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오디세이 2026] 5. 죽은 다음

D-29
세상이 말하는 '답 없는 삶'들이 있다. 사회가 애도하는 데 인색한 죽음이 있다. 죽음에 값어치를 매기는 건 이 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값어치를 매겨온 세상에선 죽음에도 손쉽게 값이 매겨진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62, 희정 지음
'진짜로 안타까운' 죽음과 '답 없는 삶'의 결과인 죽음이 나뉜다. 후자의 죽음은 지워진다. 기억은 죽음 뒤에 당연히 다라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줄 사람이 모여야 하고, 사람들이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한다. 사회가 시간과 비용을 내놓는 데 인색한 죽음은 쉽게 지워진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63, 희정 지음
문화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문명이 시작된 최초의 증거로 '치유된 대퇴부'를 꼽는다. 다리뼈가 부러진 사람은 사냥도 이동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대최부가 치유되었다는 건 그가 나을 때까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돌봤다는 증거라고 했다. 공동체가 영위되는 순간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희생을 감수하고 기꺼이 타인을 애도하는 것은, 사회가 유지되는 이유이자 동력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64, 희정 지음
사회적 관계를 묻는 물음 앞에 동성 애인은 친구가 되고, 사실혼 배우자는 이웃이 된다. 질문이 없으면 거짓 대답도 없다. 질문 없는 빈소가 묘하게 안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가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침묵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69, 희정 지음
단지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혈연-법률) 가족'을 중심에 두고 만들어가는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73, 희정 지음
출산, 양육, 부양, 연명, 의료, 그리고 장례까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이 오직 (정상)가족 단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둔 사회는, 가족을 벗어나 구성원이 맺는 다양한 유대적 관계를 보려 하지 않는다. 무연고자가 증가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73-274, 희정 지음
'시신을 포기한 가족'들이 괘씸하다며 속내를 드러니는 걸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눔과나눔 활동가들은 시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위임'한 것이라며 표현을 정정한다. 포기와 위임 사이에는 장례 비용이 평균 1400만 원인 현실이 존재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74, 희정 지음
어릴 적 집을 나간 고인과는 10대 이후로 본 적이 없다는, 이제는 늙어버린 동생이 빈소를 찾은 날. 장례를 치르고 함께 돌아가는 버스에서 그의 교통카드가 연신 잔고 없음을 알려댈 때, 나는 사별자들이 들려준 사연을 책에 담지 않기로 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애도가 아닌 품평을 할 거라는 우려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가난은 디테일하고 삶도 디테일하니까. 한두 시간 남짓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이 들려준 고인과의 관계, 그 안에 박힌 세밀한 경험과 감정을 내가 알 리 없었다. 악마가 디테일에 숨어 있듯, 애도도 그곳에 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75-276, 희정 지음
숨이 멈춘 상태에서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권리가 나에게 있다고 믿어왔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주검에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을 테니. '요람에서 영안실'까지가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까.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79, 희정 지음
쪽방촌에 가면 어르신들이 장례를 꼭 치르고 싶어 하세요. .... 장례를 치르면 그게 낙인이 되니까요.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그 가족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풍토가 있으니까. 장례를 장례 조문 봉사 온 분들도 그런 말을 하세요. '잘 살았으면 장례를 치를 사람이 있겠지.' 아니요. 장례를 치를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거죠. ...... '잘 살아왔다면'에 담긴 의미는 '가족 유지'이다. 잘 살았다면 왜 가족이 없겠냐는 말이다. ...... 이 사회는 (정상)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을 건전하고 바른 시민의 전형적 모습이라 여긴다. 가난하고 혼자인 노년은 건전한 시민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한, 그리하여 낙인과 함께한 인생이다. 장례까지 치르지 않는다면 낙인은 더 강력해진다. 인생의 마침표가 낙인이라니.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2, 희정 지음
죽음도 되게 묵직한데 존엄이라는 말까지 겹쳐지니까, 더 무거워지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존엄이지 않을까 해요.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3, 희정 지음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음과 죽은 이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에요.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요. 죽은 후에도 관계 맺기가 계속되는 거죠.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3-284, 희정 지음
돌봄의 영역이 복지로 제도화되고 있어요. 이미 장기요양보험이 제도화된 것처럼, 장례도 돌봄의 맥락에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거죠.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85, 희정 지음
부모 눈에 어긋남 없는 조건이란 실은 이 사회의 시선에 들어맞는 조건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 희정 지음
얼마나 '좋은 자식'인지는 관혼상례 모든 단계에서 검증받게 마련이다. 특히 장례는 가정의례의 연말 시험 같은 위상이라고 할까. 노릇을 평가받는 중요한 시험대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 희정 지음
가족이 하나의 '투자 공동체'가 된 요즘, 자식 노릇은 더 강조된다. 능력주의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자녀라는 개별의 인적 자본은 자신의 투자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정상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아들딸의 역할이다. 장례는 투자 가능성을 가늠하고 가시적인 성과 배당을 확인하며 재생산하는 장으로 유지된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0-291, 희정 지음
인생이 시험이어선 안 되는 이유는 시험에는 답을 채점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1, 희정 지음
역으로 누군가의 죽음은 세상의 문법을 뒤집어 보이는 질문이 생겨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타인의 장례 앞에서 사람들은 다가올 자신의 장례를 떠올린다. 그로써 살아온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때의 삶이란, 이전과 같은 삶이 아니다. 그가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어떤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다. "죽음에 슬퍼하는 자를 넘어, 그 이후를 살아갈 윤리적 주체"로 산 사람은 자신을 세운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3, 희정 지음
애도는 기억함이다. 그가 살아생전 생성하고 형성해온 관계로 구성된 이 세계를 기억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 자신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 사람들은 새로운 장례를 찾아 나선다.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그리고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294, 희정 지음
유언장을 쓰는 건 믿음 때문이다. 법적 효력과 무관하게, 내 유언장을 읽고 그에 따라줄 이가 있다는 믿음, 아니 바람이 있다.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304, 희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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