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디언 2차] 현기증·감정들도 같이 읽어 봅시다

D-29
한 세기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여 벨은 스칼라 극장에서 다시 한번 <비밀결혼>을 보았으나, 무대장치의 완벽함과 카롤리네 역을 맡은 여배우의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브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주인공들과 동일시할 정도의 깊은 감동은 얻지 못했다. 동일시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음악이 도리어 그의 심장을 말 그대로 부서뜨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연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18,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벨은 스탕달이라고들 합디다. 그런데 왜 작가는 스탕달이라는 잘 알려진 이름을 제시하지 않고, 벨이라는 친근하고 짧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아니 만약 스탕달이라는 이름을 바로 썼으면 어땠을까요. 아마 스탕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 지식과 그의 수많은 작품들 그리고 그의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초상화가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한 예술가 (나름 유명한) 의 인생을 어떻게 축약시킬 것인가에 대해 제발트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걸까요. 이야기는 기억의 예술입니다. 기억은 주관적 재구성이고 이야기는 재현의 재현의 재현의 재현입니다. 수많은 재현을 거듭하는 동안 진리 여부의 문제는 사라지고, 이떻게 기억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가. 그러한 재구성은 어떠한 욕망과 뒤틀린 바램 속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미래를 향한 의지를 반영하는가 의 고민이 남습니다. 이 어떻게의 문제이자 과정이 우리가 책을 읽는 경험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그 배는 아마도 방금 부두에 도착한 듯이 보였는데,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해내는 중이었다. 들것은 보풀이 인 커다란 꽃무늬 비단천으로 덮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담 게라르디는 기분이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당장 리바를 떠나자고 말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27,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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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벽님의 문장 수집: "그 배는 아마도 방금 부두에 도착한 듯이 보였는데,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해내는 중이었다. 들것은 보풀이 인 커다란 꽃무늬 비단천으로 덮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담 게라르디는 기분이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당장 리바를 떠나자고 말했다."
이 부분은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사냥꾼 그라쿠스>를 연상하게 하네요
어딘가를 끝없이 떠돌며 여행하는 자인 그는 또다시 마차에 앉아 아름다운 풍광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방금 쟁취한 것과 같은 승리의 환희는 그 어떤 다른 일에서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17,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초라하고 흐릿한 기념비는 마렝고 전투를 상상할 때마다 그를 장악했던 요동치는 광폭함과도, 마치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 인간처럼 홀로 서 있는 이 끝없는 시체 들판의 광막함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1,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산 정상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사방에는 오직 거센 바람과 수평으로 휘몰아치는 사나운 눈송이들, 그리고 집들의 지붕을 뚫고 활활 솟아오르는 화염의 혓바닥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5,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어둠이 덮이며 사물의 색채가 단계별로 희미해지는 기이한 어스름의 순간을 보았으며, 잊을 수 없는 고요한 시간을 체험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6,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타인의 육신에서 본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과 멀어지게 될 뿐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6,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알바노 호수 위쪽에 있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의 정원, 두 그루 멋진 나무가 드리우는 쾌적한 그늘 아래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벤치에 앉은 그는 최근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지팡이로 한때 사랑했던 여인들의 이니셜을, 비밀에 싸인 그의 인생을 불가해한 룬문자로 기록하듯, 땅바닥에 느릿느릿 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9,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오벽님의 대화: 이 부분은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사냥꾼 그라쿠스>를 연상하게 하네요
<사냥꾼 그라쿠스> 첫 쪽의 구절과 거의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해당 구절 옮겨 놓습니다. "뱃사공이 밧줄을 꺼내 배를 정박하는 사이에 은 단추가 달린 짙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술이 길게 늘어진 꽃무늬 비단 천으로 덮인 들것을 옮겼다. 그것에는 분명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죽음, 테마명작관 7, 프란츠 카프카 지음, 국세라 옮김, 출판사 에디터, 165쪽)" <사냥꾼 그라쿠스> 역시 매우 짧은 이야기인데 카프카 작품 답게 뭔 이야기지 하면서도 끌립니다.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을 읽었습니다. 짧은 분량인데 뭘 말하려는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기억이란 믿기 힘든 것이다' 하는 생각을 주장하는 것도 같고, 벨, 즉 스탕달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전쟁이 이후 그의 삶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주는 것도 같고요. 과연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을 말한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짧아서 두 번 읽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뭘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을 삽입해서 이후 뭔가 관계를 엮어 이야기를 전개하겠다는 뜻을 내비쳐서 더 긴장하게 만듭니다. 남은 세 작품을 다 읽어봐야 저자의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눈치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지난 번 읽었던 <이민자들> 보다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벨은 여행지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모사한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그림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상과 기억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릴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파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1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전장의 풍경과 실제로 그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전장 풍경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므로, 예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모종의 현기증, 어떤 광적인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20-21,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그때 마담 게라르디는,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26,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죽은 나뭇가지를 기적의 예술품으로 만드는 그 오랜 결정화 과정은, 우리 영혼의 암염광산에서 성장해가는 사랑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졌다고 벨을 묘사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28,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일방적이게도, 신과 함께하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어떤 것도 그 행복과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그는 그만 소름끼치는 충격에 휩싸여버렸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30,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다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라는 문구에서 <이민자들>에서 실제 진실(사실)과 문학적 기억(허구)의 대조를 통해 만든 작품이었다면 이번 <현기증, 감정들>도 그 궤를 비슷하게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존인물이었던 스탕달을 차용한 것도 그렇고, 삽입된 그림, 사진들도 실제 진실이 아닌 기억이니까요. 그런데 저한텐 확실히 이 사실과 다른 기억들을 통해 제발트가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 <이민자들>보단 어렵게 느껴지긴 했습니다ㅎㅎ;; 벨이 사랑했던 여자들을 조합한 마담 게라르디가 신과 함께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로 그녀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부분에서 벨이 추구했던 '사랑의 결정화 과정'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더라구요... 한 예술가를 차용하여 그의 삶과 사랑을 재구성하여 문학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제발트가 말하고자 한 사랑과 욕망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고민 또한 들었습니다.
1부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짧은 분량이었음에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다가오지 않아, 두 번 읽은 게 저만 그런 게 아니군요 !! 다른 책의 경우,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넘어가는 편인데, 제발트는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쓰기 위해 젊은 시절 충분히 연습 과정을 겪고서 40대에 이르러 소설을 내기 시작했다는 점과 그가 늘 원고 수정 과정에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문장을 뜯어 고쳤다는 일화를 들었기에 수수께기를 푸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의문을 품고 책장을 뒤적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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