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디언 2차] 현기증·감정들도 같이 읽어 봅시다

D-29
일단 88쪽에 나오긴 합니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고, 차를 탈때마다 멀미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처럼, 다시금 그와 유사한 까마득한 현기증이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앗 다시 책을 펼쳤는데 101쪽에도 나오네요 "그러나 이러한 현기증날 만큼 행복한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며, 금방 이성을 되찾아 루치아나에게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현기증'을 관념적인 은유나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나 주변 공간에 대한 왜곡된 신체 감각을 느끼는 증상이라고 본다면,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관통하고 서로 묶어주는 문학적 일관성을 느끼게 됩니다. 화자는 각각의 인상이나 이미지에서 그리고 고유명사와 지명들에서, 그것들이 불러내는 다른 시간과 공간의 감각과 마주합니다. 각 장들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가 서로를 복잡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벨, 리바 호수, 베네치아, 카사노바, K박사, 사냥꾼 등 많은 단어들이 나타나며 이미 읽었던 내용들을 상기시키고 이후에 나올 내용들을 암시합니다. 마치 술자리 게임에서 여러 개의 손가락이 어지럽게 교차하며 공허히 서로를 가르키는 조용한 순간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의 상호참조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기억 자체가 우연하게 나열된 이미지들에 일관성과 인과성을 부여하는 정체성 형성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기억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책이 그가 출판한 첫 번째 산문이라고 한다면, '귀향' 이라는 테마로 책이 마무리되는 것도 의미심장 합니다. 대부분 그의 산문들이 삶에 대한 진부한 은유인 '여행' 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생각할 때, 작가의 시작인 남부독일 고향으로 갔다가, 이민자로서 또 다른 삶의 터전인 영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영원한 윤회이자, 정착하지 못하는 고독한 삶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K박사가 어두컴컴한 실내와 환한 외부를 연결하는 출입구의 문지방 위에 선 순간, 비록 잠시 동안이지만 자신이 막 빠져나오고 있는 그 출입문을 통해서 똑같은 성당의 문으로 다시 들어서고 있는 듯한, 이 장소가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정도로 무수한 개체로 끝없이 늘어나며 자기 분열을 일으키던 바로 그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142,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가 인식하기에 광증과 실제로 맞닿아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검은색 나폴레옹식 사령관 모자를 그 자신의 자의식 위에 씌워주는 일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p.151,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다른 분께서 말씀하신 <사냥꾼의 그라쿠스>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ㅠㅠ 카프카가 리바 온천여행에서 알게된 자살한 퇴역 장군이 스탕달의 연구자임이 밝혀지면서 1부와의 연관성이 드러났습니다. 리바를 여행하면서도 1,2부에서 느껴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제발트가 스탕달-카프카-화자를 연결하면서 이방인으로서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는 시간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귀향> 파트를 읽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ㅎㅎ...;; 카프카 <사냥꾼의 그라쿠스>부터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ㅠㅠ
그때 마담 게라르디는,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타인의 육신에서 본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과 멀어지게 될 뿐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26p,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그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으리라. 적어도 나는 품위 있게 추락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은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법. 말하자면 그라이펜슈타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제 옛날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43p,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한동안, 오타크링의 로렌츠만들가세 골목에 있는 할머니의 시영주택 부엌 설거지통 아래에 놓여 있던, 절반쯤 비어 있었으며 할머니가 이제는 영영 사용할 수 없는 푸른색 이슐러 소금통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48p,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마지막 편인 '귀향'도 다 읽었습니다만, 여전히 저에게는 이 산문들이 오리무중입니다. ㅠㅠ 누구나 뭔가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잖아요. 성공하지 못할까봐, 친구들보다 못 살게 될까봐, 소외될까봐, 집을 장만하지 못할까봐, 지금 쥐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외로워질까봐, 죽을까봐, 사후에 고통을 받을까봐 등등 여러 불안이 있을 거에요. 제발트는 여행을 하면서 아무리 하찮은 풍경이라도 그냥 넘기지 않고 눈여겨 보면서 사물들과 과거의 기억에 그 불안한 마음을 투영하는 것 같아요. 문장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도저히 흉내내기 힘든 개성이 있고요. 제발트는 카프카가 느낀 불안과 소외에 대해서는 100퍼센트 공감한 듯 카프카의 작품을 자신의 글에 적극적으로 변용하죠. 그런데, 제가 느끼는 불안감과 제발트가 느끼는 불안함의 결이 조금 다른가봅니다. 크게 공감이 되거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죠. 공감한 제발디언들은 제발트가 귀향했던 길을 따라 답사도 한다던데, 저는 제발디언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차에 비해 2차가 더 고비인 것 같습니다. 모임장께서 <이민자들>을 더 먼저 출간된 <현기증.감정들>보다 순서를 앞당긴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참, 206~207쪽에 있는 긴 강과 높은 산을 한 번에 그린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이 마치 신경세포처럼 보이더라구요. 이 그림이 이 산문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ㅎㅎ
저도 지금 '귀향' 읽고 있는데 밥심님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저도 왜 모임지기님이 '이민자들'부터 선택하신지 알겠어요. 안 그래도 졸기대왕인 제가 두쪽 읽고 졸고 또 졸고 하면서 읽고 있거든요. ㅎㅎ 근데 이상한 매력이 있습니다. 별로 지루하지는 않아요. 저 풍경이나 사물 묘사하는 글을 잘 못 읽거든요. 근데 이 책은 묘하게 계속 읽게 됩니다.(그렇다고 안 졸리는 건 아님) 오늘 중으로 완독할 거 같습니다!
아도르노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대상의 수많은 면을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하려는 헤겔식 '이성' 개념을 비판한다. '개념 아닌 것'(고정되지 않는 운동성)을 '개념'(고정)화 하려고 하는데서, 대상의 여러 가지면을 동일화하여 하나의 모습으로만 보여주게 되는 '동일화의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시간에 따라 '대상'은 무수히 많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개념화할 때는 오직 하나의 모습만을 고정하여 나머지는 그 하나에 다 맞추어버리게 된다. 마치 개인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지니지만 국가가 질서라는 명목으로 하나의 기준을 요구할 때 나타나는 폭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념'은 어떻게 '폭력'을 저지르지 않고서, '대상의 변화하는 모습'(개념 아닌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개념으로 대상을 표현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반성)'를 통해 가능하다고 아도르노는 말한다. (중략) 하지만, 평소의 우리는 이런 시도들을 하지 못하고, '기존 동일화된 개념의 사고체계'에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어떤 '계기'를 통해 '충격'을 받고 '현기증'을 느끼게 될 때에야, 우리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변화하는 대상의 다른 면을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반성으로 동작하는 '개념의 운동'과 '변화하는 대상'의 순간적인 일치가 '섬광'처럼 스쳐지나가고,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깨달음('짜임; 성좌')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나무위키 <테오도어 아도르노> 편에서- 제발트가 아무래도 독일 배경을 가지고 있다보니, 아도르노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의 부정변증법 개념에서 다음과 같은 '현기증'이란 단어가 나온 내용이 있어 인용해봅니다
카사노바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생각한다.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때는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57p,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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