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과학도서] 천천히 곱씹으며 느리게 읽기 <지구의 짧은 역사> 2부

D-29
약간 왜곡되긴 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장미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가 날 겁니다." 그 말은 이름을 붙이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의미다.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포드가 '우표수집'이라고 지칭한 과학 분야들-그는 아마 분류학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에도 똑같은 비난이 적용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보다 오도시키는 견해는 없을 것이다. 비록 학명을 짓는 것이 장난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름들은 진정한 지적인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 살펴볼 중요한 질문들 중 몇 가지에서는 엄밀한 동정이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유능한 분류학자들이 측정단위(종, 속 따위)를 정확히 정의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생명다양성을 어떻게 논의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조사하는 종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지 못한다면, 진화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는가? 이 동물이 이 대륙에서 발견되고 저 동물이 저 대륙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려줄 믿을 만한 꼬리표가 없다면 고대 생물의 지리학을 어떻게 추론할 수 있겠는가? 어느 책에서든 이 세 가지 질문은 깊이 다루어도 좋은 것들이므로, 여기서 나는 일단 간략하게 답할 생각이다. '당연히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삼엽충 -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pp.184~185, 리처드 포티 지음, 이한음 옮김
명명의 세계 공유 감사합니다.
오, 그냥 다른 이름을 가지세요. 이름에 뭐가 있나요?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달콤한 향기가 날 텐데요.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홍유미 옮김
로미오와 줄리엣시공 RSC 셰익스피어 선집 시리즈.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비극 중의 비극’으로 불리는 「리어 왕」은 이성과 광기, 사랑과 증오에 휩싸이는 유한한 인간 존재의 보편적 절망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숭고한 비전”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줄리엣이 로미오가 몬태규 가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은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대사네요! ㅎㅎ
스페인어에는 바다를 지칭하는 여성형 명사도 있고 남성형 명사도 있다. 즉 ‘라 마르(la mar)’라고도 하고 ‘엘 마르(el mar)’라고도 한다. 그런데 산티아고는 바다를 언제나 여성으로 간주해 ‘라 마르’라고 부른다. “장미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없다.”라고 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한 대상을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중략) 한편 산티아고의 반대편에는 신세대에 속하는 젊은 어부 중 몇몇이 있다. 자연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산티아고와 달리 그들은 바다를 ‘라 마르’로 부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남성으로 간주해 ‘엘 마르’라고 부른다. 같은 어촌에 살면서 똑같이 고기잡이를 해도 젊은 어부들의 태도는 이렇게 사뭇 다르다. (중략) 그것은 곧 세계관의 차이요 자연에 대한 태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젊은 세대의 어부들과는 달리 산티아고는 좀처럼 인간(주체)과 자연(객체)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요, 좀 더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생태계의 소중한 구성원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은 마치 육체와 영혼의 관계처럼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육체를 영혼에서 분리하는 순간 사멸하듯이 인간도 자연에서 분리되자마자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 「작품 해설」 7,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노인과 바다노벨 문학상, 퓰리처상 수상 작가, 20세기 미국 문학을 개척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미국 현대 문학의 개척자라 불리는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길 잃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권으로 출간된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로, 작가 고유의 소설 수법과 실존 철학이 짧은 분량 안에 집약되어 있다.
번역가 김욱동 선생님은 『노인과 바다』를 해설하면서 이 문구를 인용하셨더라고요. 리처드 포티, 제인 구달, 김춘수, 김욱동 네 분이 각자의 결을 따라 어떤 이름이나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셰익스피어 선생님 맞은편에서 함께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신데렐라 언니 ost - 에프엑스의 '불러본다' 노래 시작 전에 은조(문근영)의 나레이션 부분입니다. 문학작품 같아요.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iGZwrffJCE 나를 깨우는 외로움에 지쳐버린 잠에서 깨면 여전히 웃는 그대가 생각나서 나도 몰래 미소 짓는데 이렇게 또 사랑은 가고 아름다운 계절이 오면 니가 남긴 슬픔에 그리움에 나는 또 이 거리를 걷는다 하루 또 하루 나 살아가다가 그대 이름에 또 눈물이 나면 나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웃을 수 없어 또 그대 이름 불러본다 가슴에 남은 상처도 이젠 그대 일은 잊으라는데 내 입술을 깨물고 참아봐도 내 사람 너 하나뿐인걸 하루 또 하루 나 살아가다가 그대 이름에 또 눈물이 나면 나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웃을 수 없어 또 그대 이름 불러본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다가 사랑이 또 그리울 때면 그대가 남긴 아픔에 나도 모르게 눈물 흘리네 하루 또 하루 나 살아가다가 그대 이름에 또 눈물이 나면 나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웃을 수 없어 또 그대 이름 불러본다
표지 그림부터 강렬하네요.. 이름은 존재를 가두기도 하는 예.. 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있는 삼엽충 화석 그림의 일부에요. 여러 마리이고 조금 정교하게 그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져서.. ^^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삼엽충이 꼬물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계속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한 번 보고 지나치는 것보다는 많은 것들을 보게 되어요. 당시 바다의 물결 방향도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삼엽충들이 기어다니던 바닥이 진흙처럼 부드럽다면 물결의 흔적도 남아있을 수 있겠죠..?
물결의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아마 연흔이라고 할 겁니다. 삼엽충 화석이 박혀있는 퇴적암에는 흔히 연흔도 같이 있다고 하네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하셨지만 삼엽충이 너무나 생생해서 꿈틀꿈틀 헤엄쳐다닐 것 같네요!
오호!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결의 흔적도 화석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하네요. 작은 생물들이 기어간 자국이 화석으로 남는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한번 가면 끝일 것 같은 바람이나 물결도 화석을 남긴다니 참 오묘해요.
