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3.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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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책에서는 1453년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지식인들이 책을 챙겨 이탈리아로 다 옮겨갔다는 뉘앙스로 말하지만, 제리 브로턴의 책에서는 메흐메트 2세도 유럽의 르네상스 군주들처럼 책을 모으고 인문학자들을 고용하고, 동서양의 지식을 섞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네요.
이 모임 시작할 때 영화 <백발마녀전>(1993) 얘기가 잠시 나왔었지요. 저는 ‘20세기 소년’ 시절 열광했던 <동방불패>(1992)도 떠오르더군요. 아시다시피 <동방불패>의 원천은 제가 아끼는 작가 김용의 소설 『소오강호』입니다. 10대 시절, ‘웃으며 오만하게 세상을 노니는’ 주인공 영호충의 삶은 제가 가장 닮고 싶은 자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다 보니, “느긋하고 무심한 듯 태연한 자세”를 취하는 카스틸리오네의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가 영호충의 모습과 절묘하게 겹치더군요. 물론 미묘한 차이는 있습니다. 도교의 ‘무위자연’이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면, ‘스프레차투라’는 궁정이라는 치열한 생존 현장에서 자신의 노력을 은폐함으로써 탁월함을 증명하는 고도의 사회적 기술이니까요. 16세기 초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여유 있는 척하는 기술’과,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해방되려는 강호의 철학. 전자는 타인에게 더 인정받으려는 시도이고 후자는 그런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는 태도인데, 그 결과가 ‘자연스러움’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습니다. 어느 쪽의 ‘자연스러움’이든 타인이 보기에는 똑같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혹시 『소오강호』의 그 호방한 기운을 기억하시나요? 영화 <동방불패>에서는 임청하(임영영)의 매력에 영호충의 호방함이 가려진 면이 있습니다만. 사실, 영화 속의 영호충은 지질해 보이기까지 하죠. :)
동방불패사부의 위선에 실망한 수제자 영호충은 추동자들과 유랑길에 오르며 일원신교의 무사 임영영을 만나 회포를 풀기로 하지만 약속장소는 누군가의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혼란에 휩싸인 그는 향문청으로부터 동방불패의 술책을 듣게 되고 도음을 요청한다. 자객의 습격에서 동방불패를 구해준 영호충은 그의 정체를 모른 채 사랑에 빠지고 마침내 계략에 빠져 동방불패의 애첩을 그로 착각하고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동방불패의 정체를 훔쳐보게 된 임영영의 심복 남봉황은 동방불패에 쫓기게 되고 동방불패는 부하들을 이끌고 임아행이 있는 주막으로 쳐들어가는데...
소오강호 1~8 세트 - 전8권김용의 대하역사무협소설. 김용이 <소오강호>를 집필할 때,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과 권력 투쟁이 한창이었다. <소오강호>는 영호충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이들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이야기다.
결국에는 좋은 신하는 담대하고 교양이 있으며 언변이 뛰어나고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를 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스프레차투라는 느긋하고 무심한 듯 태연한 자세를 말한다. 어려운 일을 할 때도 마치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고, 너무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태도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장, 120쪽,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조금 생뚱맞지만 영화 <오피스>의 한 장면이 생각났어요. 배우 고아성, 배성우, 박성웅, 김의성, 류현경, 박정민 등이 출연하는 직장스릴러(사무실 지옥물) 장르고요 ㅎㅎ 영화에서 고아성 님이 맡았던 역, 인턴 미례는 아무래도 ‘스프레차투라’가 많이 부족한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정말, 16세기 초반 인문주의자들도, 현대의 노동자들도, 치열한 생존 현장에서 ‘여유 있는 척하는 기술’로 균형을 잡으며 줄타기를 하는 건 똑같이 어렵겠구나, 싶었답니다. # 영화 중반 화장실 씬 염하영 : 자긴 너무 열심히 해, 그게 문제야. 이미례 : 네? 염하영 : 너무 잘 할려그러지 마. 너무 잘하려는 욕심을 보이지 말라구. 그게 오히려 자기 존재감을 더 깎아먹는다? 이미례 : 아,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염하영 : 너무 잘 하려고 막 잘 보이려고 안달복달하는 사람들 보면, 저사람 뭐가 저렇게 자신감 없어서 저러나. 뭐가 모자라서 저렇게 안쓰럽게 구나, 싶거든. 좀… 없어보인달까?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눈치껏 해. 너무 융통성 없이 그러지 말고. 자긴 착하긴 한데, 가만보면 과장님 같은 구석이 좀 있다니까?
