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아프리카, 흑인문화를 따라 - 07.더 이상 평안은 없다, 치누아 아체베

D-29
기독교도는 아니었지만 오독구는 기독교에 대해 한두 가지는 알고 있었다. 우무오피아의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 년에 한 차례 수확기에 예배에 참석한다. 기독교 예배에 대하여 그가 유일하게 비판하는 한 가지는 회중이 설교에 대해 대꾸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오독구가 특별히 좋아하고 이해하는 것 중 하나는 찬송가에 나오는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이란 구절이다. 오독구는 종종 말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나갈 거야. 작위를 가진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사람이 올 때처럼 되돌아갈 수 있도록 작위를 나타내는 발찌를 잘라 준다네. 태초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끝에도 이루어질 거라는 기독교도들의 말은 정녕 맞고말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80-81쪽,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한창 때에 이들은 정말로 대단했지. 오늘날엔 대단하다는 의미가 바뀌었지만 말이야. 직함도 더 이상 대단한 게 아니고 곡식 창고도 아내가 여럿 있는 것도 자식이 많은 것도 더 이상 대단한 게 못 되는 세상이야. 요즘은 위대함이 백인의 물건 속에 들어 있지. 그래서 우리의 견해도 바뀌고 말았잖아. 아홉 마을을 통틀어 우리가 제일 처음으로 우리의 자손을 백인의 나라에 보냈던 거야. 아주 옛날부터 위대함은 이구에도에 속한 것이었어. 그건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야. 얌이나 옥수수는 심을 수 있지만 위대함은 심을 수 없는 것이니까. 숲의 왕자라고 할 수 있는 이로코 나무를 도대체 누가 심었단 말인가? 이 세상에 있는 이로코 종자를 모두 모아 땅을 파고 심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에 불과할 거야. 위대한 나무는 자기가 자랄 곳을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저 그것을 발견할 뿐이지. 사람의 위대함도 이와 똑같은 이치란 말일세.
더 이상 평안은 없다 83-84쪽,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백인을 내동댕이친다는 것은 마치 조상의 영혼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는 것과 똑같았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9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짧은 문장이지만 우무오피아의 가치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 수집했습니다. 전작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도 나오지만 마을의 중요한 어른과 원로들이 분장했던 가면극은 매우 신성하고도 엄숙한 자리였죠. 조상의 영혼을 불러내 현세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구였기에 가면은 두려움과 공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감히 누구도 가면을 쓴 이들의 앞을 가로막거나 말을 걸 생각도 못했죠. 하지만 이제는 백인이 그 경외의 위치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보인의 가치관을 바꾼 건 전쟁이나 무력이 아니라, 돈과 서구문화가 가져온 상류층의 향락이라는 점이 눈에 들어오네요.