말씀하신 연흔Ripple mark이 있는 퇴적암을 보았어요. 미국 유타 그래이스캐년에서 온 것이군요. 두번째 사진은 유기적퇴적암인 처트Chert입니다. 38억년 전 암석이니 이것도 꽤 오래 되었네요. 문경수 탐험가님이 기증하셨나봐요. 이제 보니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나이가 많은 암석이 많군요. ㅎㅎ
우와, 저는 삼엽충이 항상 징그러웠는데 그림속 삼엽충은 귀엽네요. 뭔가 현대적이기도 하고요. ㅎㅎㅎ
귀여워서 다행이에요. 삼엽충을 예쁘게 봐주세요. 요즘 사람들은 비둘기도 엄청 싫어하고요. 특히 초등학생 여학생들.. ^^ 자기와 다른 뭔가를.. 혐오하는 게 익숙한 것 같아요. 젊은 여성들이 바퀴벌레 등 각종 벌레를 잡는데 10,000원, 20,000원 정도 지불한다는 것을 당근에서 종종 보았어요. 심지어 죽은 벌레를 치워주는 것도 사람을 필요로 하더군요..
앗, 정말요? 죽은 벌레를 치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우리나라 좋은 나라네요. 저는 벌레 사체는 어떻게든 치우겠는데 살아있는 벌레는 정말 기절초풍하겠더군요. 한번에 죽여야 하는데 놓치면 낭패잖아요.
속편 벌레 이야기(1) 달밤의 행진 꽤 오래전 이 칼럼에서 벌레 이야기를 4회에 걸쳐 썼다. 들은 바에 의하면 안자이 미즈마루 씨는 벌레를 몹시 싫어해서 삽화를 그리느라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짓궂은 짓을 한 셈이다. 그러나 미안하게 생각하는 한편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벌레 이야기를 한층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연유로 또 벌레 이야기. 내 마누라는 옛날에 괄태충 행렬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여고생일 때 얘기다. 달 밝은 밤에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근처에 있는 언덕길을 걷고 있자니, 멀찌감치 앞쪽에 은색 띠 같은 게 보였다. 그것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도로를 횡단하고 있었단다. 오른편의 돌담에 빠끔 뚫려 있는 토관 구멍에서 줄지어 기어나와, 길을 가로질러 건너편에 돌담을 올라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띠의 폭은 대충 1미터 정도. 대체 뭘까 하고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게 글쎄 쥐만한 크기의 거대한 괄태충 행렬이었던 것이다. 좌우지간 몇천 몇만 마리는 되어서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행진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된 듯 자동차에 깔려 물컹하게 짓이겨진 자국이 노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게 달빛에 반사되어 미끈미끈하게 빛난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다. "그 돌담 너머에 있던 낡은 저택을 부수고 맨션을 짓고 있었으니까. 거기 살던 괄태충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거겠지"하고 그녀는 말했는데, 그렇게 엄청난 수의 거대한 괄태충이 과연 한 곳에 모여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옮겨 가 살았을까? 괄태충의 민족대이동이라니. 마치 <십계>에 나오는 모세의 출애굽 같은 이야기다. 필기 그 괄태충 무리 중에는 월등하게 거대한 보스 괄태충이 있고 그것이 앞장서서 모두를 신천지로 인도해갔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자니 속이 메슥거려 잠을 못 이룰 것만 같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pp.239~24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무라카미 하루키는 참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쓰시네요.
수필이라서 소재가 다양한 것 같아요.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소재가 될 수 있겠죠..
속편 벌레 이야기(2) 송충이 항아리의 비극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무엇인가. 역시 '송충이 항아리'겠죠. 하긴 이 '송충이 항아리'를 실행하기에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드니까 그다지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끔찍함에 관한 한은 그 어떤 형벌에도 뒤지지 않는다. 먼저 깊이 2.5미터에서 3미터, 직경 2미터 정도의 튼튼한 항아리를 준비한다. 꽤 단단해야 하며 또한 어느 정도 무게가 안 나가면 쓸모가 없으니까 주의한다. 안쪽 벽은 가능한 한 미끈미끈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항아리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망루를 세워 거기서 항아리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이것으로 1단계는 완료. 그다음에 노예를 삼천 명 정도 모은다. 그리고 "한 사람당 송충이 열 마리씩 잡아올 것. 그러지 못하면 곤장 백 대!"라고 명령한다. 노예들은 곤장을 백 대나 맞고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죽어라고 송충이를 모아온다. 그렇게 하면 한 삼만 마리의 송충이를 채취할 수 있다. 그러고는 삼만 마리의 송충이를 항아리에 쏟아붓는다. 송충이 삼만 마리를 한곳에 모으면 어지간히 장관이다. 마치 검은 콜타르가 항아리 안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광경 같다.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린다. 송충이가 쌓인 깊이는 대충 2미터 정도. 이것으로 준비는 모두 완료. 남은 건 죄수를 그 안으로 떨어뜨리는 일뿐이다. 그러고는 다같이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며 즐기는 것이다. 항아리 안으로 떨어진 죄수는 벽을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미끈미끈해서 곧장 미끄러져버리고, 깡충깡충 뛰어올라 숨을 쉬려고 해도 발밑에 깔려 짓이겨진 송충이가 질척거려 뜻대로 안 되고, 그러는 사이 입안으로 검은 송충이가 꾸물꾸물 한가득 기어들어가 결국은 질식사하고 만다. 무섭죠. 이런 형벌? 따끔따끔한 송충이가 입안 가득 들어오다니 생각만 해도 정말 구역질이 난다. 이렇게 죽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침대 위에서 평온하게 죽고 싶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pp.242~24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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