오피스어느 날 한 가족의 가장이자 착실한 회사원인 김병국 과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사라졌다. 이에 형사 종훈은 그의 회사 동료들을 상대로 수사를 시작하지만 모두들 말을 아끼고, 특히 김과장과 사이가 좋았다는 이미례 인턴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눈치다. 게다가 종훈은 김과장이 사건 직후 회사에 들어온 CCTV 화면을 확보하지만, 그가 회사를 떠난 화면은 어디에도 없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한편, 김과장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료들은 불안에 떠는 가운데, 이들에게 의문의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오피스>보면서 저는 사회 초년병시절 떠올랐어요. 여기서 버타지 못하면 다른데서도 못버틸거라는 자기암시와 채찍질로 죽을힘을 다해 노동했던 초년생시절이 떠올라 주인공을 안아주고 싶었어요.
예, 저도 미례에게 이입이 되더라고요. 그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감정이 드나봅니다..
@향팔 ㅎㅎ 사람들 저마다 그런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학교 때 시험공부 하나도 안 했어로부터 시작해서 이번 시험 폭망이야하는 거 믿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사실은 믿고 싶기도 하잖아요. 저는 오래 전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하는데 꿀 먹은 벙어리가 되가지고 난 왜 이렇게 못 하지? 자책도 많이하고 나 빼놓고 다른 교사들은 잘만 가르치는구나.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한 걸 거의 7,8년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오피스>는 저도 본적 있는데 이 열심히가 7,80년대까지만해도 먹혔는데 요즘은 좀 그렇긴 하죠? 그보단 거기에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부여하면 얘기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캐빈 코스트너 같은 사람 열심히 일하는 지적인 상사맨처럼 보이잖아요. 왜 막 와이셔츠 소매단 걷어 붙히고 팔뚝에 힘줄 보이면서 죽기 살기로 일하는 사람 보면 멋있어 보이잖아요. ㅋ 암튼 저도 <소호강호> 읽고 싶어졌습니다! 하하
제 딸도 이런 태도로 멋져보이고 싶어하는데 그게 궁정에서의 일종의 처세고 '스프레차투라'라고 불렸군요.
80년대 중고딩들은 밤새 공부하고 몰래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도 학교에 와서는 떠들고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세계사 국사 만점 받으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투로 "오늘 동시상영 영화는 뭐가 있을라나?" 하고 열심히 살지 않는 논다리인데 이상하게 머리가 좋아서 시험점수는 좋게 나오는 쿨한 능력자인척 열심히 했습죠. 서로 경쟁적으로 공부 베틀하는 걸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X세대의 가오가 생각나네요. ㅋㅋㅋㅋ
인문학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도덕철학과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소통 능력은 세상 속에서 실천할 때 가장 밝은 빛을 발휘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2장, 118쪽,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스프레차투라는 문학 활동에서도 이상적인 태도였다. 카스틸리오네는 본인의 저서도 이런 식으로 집필했다고 주장한다. 가벼운 샐러드를 만들듯 설렁설렁 써냈기에 힘을 들여 정식으로 편집, 출판할 생각도 없었는데, 친구였던 시인 비토리아 콜론나가 다른 친구들에게 몰래 퍼뜨렸고 워낙 널리 읽히는 바람에 그럴 바에야 출판하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달랐다. 카스틸리오네는 1528년 『궁정론』을 출간하기 전까지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공을 들여 여러 번 수정했다. 출간 후에는 찬사가 쏟아졌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120-121쪽,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여러 학자, 작가, 가정교사들의 업적 뒤에는 이런 은밀한 노력이 있었다.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이고 싶어 했지만, 제자로 삼은 귀족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처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신 인문학자의 길을 걷는 고통스러운 의식을 치른 사람도 많았다. 드물게 고용인이나 후원자를 찾으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당연히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큰 노력과 창의력을 기울였고 무심한 듯한 태도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121쪽,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이번 주말에는 병행 독서(병렬 독서)도 하시면서, 편안하게 쉬시는 시간을 보내세요. 주 중에 바빠서 밀린 독서를 하시는 분들은 감상 나눠주시고요. 저는 다음 주에 소개할 일이 있어서 이번 주는 신간 소설 세 권과 함께 보낼 것 같아요. 두 권은 마무리로 가고 있고, 한 권은 이제 시작할 참이라서 두근두근입니다. :)
