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오디세이 2026] 5. 죽은 다음

D-29
쪽방촌에 가면 어르신들이 장례를 꼭 치르고 싶어 하세요. .... 장례를 치르면 그게 낙인이 되니까요.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그 가족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풍토가 있으니까. 장례를 장례 조문 봉사 온 분들도 그런 말을 하세요. '잘 살았으면 장례를 치를 사람이 있겠지.' 아니요. 장례를 치를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거죠. ...... '잘 살아왔다면'에 담긴 의미는 '가족 유지'이다. 잘 살았다면 왜 가족이 없겠냐는 말이다. ...... 이 사회는 (정상)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을 건전하고 바른 시민의 전형적 모습이라 여긴다. 가난하고 혼자인 노년은 건전한 시민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한, 그리하여 낙인과 함께한 인생이다. 장례까지 치르지 않는다면 낙인은 더 강력해진다. 인생의 마침표가 낙인이라니.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2, 희정 지음
죽음도 되게 묵직한데 존엄이라는 말까지 겹쳐지니까, 더 무거워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존엄이지 않을까 해요.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3, 희정 지음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과 죽은 이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에요.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죽은 후에도 관계 맺기가 계속되는 거죠.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3-284, 희정 지음
돌봄의 영역이 복지로 제도화되고 있어요. 이미 장기요양보험이 제도화된 것처럼, 장례도 돌봄의 맥락에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거죠.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5, 희정 지음
부모 눈에 어긋남 없는 조건이란 실은 이 사회의 시선에 들어맞는 조건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 희정 지음
얼마나 '좋은 자식'인지는 관혼상례 모든 단계에서 검증받게 마련이다. 특히 장례는 가정의례의 연말 시험 같은 위상이라고 할까. 노릇을 평가받는 중요한 시험대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 희정 지음
가족이 하나의 '투자 공동체'가 된 요즘, 자식 노릇은 더 강조된다. 능력주의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자녀라는 개별의 인적 자본은 자신의 투자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정상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아들딸의 역할이다. 장례는 투자 가능성을 가늠하고 가시적인 성과 배당을 확인하며 재생산하는 장으로 유지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291, 희정 지음
인생이 시험이어선 안 되는 이유는 시험에는 답을 채점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1, 희정 지음
역으로 누군가의 죽음은 세상의 문법을 뒤집어 보이는 질문이 생겨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타인의 장례 앞에서 사람들은 다가올 자신의 장례를 떠올린다. 그로써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때의 삶이란, 이전과 같은 삶이 아니다. 그가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어떤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다. "죽음에 슬퍼하는 자를 넘어, 그 이후를 살아갈 윤리적 주체"로 산 사람은 자신을 세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3, 희정 지음
애도는 기억함이다. 그가 살아생전 생성하고 형성해온 관계로 구성된 이 세계를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 자신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 사람들은 새로운 장례를 찾아 나선다.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4, 희정 지음
유언장을 쓰는 건 믿음 때문이다. 법적 효력과 무관하게, 내 유언장을 읽고 그에 따라줄 이가 있다는 믿음, 아니 바람이 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04, 희정 지음
어떤 관계들은 사회에서 이름을 얻지 못한다. .... 내가 맺는 관계가 설명되지 않으니 나답게 살기도 어렵다. .... 그러나 분명하게도 지금의 '나'는 내가 맺어온 관계의 총체이다. 수많은 인연과 관계가 나를 스쳐가는 동시에 머문다.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드는 건 지금껏 나를 나로 살게 한 모든 것이다. .... 어떤 장례가 치러졌으면 싶은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맺어온 관계와 공동체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나로서 죽을 수 있도록 지켜줄 이들이 내 옆에 있는가. 그 믿음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05-306, 희정 지음
