혔다. 루크레티우스는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 수도원에서 단 하나의 사본을 발견함으로써 극적으로 복원되었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수한 사례
6세기 보에티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일부를 라틴어로 번역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부분 저작은 서유럽에서 사라졌다. 이것들이 아랍 세계에서 보존되었다. 알파라비, 이븐 시나, 이븐 루시드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석하고 발전시켰다. 12세기 아랍어에서 라틴어로의 번역 운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 “재수입”되었다.
이것이 스콜라철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 신학에 통합하려 했다. 이교도 철학자의 텍스트가 가톨릭 신학의 핵심 도구가 된 것이다. 고전 텍스트의 운명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지리적으로 복잡한지를 보여준다.
넷째: 해석적 포획
교회가 고전 텍스트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은 방법은 알레고리적 해석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네 번째 전원시에서 “위대한 시대의 새 질서”를 예언한 구절을 기독교 해석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으로 읽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교도 예언자”가 되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도덕적 알레고리로 재해석되었다.
고전 텍스트를 없애지 않고 기독교적 의미 체계 안에 흡수함으로써 무력화한 것이다. 이것이 물리적 파괴보다 더 교묘한 지식 통제 방식이었다.

도롱
“ 시간이 좀 더 지난 뒤, 종교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는 새로운 세대의 지식인들이 발라에게 매력을 느꼈다. 발라의 방법론과 목표를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발라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사상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닌 전문성을 신뢰하고, 문헌과 주장이 어떻게 그렇게 형성되었는지 연구해야 한다는 고집이었다. 그들은 발라의 방식에 따라 의심스러운 문서를 조사하고 그 기원과 신빙성을 분석했다.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는 비종교적 인문학자들이 (즉 좀 더 협소한 의 미에서의 '자유사상가'들 이) 발라의 솔직한 태도와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명백한 호의에 동질감을 느꼈다. ”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145,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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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
“ 피치노는 이 문제를 탐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지만 새로운 연구 방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했다. 또한 우주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 과감한 주장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문학, 예술, 학문 연구, 자치 등의 분야에서 인간이 세운 업적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천지를 창조한 존재와 인간이 거의 같은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에게 도구와 천지를 만들 재료를 준다면 인간 또한 어떻게든 천지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누가 반박하겠는가?" 이것은 엄청난 주장이었다. ”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161,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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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향
4장에 나오는 파도바 대학의 세계 최초 해부학 극장이 궁금해 찾아봤습니다. 다녀 온 분 여행기를 보니 정말 책의 설명대로 생겼고 매우 좁고 환기도 되지 않았다고 하고요. 신기하네요.
https://m.blog.naver.com/europareise/223561600802
대학 홈피에서 투어 예약도 할 수 있네요.
https://www.unipd.it/en


소향
죽음이 기꺼이 삶을 돕는 곳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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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향
< 4장 소감 >
1. 저자 깨알 유머 재등장. 예1: (두 해부학자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언쟁 벌였다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신장이나 빗장뼈를 던지는 상상을 해본다. 예2: (레알도 콜롬보가 베살리우스의 실수를 지적한 언급에서) 해부학 수술대가 아닌 다른 맥락에서 이를 접했다는 의미다.
2. 범죄를 방지하는데 어쩌면 사형보다 더 효과적이었다는 당시의 사후 육신 부활론, 이런 것이 대중에게 통하는 시대는 다시 오기 힘들겠지 싶으면서도 지역별로는 여전히 유효한 곳이 꽤 많은 듯하다.
3. 우리의 의식은 술로 인해 흐려지거나 병으로 인해 약해질 수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때 인간에게 '지금'은 얼마나 짧고, 육체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새삼스러웠다. 아직 '비교적' 온전한 나의 의식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졌고, 또렷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는 '그것'이 주는 기쁨을 언젠가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언젠가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부드럽고 조용히 해체되면서 나도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SF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마인드 업로딩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의식이란 육체를 그릇 삼을 때 진짜 '나'를 이루는 것이지 컴퓨터로 옮겨가는 순간 내가 아닌 그저 데이터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는다. 설령 그것이 '나'의 의식과 완전히 같다고 하더라도 그런 종류의 불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borumis
그러게요. 시신 썩는 냄새에 환기도 안되지 사람도 많은데 좁지.. 성질 돋으면 정말 메스 던지는 일도 생기겠습니다..;;

향팔
1번, 동감입니다! ㅎㅎㅎ (예1, 예2 모두 넘 웃겼습니다)
이 문장도 재밌네요. “그러다 난처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체가 협조하지 않는 경우였다.”

borumis
스프레차투라를 보면 자만추나 꾸안꾸, '좋아, 자연스러웠어' 등 우리나라에서도 쿨(한 척) 자연(스러운 척)하면서 티 안 나게 노력하는 게 참 유구한 전통을 가진 것이군요..

