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오디세이 2026] 5. 죽은 다음

D-29
'없음'과 '있었음' 사이에 채울 슬픔조차 알지 못했던 것은 나의 개인적인 무지가 아니었다. 어느 책에서 말한 것처럼 "죽음은 우리의 교과 과정에 빠져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배운 것이 없다. 장례는 더욱더. 무지의 자리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 온다. 모르는 사람이 와서 내 몫의 장례를 치러준다. 나에게 남겨진 것은 "차가운 유리가 깔린 테이블 위에서 몇 번의 서명을" 하는 역할 뿐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0, 희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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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접은 후,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땅에 떨어져 썩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거 같아요." .... "저는 제 일이 되게 대단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하찮다고도 여기지 않거든요. 내가 땅에 떨어진다면, 언젠가 다들 떨어지니까, 그렇다면 거름이 되면 좋겠지요.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내가 조금 힘들었던 거, 고생했던 거를 다음 사람들은 좀 덜 겪게, 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앞서 지나간 사람의 예의라 생각하거든요."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2, 희정 지음
"그럴 때면 우리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장식 같아요. 중요하지 않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걸어둔 장식이요." 반짝이지만 점멸하는 장식.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3, 희정 지음
"사람들이 사는 데 급급해서 정작 사는 걸 모르고 있는 느낌이에요. 사람들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살지 않고 꿈꾸듯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라고 하잖아요. 그 가면이 나인 줄 알고 휘둘려 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장례 문화만 봐도 사별자가 이거를 진짜로 사고 있는 게 아닌 거예요. 울어야 할 것 같아서 울고, 사람들한테 보이는 거를 신경 쓰다 보니까 진짜 슬퍼할 수 없는 거예요."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4, 희정 지음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4, 희정 지음
좋은 집에 살던 사람이 명당에 묻힌다. 가난한 이들은 공동묘지에 부모의 시신을 몰래 두고 가고, 힘없는 이들은 피란 도중 이름 모를 곳에 자식을 묻었는데, 번듯하게 장사 지낸 집 자손들이 명당에 묘를 썼다는 이유로 대대손손 복을 누리는 건 아무래도 맞지 않다. 그게 세상사 이치라면 이 세상이 도리에 맞지 않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5, 희정 지음
그늘지고 습하고 질척이는 곳에 터를 닦는다면 인류는 생존 자체가 어려웠을 테니, 짐작건대 본능이 일깨우는 마음의 평화인지도 모른다. 다 살자고 하는 일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66, 희정 지음
흠결 있는 땅에 나무를 심고 풀을 기르면서 그 자리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냈다. 먼 훗날, 사람들이 울창해진 곳을 보고 명당이구나 한다. 사는 일과 비슷하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76, 희정 지음
생전장례식을 마쳤다고 해서 새로운 삶이 오지 않는다. 죽음이 오지 않는 것처럼. 단지 살아갈 뿐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2, 희정 지음
이런 기능을 옛날 옛적에는 환갑이나 칠순 잔치가 대신했을지도 모르겠다. ...... 잔치의 주인공들이 어찌 마냥 만수무강만 빌었을까. 자신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잔치가 열리는 마당에 들어섰을 것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2, 희정 지음
생전장례식은 멈춰 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이, 이대로 간다고? 잠시만.' 사는 대로 사는 나를 멈춰 세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2, 희정 지음
그러고 보면 타인의 장례식에 가는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작은 생전장례식일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우리는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사건"을 지닌 존재임을 자각한다. 나만의 것이 아닌 최초와 최후. 그 사이에 놓인 삶을 생각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3, 희정 지음
누구나 온전히 혼자는 아니기에, 인생이 유한하여도 하지 못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존재한다. 개별이자 개별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 때문이겠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5, 희정 지음
자가 분열을 통해 증식하던 단세포 생명체에는 개체의 소멸이라는 개념이 없다. 자신의 유전자와 똑같은 유전자를 형성하는 증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성(sex)이 생기고 유성생식으로 개체 번식을 한다. 이제 개체는 자신의 유전인자의 일부를 물려주고 소멸한다. 죽음이 탄생한 것이다. ...... 그런데 죽음을 만든 작동 버튼이 성별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 지금도, 여전히 성별은 숱한 줄타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5-196, 희정 지음
준칙은 물론, 인간사를 다 뒤집을 수 있는 말인 '남들 보기에'가 등장한다. 체면. 따지고 보면 장례식은 체면 때문에 유지되는 절차이기도 하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8, 희정 지음
장례 문화가 유독 엄숙하고 갑갑한 것이 아니라, 사는 일이 규범에 갇혀 있다. 사는 일 자체가 갑갑하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가는 일에 흥미를 느끼는 건, 결국 규범대로 살 수 없는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어긋난 경험들이 모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든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199, 희정 지음
죽음을 통해 인간은 세계의 불가해함에 직면한다. 이 불가해한 세계에서 내일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산 사람들은 반동을 겪듯 변하지 않는 존재를 부여잡으려 한다. 그리하여 장례는 관례와 약속, 각종 규칙으로 채워진 의례가 된다. 불가해함에 맞서기라도 하는 듯 절차가 엄격하고 틀은 확고하다. 모든 행위에 의미가 부여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04-205, 희정 지음
장례는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문제는 산 자가 지닌 이해관계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란스럽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06, 희정 지음
오늘날의 상주란, 가문을 이어받는 자리가 아니다. 떠난 이와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자리에 가깝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08, 희정 지음
필요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모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다. 아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싶은지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계를 만든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08, 희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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