"제 생각에는……." "오모 씨, 당신에게 봉급을 주는 것은 말이지 생각하라고 주는 게 아니라 지시받은 걸 하라고 주는 거요. 분명히 알아들었소? 즉시 그 서류를 나한테 보내시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99,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난 오수란 말이에요." 그녀는 엉엉 울었다. 침묵이 흘렀다. 클라라는 울기를 멈추더니 차분하게 오비로부터 떨어졌다. 여전히 오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혼할 수 없단 말이에요." 아주 단호하게 클라라가 말했다. 끔찍하게도 쾌활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어조였다. 단지 눈물만이 그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07,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너는 공부는 좀 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결코 지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자네 오수가 뭔지나 알아? 아니, 자네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조셉의 그 짧은 질문은 기독교 집안의 양육과 유럽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오비가 자기 나라에서 이방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취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오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자네가 지금 하려고 하는 건 말이지 자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자네 전 가족과 다음 세대까지 관계되는 일이야. 한 손가락에 기름이 묻으면 다른 손가락도 더럽게 된단 말이지. 앞으로 우리 모두가 개화되면 누가 누구하고 결혼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되겠지. 하지만 아직 그런 때가 오지 않았단 말이야. 이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단지 선구자에 불과하다고." "선구자가 뭐지? 길을 보여주는 사람이잖아. 내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단 말이야."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1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저는 원서로 읽는 중인데, 5장에서 오콩코가 면접 후 버스를 타고 우무오피아로 가다가 버스 기사가 뇌물을 주는 장면에서 "What an Augean stable!"(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이군!)이라고 말합니다. 위에 문장모음을 참고하니 "정말로 썩을 대로 썩었군!"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에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청소"가 있어요. 수천 마리 소의 분뇨가 쌓인 외양간을 강물을 돌려 하루 만에 청소해야 하는 과업인데, 오비는 오랫동안 썩은 부패 구조를 의미하는 말로 이 표현을 사용했어요. T.S.Eliot 등 여러 영미문학 소설가/시인들을 언급하는 모습과 더불어 오비가 식민지 엘리트 교육을 받아 고전 수사학에도 익숙하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 같습니다. 그에 비해 버스 기사는 too know (아는 체 하는), book people (교육받은 엘리트) 등 제대로 된 영어가 아닌 Pidgin English(피진영어)를 쓰는 대비가 흥미롭습니다.
번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원서만의 표현법에서 오는 차이가 재밌네요. 말씀하신 대로 아프리카 출신임에도 오비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지식을 언급하는 것을 통해 그의 교육수준과 어느 정도 서구화된 사고관을 엿볼 수 잇는 장치기도 하고요. 이 책을 읽다 보니 몇 가지의 어떤 소재 또는 주제 의식이 반복되는 게 보였는데 그 중 하나가 언어의 사용이죠. 이보어와 영어, 피진어를 오가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계급과 사회의식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특히 클라라와 다시 배에서 만난 후 그녀에게 멀미약?을 받아 먹을 때 클라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영어와 이보어를 번갈아가며 오비에게 말하죠. 이보어는 타지에서는 고국과 동포를 상징하는 그리움과 반가움의 장치이면서도 또한 우무오피아 안에서는 백인이나 외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스런 암호처럼 작동합니다. 반면 영어는 오비를 비롯한 중상층 이상의 계급들이 보다 전문화 되고 공적인 대화를 해야 할 때 쓰는 경우가 많죠. 오비나 클라라가 피진어를 쓰는 걸 본 기억은 없지만, 작중 묘사를 보면 상류층이 사용하는 언어는 아닌 듯 하고요. 우무오피아에 혼재된 인종과 의식구조, 계급에 주목할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언어의 혼용을 통해 당시 여러 가치가 서로 뒤섞여 자리잡지 못한 이보족 사회의 혼란스러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네요.
66p에 오비가 고향으로 가고자 작은 트럭에 올라타는 대목에서 트럭의 이름이 나옵니다. '절대로 항소 못하는 하나님의 사건(God'scase No Appeal)'이라고 그림과 함께 언급되죠. 좀 특이한 이름이다 싶어 찾아봤는데 정의나 구원, 삶과 죽음에 있어 속세의 인간이 내리는 판결은 항소를 통해 뒤집힐 수도 있으나 신의 판결은 절대적이며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 개념이라고 하네요. 즉, 재심이나 번복의 여지가 없으며, 말 그대로 최종선고를 뜻하는 내용인데요. 성경에서는 인간 세상의 재판의 결과가 때론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유리하게 나온다고 하여 그것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법은 공정해 보여도 결국 인간이 만든 도구이며, 그 법 앞에서 사람은 여전히 개인적인 욕망과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은 억울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므로 본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세상과 법조계는 썩어 빠졌다고 불만을 가지거나 화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속세의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지금 보기에는 유리한 판결을 받아 죄를 피해가거나 처벌을 가볍게 받는 것 같고 또 누군가는 고통을 구제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최후에는 올바른 신이 내리는 판결을 절대 피해갈 수 없다는 얘기라고 해요. 트럭 안에서 오비가 뇌물 수수의 현장을 알아차리고 지켜본 해당 페이지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명칭입니다.