인생이 시험장이라니. 과연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든 시험장인가. 왜 인생에서 탈락자가 생겨야 하나.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07, 희정 지음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구분과 구별이, 배제와 위계가 우리의 삶을 휩쓸지라도 우리는 그네를 타고 있다. 각자가 저마다의 그네를 밀어내기 위해 힘껏 발돋움한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오는 길에 인사를 한다. "고생했어."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07, 희정 지음
관계를 맺는 이유는, 잘 헤어지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생각해보니 안 헤어지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같이 있을 때 정말 다 누려야겠구나. 그런데 그걸 다 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애도를 거듭하는 거 같아요. 우리에겐 다음 관계가 또 생기니까요. ..... 애도는 살아가면서 계속되는 일 같아요.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26, 희정 지음
살았던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흠뻑 애도받기를.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30, 희정 지음
그러나 장례인들이 지키고자 한 신념이 있고, 그것은 몇 줄 짜리 짧은 지침으로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코로나19 사망자의 유족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을 테다. 그런 이들과 입관식을 같이 해준 장례지도사는 고인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끈이었다. 두어 평 남짓 안치실에서 장례지도사들은 고인과 함께 격리된 대상이기도 하지만 유일한 연결망이기도 했다. 모두가 죽은 자를 숫자로 대하고 있을 때, 그 숫자를 돈으로 치환하는 것도 장례업 종사자겠지만 그 숫자를 인간으로 전환하는 것도 결국 장례인이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37, 희정 지음
이전까지 이들은 없는 존재였다. 있어서는 안 되기에 없었다. 존재가 드러날 때 정책이 마련되고, 정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숫자가 필요하다. 이때 국가 단위 조사가 실시된다. 그러니 근대 국가가 생긴 이후 사람들의 투쟁은 국가가 통계화하는 '숫자'에 들어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만하다. 숫자에 속하지 않으면 삶도 죽음도 보장받을 수 없다. 죽지 않기 위한 모든 싸움이 숫자와 연결되었다. 그것은 성원권 획득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동시에 '숫자'로 머물지 않기 위한 분투가 이어졌다. 노숙인의 삶이 숫자로만 머물지 않게, 시설 장애인의 삶이 숫자로 갇히지 않게, 죽음이 '사망자 통계'로만 남아서는 안 되기에. 사는 건 투쟁이라더니 죽는 일도 그러했다. 죽음마저도 숫자 싸움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38, 희정 지음
실은, 이것은 위에서 말한 '카프네' 소설에서도 그렇고 이전에 읽은 BL 요리만화 '어제 뭐 먹었어?'에서도 그렇고 일본에서는 성소수자 커플들 간의 법적 가족 관계의 효력을 갖게 할 만한 대안으로 '파트너십 조례' 및 '양자 결연'의 방식이 채택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비슷한 제도가 없는 건가요?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양자 입양의 제도를 이용해야하는 현실도 씁쓸하지만;;;
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2025년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의 《카프네》가 출간되었다. 일본 전역의 서점 직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책’으로 압도적 지지를 보낸 이 작품은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활의 힘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어제 뭐 먹었어? 242DK의 집, 중년 남자 둘, 식비 월 4만 엔(점심 식비 별도). 이 만화는 카케이 시로(변호사)와 야부키 켄지(미용사)의 '식생활'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번 24권의 메뉴는 채소볶음나물 비빔밥, 군만두, 양갈비소테, 흰살생선 세비체, 닭다리살 토마토스끼야끼, 드롭 초코칩쿠키 등이다.
싱아님의 대화: 며칠 전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박완서 작가 아카이빙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일기가 전시된 공간이 인상적이었어요. 돌아가시기 1년전인 2010년 일기장에 “늙는 것도 예술” 이며 “자연에만 맡기면 안되는 게 예술을 고뇌와 노력 없이 영감에만 맡길 수 없는 것처럼” 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수필집 "여덟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 나온 이 문장도 전시회 설명에 인용되어 있었어요: “죽음을 앞둔 시간 아까움을 느끼고, 그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있음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건 인간만의 비장한 업이 아닐까.” 4장을 읽으면서 박완서 작가님의 위 문장들이 함께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내셨길래 이런 문장을 쓰신 걸까요.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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