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또 길가에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죽은 말들과 군대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그런 전쟁쓰레기들을 보면서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노라고 쓰고 있다. 눈에 들어온 실제의 인상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추상적 이해력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는 것이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11,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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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과 기억은 전혀 다르다.
『현기증.감정들 (양장)』 12,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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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 벨은 쓰기를, 오랫동안 자신은 그날 말 위에서 보았던 광경을 세밀한 것 하나하나 그대로 다 기억한다고 믿고 있었노라고 했다. 특히 점점 희미해지는 빛 속에서 멀리 도시 이브레아가 약 1킬로미터 거리 밖에서 최초로 윤곽을 드러내던 광경이 생생하다고 말이다. 그 도시는 계곡이 서서히 넓어지면서 시작되는 평원의 약간 오른편에 있었고, 왼쪽 저 먼 곳에 치솟아 있던 산들은, 나중에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게 될 레코의 레세고네 산, 그리고 가장 뒤편으로 보이는 봉우리는 분명 몬테로사 산이었을 것이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12,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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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 벨은 여행지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모사한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그림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상과 기억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릴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파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1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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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저는 이 단락이 흥미로웠는데요, 이미지는 기억을 보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대체하고 규정한다는 점에서 제발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특히 기억의 내용이라기보다 그것이 서술되는 방식인데 거리, 지형의 배열, 그리고 특정 산의 이름까지 호출되는 정밀한 서술은 기억의 생생함을 보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이미 어떤 외부의 인식 틀—가령 지도적 좌표나 지리적 지식—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오벽
“ 그래서 벨은 여행지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을 모사한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그림들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인상과 기억을 순식간에 장악해 버릴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파괴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p.13,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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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벽
여기서는 단순히 그림들을 사지 말라고 할 뿐입니다. 더 나아가 요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드라마, 영화, 유튜브 등, 모든 연출된 영상들이 독자들이 산문을 감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장면을 묘사한 구절을 읽을 때, 머리속에서 어디선가 보았던 영상이 재생되는 걸 더 이상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영상은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어떠한 인상과 이미지와도 다를 수 있습니다.
오벽
그래서 제발트는 삽화나 수정되고 조작된 이미지들을 삽입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동영상의 시대에 작가는 자신이 작성한 테스트에 조응하는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독자가 그 텍스트를 통해 재생하는 이미지와 영상에 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할 수 있습니다. 결국엔 이야기를 쓰는 방식,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 그것을 수용하고 감상하는 독자의 방식에 새로움을 가져옵니다.
꽃의요정
저도 이 문장 수집했어요. 달사진이나 불꽃놀이 사진도 그런 거 같아요.
오벽
“ 그 믿음이 얼마나 가슴을 옥죄어왔던지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마음을 졸이던 그 두 눈에는 자꾸만 눈물이 가득 고였고, 엠포레움 극장을 떠날 즈음에는 카롤니네 역을 맡은 여배우가 공연중 그에게 한 번 이상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으며 음악을 통해 그에게 약속했던 그런 환희를 실제로 베풀어주리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p.14,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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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벽
“ 한 세기가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여 벨은 스칼라 극장에서 다시 한번 <비밀결혼>을 보았으나, 무대장치의 완벽함과 카롤리네 역을 맡은 여배우의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브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주인공들과 동일시할 정도의 깊은 감동은 얻지 못했다. 동일시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음악이 도리어 그의 심장을 말 그대로 부서뜨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연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p.18,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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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벽
벨은 스탕달이라고들 합디다. 그런데 왜 작가는 스탕달이라는 잘 알려진 이름을 제시하지 않고, 벨이라는 친근하고 짧은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아니 만약 스탕달이라는 이름을 바로 썼으면 어땠을까요. 아마 스탕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전 지식과 그의 수많은 작품들 그리고 그의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초상화가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오벽
한 예술가 (나름 유명한) 의 인생을 어떻게 축약시킬 것인가에 대해 제발트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걸까요. 이야기는 기억의 예술입니다. 기억은 주관적 재구성이고 이야기는 재현의 재현의 재현의 재현입니다. 수많은 재현을 거듭하는 동안 진리 여부의 문제는 사라지고, 이떻게 기억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가. 그러한 재구성은 어떠한 욕망과 뒤틀린 바램 속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미래를 향한 의지를 반영하는가 의 고민이 남습니다. 이 어떻게의 문제이자 과정이 우리가 책을 읽는 경험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오벽
“ 그 배는 아마도 방금 부두에 도착한 듯이 보였는데, 은색 단추가 달린 검은 옷차림의 두 남자가 들것 하나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해내는 중이었다. 들것은 보풀이 인 커다란 꽃무늬 비단천으로 덮여있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담 게라르디는 기분이 좋지 않아 그 자리에서 당장 리바를 떠나자고 말했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p.27,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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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벽
이 부분은 뒤에서도 나오겠지만 <사냥꾼 그라쿠스>를 연상하게 하네요
밥심
<사냥꾼 그라쿠스> 첫 쪽의 구절과 거의 같습니다.
참고하시라고 해당 구절 옮겨 놓습니다.
"뱃사공이 밧줄을 꺼내 배를 정박하는 사이에 은 단추가 달린 짙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술이 길게 늘어진 꽃무늬 비단 천으로 덮인 들것을 옮겼다. 그것에는 분명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죽음, 테마명작관 7, 프란츠 카프카 지음, 국세라 옮김, 출판사 에디터, 165쪽)"
<사냥꾼 그라쿠스> 역시 매우 짧은 이야기인데 카프카 작품 답게 뭔 이야기지 하면서도 끌립니다.
코뮹
인용 감사합니다!! 저도 얼른 이번 주 내로 <사냥꾼 그라쿠스>를 읽어 봐야겠어요.
코뮹
“ 어딘가를 끝없이 떠돌며 여행하는 자인 그는 또다시 마차에 앉아 아름다운 풍 광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방금 쟁취한 것과 같은 승리의 환희는 그 어떤 다른 일에서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잠긴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17,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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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 초라하고 흐릿한 기념비는 마렝고 전투를 상상할 때마다 그를 장악했던 요동치는 광폭함과도, 마치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 인간처럼 홀로 서 있는 이 끝없는 시체 들판의 광막함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
『현기증.감정들 (양장)』 21, W. G. 제발트 지음, 배수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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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뮹
“ 산 정상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사방에는 오직 거센 바람과 수평으로 휘몰아치는 사나운 눈송이들, 그 리고 집들의 지붕을 뚫고 활활 솟아오르는 화염의 혓바닥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
그렉 이건 <잠과 영혼> 하드SF의 정수생명, 경계에 서다 - 양자생물학의 시대가 온다마음의 그림자 :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로저 펜로즈의 양자역학적 의식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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