God'scase No Appeal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에 나이지리아의 댄 풀라니(Dan Fulani)라는 작가가 낸 소설도 있습니다. 책의 내용은 법정 변호사 준비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간 테오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요. 돌연 그는 결정을 뒤바꿔 자기 고향의 족장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옵니다. 당연히 고향에서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격던 테오는 어느 날 집에서 하인을 고용한 뒤로 삶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합니다. 이 하인은 나이지리아의 토착 주술을 주인에게 걸었는데 그 영향으로 테오의 아내는 의문사를 당하고, 자식들은 범죄에 빠져들며, 마을 주민들은 잊혀진 옛 주술신앙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내용인데요. <더 이상 평안은 없다>가 1960년에 나온 작품임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생각도 드네요. 영국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유망한 직업을 위해 유학을 다녀온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플롯도 비슷하고요. https://www.hachette.co.uk/titles/dan-fulani/hodder-african-readers-gods-case-no-appeal/9780340940372/
오, 원서 문장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각주로 간단히 부연 설명을 달아주고 말이죠.)
자신을 어떤 유형의 사람으로 오비가 생각하는지 그린 씨가 알고 모르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그린 씨는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앞잡이를 통해 그런 사실이 알려지게 할 생각은 없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25~12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청렴결백하기는 아주 쉬웠다. 그저 "아무개 씨,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이런 논의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면 되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3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대학 학위는 현자의 돌이었다. 대학 학위 하나가 일 년에 150파운드를 받는 3급 사무원을 570파운드 연봉에 자동차를 굴리고 보잘것없는 집세를 내면서도 사치스러운 가구가 비치된 구역에서 살아가는 고급 공무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실제로 봉급이나 문화적 설비의 불균형이 단지 이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유럽인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유럽인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일반 대중의 위치에서, 칵테일파티에서 "요즘 자동차가 잘 굴러가는가?"라는 한참을 나누는 엘리트 그룹으로 신분 상승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36~137,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결국 돈을 제공하는 것은 몸을 제공하는 것만큼은 나쁘지 않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그 아가씨한테 마실 것도 주고 시내까지 자동차로 태워다 주었잖아요." 클라라는 깔깔대고 웃었다. "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요." 오비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40,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그들은 오비를 영국에 보내기 위해 800파운드를 모금하느라 잔인할 정도로 과도한 회비를 지불했었다. 어떤 회원은 한 달 수입이 5파운드도 되지 않았다. 오비의 한 달 수입은 거의 50파운드였다. 그들에게는 아내도 있고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도 있지만 오비에게는 아내나 자녀가 없다. 20파운드를 지불하고 나면 그에게 30파운드 정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가 받는 이자만도 일부 사람들의 봉급만큼 될 것이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45,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훌륭한 엘리트 가운데에 자기 친족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땀과 눈물로 고생한 그들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구성원끼리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요즘 자네 자동차는 잘 굴러가는가?"라는 말을 주고받는 상류 클럽의 일원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 설마 그들은 기가 막히게도 오비가 "미안해요. 하지만 제 자동차는 요즘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보험료를 지불할 돈이 없거든요."라고 대답하리라 기대했겠는가?
더 이상 평안은 없다 p.14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책을 읽다 보면 이전 작품에서 나왔던 속담이 자주 나오는데 오늘 도서관에 들러 몇몇 부분을 더 찾아봤습니다. 95p에서 오비가 가족을 방문했을 때 그의 언니 아그네스가 아이 이름을 먼저 부르지 않고 데려가려 하자 잔소리를 하는 대목이 있죠. 이때 오비는 아이를 갑자기 데려가면 잠에서 깨기 전에 몸으로 영혼이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하는데요. 뭔가 익숙해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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