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 멋대로 읽어라 2026년 4월

D-29
문장수집과 약간의 메모
<헬리아데스 콤플렉스> 중에서- 단정한 적대보다 푼수 어린 환대가 더 진심임을 지수는 유리를 통해 알았다. ...... 유리는 스스로 사랑받는 것에는 에누리를 하고, 사랑을 주려는 것에는 프리미엄을 붙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리를 보면서 지수는 특별하고 존귀한 생명체를 만난 느낌이었다. 살면서 선한 가면을 쓰거나 도덕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내적 욕망과 윤리적 외피는 다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표백된 양심을 향한 자아 성찰의 시간이 오면 자책하고 죄의식을 느끼는 게 인간이었다. 한데 유리는 그런 자책이나 죄의식 같은 걸 곁에 두지 않을, 이름 그대로 우리 같은 사람이었다.
뜻밖의 카프카 14~15, 김살로메 지음
다변일수록 실언할 위험도 클 것이었다. 하지만 말 없는 사람이 주는 피로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왜 이래, 그만해, 이게 뭐야, 너나 잘해 등과 같은 말에는 입이 헤픈 사람이었다. 지수는 좋은 말만 아끼는 그 남자가 뿜어내던 불안의 전조가 너무 싫었다. 그 남자에게 시달리다 보니, 제 패를 다 드러내듯 말을 쏟아내는 부류들이 훨씬 편했다. 그들은 불편할 수는 있어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뜻밖의 카프카 19, 김살로메 지음
"제 패를 다 드러내듯 말을 쏟아내는 부류들이 훨씬 편했다. 그들은 불편할 수는 있어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최근 엄청 수다스럽고 번다한 사람을 알고 지내고 있는데 말 많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그런데 저자의 이런 문장에 솔깃해진다. 과연 그런가? 뭔가 생각의 여지를 주는 것 같아서. 아무튼 난 저자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 같은 블로그 활동을 해서 저자의 책 거의 대부분을 선물로 보내줘서 그동안 다 읽었다. 이 책은 작년에 받았는데 게으르기도하고 이런저런 책을 읽어 읽기가 많이 늦어졌다. 이건 아무래도 책을 보내준 저자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붙들었다. 저자의 문장이 좋다.
일은 어렵지 않은 만큼 지수는 심리적으로 시달렸다. 잘난 사람 셋을 보필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지수가 알아서자신들의 맞춤형 노예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정보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 정보를 의미있게 공유하려 들지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라 가장 저급한 변덕일 뿐이었다. 침묵의 가치를 권위라는 무기로 써먹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일을 하는 동안 지수는 서서히 농담을 놓아 버렸고, 생기를 잃어갔다. 지수가 겪고 있는 전신 통증은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 스트레스성 질환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과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뜻밖의 카프카 20~ 1, 김살로메 지음
돕고 산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대게 착실한 가운데 조금씩 추하고 가끔은 이기적이었다. 작은 불티 한 점으로 생겨난 미묘한 기류만으로 파국을 맞을 수 있는 게 사람의 일이었다. 한데 유리는 인간의 그러한 속성에서 멀어지기라도 작정한 사람처럼, 선하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뜻밖의 카프카 23, 김살로메 지음
모든 문학은 결핍의 소산인데, 어린 시절의 애정 결핍으로 지나치게 타인 또는 부모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하는 강박증을 파에톤 콤플렉스라고 한다고 했다. 곁가지로 헬리아데스 콤플렉스도 말해주었다. 선천적인 선의의 감정으로 타자에 대한 배려를 이상화한 나머지 스스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심리상태를 헬리아데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뜻밖의 카프카 28, 김살로메 지음
파에톤의 치명적인 과오인 무모함을 탓하기는커녕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감싸고 애도하는 마음, 인류 보편애가 자연애로 치환될 정도로 순수한 마음, 그것이 지나치면 콤플렉스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지수는 가슴이 따끔거렸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 그 자체로 만족하는데, 주변에서 훈수 두고 재단할 자격이 있을까. 헬레아데스 콤플렉스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야말로 콤플렉스를 명명하기 좋아하는 콤플렉스에 걸린 자들이 아닐까.하고 지수는 생각했다. 자신의 몫보다 타인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죄가 될 리는 없었다. 그것은 무해한 진심일 뿐이었다.
뜻밖의 카프카 30, 김살로메 지음
세상엔 관계를 확장하려는 사람은 많아도, 똑 부러지게 단절하려는 이는 드물었다. 척지지 말라는 선인들의 체세 교훈에 짓눌린 나머지, 아픔을 겪으면서도, 부당함을 마주하면서도 견뎌보는 게 일반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이었다. 관계를 정리한다는 건, 짧거나 긴 추억의 궤짝에 톱날을 들이대는 일과 같아서, 대개는 그 문 앞에서 망설이다 제풀에 지쳐가곤 했다.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자책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못 견뎌 했다. 그래서 맘에도 없는 적재적소의 사회적 아바타를 만들어 관계 유지나 그것의 확장을 도모하는 데에 바쁘게 동참했다. 모든 게 허깨비놀음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거나 파국을 맞은 뒤에나 알 것이었다.
뜻밖의 카프카 30~ 1, 김살로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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