꽃의요정
가동식 활자 사용을 포함해, 인쇄술은 이미 중국과 한국에서 오래전에 개발된 기술이었다. 불경을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122p,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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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 다양한 관점에 대한 애정이 이처럼 컸기에 <에세>의 초판을 닫는 말로 다양성을 선택했다. "세상에 두 개의 완전히 똑같은 의견은 없다. 머리카락 두 올이나 알곡 두 알이 각기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은 다양성이다." (중략) 그러나 <에세>라는 책은 모든 사람이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인간성을 공유한다는 믿음에 온전히 기대고 있다. 몽테뉴는 우리 각각이 인간 조건을 "온전한 형태"로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문화에 따른 행동이나 배경이 아무리 달라도 타인의 경험과 품성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44~245,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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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여기도 트위터 하는 분들 계시겠죠? 지난 주말부터 자동번역 기능이 탑재되어 전세계 트위터리안들이 바벨탑 시대에 사는 기분을 맛보고 있는데요(번역보기와 자동번역, 한 끗 차이일 줄 알았는데 한 단계의 벽이 정말 크더라구요), 요 며칠 사이 다양성과 보편성에 대해 새롭게 느끼는 와중에 이 부분을 읽으니 새삼 와닿았어요. 언어의 장벽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들 강아지고양이 자랑을 하고 동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빌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극악무도함에 치를 떨고 서로 친해지고 싶어하고 알아가고 싶어하는 다정함들이 많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특정 단어들은 의도성이 보이는 오역이 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앞으로 어찌 될런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알마
“ 조지 엘리엇은 허구적인 소설을 읽으면 실질적인 도덕적 이득이 생긴다고 믿었는데 연민의 고리, 즉 요즘 우리가 "공감"이라고 하는 것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한 에세이에 이렇게 쓰기도 했다. "우리가 예술가로부터 빚진 가장 큰 혜택은, 그것이 화가든 시인이든 소설가든, 바로 연민의 확장이다. (...) 위대한 예술가가 그려낼 수 있는 인간 삶의 그림은 아무리 하찮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깜짝 놀라게 만들어 자기와 동떨어진 것에 관심을 두게 하는데 이것은 도덕 감정의 원재료라고 부를 수 있다." ”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48,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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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
조지 엘리엇이 요즘 사람이라면 웹소설이나 만화도 언급했을 것 같아요. 24년 말부터 집회에 나가거나 라이브를 볼 때마다 소위 오타쿠라 불리는 분들이 자유발언 중에 자신의 최애 캐릭터나 작품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봤는데 이 인용구를 읽으면서 그 분들이 생각났어요. (그때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인데 아직 못 봤네요 ㅎ) 대만에서 지하철 흉기 난동을 저지했던 분이 용사 힘멜이라면 그랬을 거라고 인터뷰한 내용도 떠오르구요. 장송의 프리렌을 보지 않았는데 힘멜은 거기 나오는 헌신과 희생의 대명사라 하네요. 공감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순간에 용기를 내야 하는가, 어떻게 타인과 연결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도덕 감정의 원재료를 쌓기 위해서 장르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어요. 만화든 소설이든 영화든 말이지요. 특히나 어릴 땐 권선징악이 명확한 이야기들이 필요하겠다 싶구요...
밥심
“ 120쪽
스프레차투라는 느긋하고 무심한 듯 태연한 자세를 말한다. 어려운 일을 할 때도 마치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고, 너무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태도다.
127쪽
세계와 책 안에서 동시에 기쁨을 찾는 사람이 진정한 휴머니스트라고 했는데 그 감성을 바로 이 책이 보여주고 있다.
130쪽
휴머니스트들은 대체로 이런 역할을 꿈꿨다. 학문의 세계로 신선한 공기와 꽃을 가져오는 동시에 학문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이다. ”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장. 난파선 인양하기,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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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내일 4월 15일 수요일은 4장 '경이로운 망'을 읽습니다. 인체로 눈을 돌린 르네상스 지식인의 이야기입니다. 분량이 짧고 또 중간에 슬쩍 삽입한 느낌의 장이라서 하루에 읽습니다. 4장의 인물 카드도 참고하시라고 올려둡니다.

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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