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rain님의 문장 수집: "그런데 머리카락과 몸의 털 역시 피부에서 난다. 아마도 시작은 수염이었을 것이다. 6,500만 년 전 거대 운석이 운명을 뒤바꿔 대부분의 생물종이 멸종해가는 가운데 허허벌판이 된 세상으로 나오기 전, 인류의 멀고 먼 조상인 포유동물은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을 피해 4,000만 년 동안 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굴속에서는 주둥이 근처 섬유조직이 중요한 촉각기관이었다. 이 원시 형태의 털을 이용하면 어둠 속에서 굴의 구조를 읽고 구멍이 제 머리가 통과할 크기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추위를 피하거나 도망치기 위해서는 내 몸이 들어가는 길을 정확히 판단하는 게 중요했다. 원시 포유류의 수염은 지구와의 친밀도를 재는 가늠자로 설계된 조직이었다.
컴컴한 동굴을 더욱 풍부한 감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수염은 진화하면서 점점 두꺼워지고 숱도 많아졌다. 우리는 그렇게 더듬대다 경계를 세우는 새로운 기술을 우연히 얻게 됐다. 털에 보온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연선택의 압도적인 추진력에 의해 털이 몸 전체로 퍼졌기 때문이다. 굴속 포유동물은 감각기관이기도 한 털이 빽빽할수록 생명 에너지를 더 많이 품을 수 있었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마다 에너지 소모가 빨라 비용이 많이 드는 온혈 동물로서는 체온을 보다 잘 관리하고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서늘한 이곳에서 살아남기에 유리해진 건 당연했다. "
“ 일찌감치 준비된 이 피부 감각기관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걸쳐 전신으로 퍼져 나갔고 퍼진 부위에서는 새로운 용도마저 발견됐다. 가령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방울뱀이 경고음을 내듯 목과 등의 털을 세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원시 피부조직은 국경의 파수병처럼 바깥세상에 속한 무언가가 침범할 때 영토를 넘어온 것으로 인식하고 반응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차원의 공간 개념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 곤두세운 털은 그저 외부인을 쫓아내는 경고였지만,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포유동물인 우리 인간이 지구에 출현할 무렵에는 겉으로 보이는 이 신호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면의 감각 역시 그 개체 상태의 일부였고 특히 자아에 더없이 유용한 신호였다. 뇌와 한참 먼 말초 피부조직인 털은 심리적인 혹은 물리적인 개인 구역의 침범 여부를 보고하는 임무를 맡아 세상에 진출할 때도 세상의 침략을 받을 때도 척후병 역할을 야무지게 했다.
우리 인류는 결국 몸에 있던 털 대부분을 다시 잃었지만 털을 통해 전달되던 느낌은 그대로다. 이처럼 오직 포유동물의 내면에만 최초로 허락된 위협과 성장의 고감도 탐지 기능은 먼 옛날 깜깜한 터널 속에서 태어난 진정한 원시의 감각이 아닐까. ”
『감정의 기원 - 우리의 뇌는 어떻게 감정을 만들어내는가』 pp.187~188, 칼 다이서로스 지음, 최가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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