시간관리국〈뉴욕타임스〉 〈선데이타임스〉 〈LA타임스〉 베스트셀러, BBC?커커스 등 32개 매체 선정 가장 기대되는 책, 〈굿모닝 아메리카 북클럽〉 〈아마존〉 이달의 책, 〈옵저버〉 선정 올해 최고의 데뷔작, 휴고상 최종 후보.
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2025년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의 《카프네》가 출간되었다. 일본 전역의 서점 직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책’으로 압도적 지지를 보낸 이 작품은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활의 힘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모방소녀학벌 지상주의와 능력주의 신화가 결합된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텍스티의 시사 소설 시리즈 ‘사이드미러’는 우리가 목격했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사회적 문제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고자 기획되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책이..ㅎㅎ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가 YG님이 어찌 읽으실지.. 두근두근하다 못해 무섭지만.😭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
@소향 와, 작가님 원래 화요일까지 이동 중에 읽으려고 했었는데 오늘 펼치자마자 단숨에 다 읽었어요. 주말에 읽은 소설 세 권 가운데 제일 몰입감 있어요. 이번에 확실히 능력 발휘하셨네요. 다시, 축하드립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누가 주인공 일인이역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헙!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YG 님이 거짓말 하실 분은 아닌데! 더구나 다른 두 권 읽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책 같은데,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사실 YG님 워낙 눈 높으셔서 이게 뭐냐, 더 잘 쓰지 못하렸다! 이러실까 봐 완전 쫄아서 마음의 준비 하고 있었는데요. ㅋㅋ 한시름 놓고 푹 잘 수 있겠어요. ^^
@소향 문제의식이야 소재 자체가 그러니 당연히 훌륭하지만, 스토리 자체도 재미있어요. 정말 단숨에 읽었습니다. 올해 읽은 한국 소설 가운데는 몰입감 최고! :)
가동식 활자 사용을 포함해, 인쇄술은 이미 중국과 한국에서 오래전에 개발된 기술이었다. 불경을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도 교황의 면죄부, 즉 사후에 받을 벌을 줄여주는 증서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데 가장 먼저 쓰였다. 이런 면죄부를 무려 1만 장이나 인쇄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455년에 유럽에서 인쇄술을 이용해 찍어낸 최초의 서적, 구텐베르크 성경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p.122,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휴머니스트들은 대체로 이런 역할을 꿈꿨다. 학문의 세계로 신선한 공기와 꽃을 가져오는 동시에 학문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이다. 학자들은 여전히 난파선을 인양한다든가, 어둠에 빛을 비춘다든가, 수감자를 해방시킨다든가 하는 기존에 사랑받던 비유도 사용했다. 마누티우스는 자신이 만든 투키디데스의 <역사Histories>에 쓴 서문에서 "출판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좋은 책을 쓸쓸하고 음울한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p.130,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라틴어의 기품>은 이 고대 언어에 붙은 중세의 따개비를 긁어낸 뒤 좀 더 진실하고 근본적인 형태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과제를 도맡았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 - 혐오와 고립의 시대, 우리를 연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p.139, 세라 베이크웰 지음, 이다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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