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7.더 이상 평안은 없다, 치누아 아체베

D-29
크리스토퍼가 제대로 된 영어로 말하는가 아니면 '엉터리' 영어로 말하는가 하는 것은 무슨 말을 하는가, 어디서 말하는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은 대부분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적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토요일 밤에는 한층 더 그랬다. 하지만 크리스토퍼의 경우에는 이중적인 유산과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일에 다소 특출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6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소재였던 언어의 사용(영어, 이보어)이 다시 한 번 언급되는군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메세지의 전달을 넘어 화자가 상대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지 또는 어떻게 보이고 인식되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걸 짚습니다. 이 작품에서 영어는 이보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 즉 서구적인 관념이나 개념을 설명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동시에 나이지리아에 서구적 요소가 융화되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라고스/우무오피아의 사람들은 계층이나 계급, 전통에 대한 사고관, 현대적 가치가 조화롭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 묶여있다는 느낌을 주죠. 오비의 집안에 있던 하인들, 도시 곳곳에 묘사되는 하층민들의 삶도 그렇고 오비가 사용하고 인식하는 개념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음이 소설 전반에 걸쳐 반복됩니다.
"만일 아가씨가 자네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겠다고 제외하면 그건 뇌물이 아니야." 크리스토퍼가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좀 작작 하시게." 오비가 대답했다. "자넨 정말로 고등학교를 갓 나온 후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어린 소녀의 약점을 이용하는 게 아무런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자넨 너무 감상적이란 말이야.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라온 아가씨는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가 아니야. 빈칸을 적어 넣으라고 용지를 받아 든 한 아가씨의 이야기와 똑같다니까. 그 아가씨는 이름과 나이를 적어 넣었고 그러다가 성이라는 항목에 이르자 ‘일주일에 두 번’이라고 썼다는 거야." 오비는 큰 소리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76~177,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그렇지만 어쩌면 그 아가씨는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지 않은 사람이 적어도 단 한 명은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아가씨는 자네에게 성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77~17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뭘 알아냈지?" "오수라는 거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결혼할 수 없는지 그 까닭을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저는 그런 점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는 기독교도잖아요." 깜짝 놀랄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말은 어느 정도 효험이 있었다. 잠깐이긴 했지만 일시적으로 침묵이 흐른 다음 다소 부드러워진 어조로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기독교도다."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오수와 결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성경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잖아요."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9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이삭 오콩코(은워예)는 아버지 오콩코에게서 벗어나 서구문물을 접했음에도 전통이 남긴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전환기의 전형적 인물 같네요. 전작에서 그는 식솔이자 친국였던 이케메푸나를 죽이게 만든 아버지 그리고 가혹했던 전통사회를 거부하고 떠났죠. 어쩌면 이삭은 진짜로 기독교와 서구적 가치가 자신에게 맞거나 좋아서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전통에 적응하지 못해 제2의 대안으로 기독교를 택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 오콩코는 자기 아들이 물러터지고 약하다고 항상 걱정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죠. 차라리 이케메푸나나 다른 딸들이 아들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품곤 했고요. 이삭이 설령 마을과 가족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남아 살았더라도 이래저래 우무오피아에 녹아들 수 없는 경계선 밖의 인물이 되었을 거라고 봐요. 아이러니합니다. 전통이 싫어서 떠난 사람이 여전히 전통에 얽매여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게 바뀔 거예요. 십 년 후에는 지금과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질 거예요."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94,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유니스는 유일하게 집에 남아 있는 막내딸이었다. 요즘의 세상살이는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녀들은 늙은 부모가 사는 고향집을 떠나 돈을 찾아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여덟 명의 자식이 있는 늙은 여인으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강물이 있는데도 침을 뱉어 손을 씻는 격이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9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진다>는 권장 진도에 맞춰 읽었었는데, 이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두번째 주에 다 읽었거든요. 그러다보니 후반부에 토론 참여가 좀 부족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같이 읽을 수 있어서 더욱 재미있었어요. <신의 화살>까지도 기대됩니다!
부정한 사회에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양심이 개인의 도덕성 문제를 넘어 어떤 지위와 자리에 있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소설이었어요. 저도 제가 오비의 상황에 놓였더라면 뇌물을 받지 않고 양심을 지킬 수 있었을지 장담을 못하겠더군요. 돈이 돈을 번다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돈이 돈을 잡아먹는 상황의 묘사도 기억에 남고요. 후반부로 가면 점점 시한폭탄이나 알람처럼 쉬지 않고 뭔가를 납부해야 하는 대목들이 나오는데 읽는 제가 숨이 막혔습니다. 경제적 지위나 수입이 늘어나도 그에 비례하여 지출도 늘어난다고 하죠. 다른 고향사람들이 보면 부러워 할만한 위치임에도 품위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가는 비용을 보며 오비가 경제적으로 쫓기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는 그 경제적 위기가 정신과 마음상태, 타인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도 그랬고요. 36p의 대사가 이 책의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 같습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는 뇌물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뇌물을 주지 않고도 곧장 꼭대기까지 올라가잖아. 그 사람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게 아니야. 단지 그들은 고결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심지어 그런 식의 고결함도 습관이 될 수 있단 말이야." 한달간 참여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 회차 모임에서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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