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가장 두려웠던 건 숨 막히고 외롭고 어두웠던 그 저녁들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영원으로 남을 싸움이라고, 치열하고 또 승리를 가져다줄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선과 악, 적군과 아군을 언제나 선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의 생각은 대체로 옳았지만, 고려하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 저녁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았다. 그 저녁들이 오리라는 건 분명히 알았음에도……
신이 되기는 어렵다 126-127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절망적이다, 그가 생각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을 관성적인 걱정이나 사고의 굴레에서 떼어 낼 수 없다. 이들에게 모든 것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현대적인 집에 살게 하고 이온 변화 과정을 가르친들 저녁이면 부엌에 모여 카드 노름을 하고 아내에게 바가지 긁히는 이웃 흉을 볼 것이다. 이들에게 그보다 좋은 시간 때우기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돈 콘도르가 옳다. 수 세기에 걸쳐 전해지는, 검증된 불변의 전통과 법칙, 바보 중의 바보도 이해할 수 있는 법칙, 반드시 생각을 하거나 무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군중심리의 전통과 법칙의 거대한 합에 비하면 레바는 별것 아닌 작은 오점에 불과하다. 그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절대주의가 강화되던 시대의 중요하지 않은 협잡꾼>이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127-128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재미있는 건, 3년 동안 그를 지켜보았는데도 아직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가 날 지켜봤더라도 마찬가지로 날 파악할 수 없었을 것 같기는 하다. 사실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나. 바로 이 부분이 흥미롭다! 기초 이론은 심리적 목적 지향성을 기본 유형에 따라 분류하지만, 실제로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심리적 목적 지향성이 있으며, 권력은 누구에게든 주어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일생을 이웃 괴롭히기로 보낸 사람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타인의 수프 냄비에 침을 뱉은 자나 타인의 건초에 유리 가루를 뿌린 자에게도. 물론 그런 자는 축출되겠지만, 축출되기 전에 실컷 남을 무시하고 손해를 끼치고 장난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 자신의 자취가 남든 말든, 먼 후손이 자기 행적을 역사적 영향에 관한 이론에 끼워 맞추느라 머리가 깨지든 말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131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한 가지는 알겠다. 인간은 이성의 물질적 매개라는 것. 인간이 이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전부 악이라는 것. 그리고 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 무슨 수를 써서든? 정말 무슨 수든 써도 괜찮은가……? 아니, 무슨 수든 써도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니면 무슨 수든 괜찮나?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우자!' 그가 자기 자신에게 속으로 말했다. 결정해야 한다. 늦든 빠르든 어쨌거나 결정해야 한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131-132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신에게 깨끗한 손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신이 되기는 어렵다 132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런데 나의 말없는 가련한 친구여, 그 사실이 가장 무섭네. 우리는 그게 어디 있는지 알지만, 겁먹고 멍청하며 눈이 먼, 의심할 줄 모르는 수천 명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그 심장을 파괴할 수 없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무지한 자들, 세상과 단절된 자들,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겨운 노동으로 악해진 자들, 비굴해진 자들, 동화 몇 개 더 모으는 것 말고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절망적일 정도로 많다. 게다가 그들을 가르칠 수도, 단합할 수도, 교정할 수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할 수도 없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15~11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르다. 너무나 이른 시기에, 100년은 앞서 아르카나르에 회색 진창이 생기고 있고, 그 흐름은 저항에 부딪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얼마 안 되는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이들을 구하는 것뿐이다. 부다흐, 타라, 나닌…… 그 외에도 열 명은 더…… 아니 스무 명 더……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15~11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 부분에서 오스카 쉰들러가 생각나네요..
그는 아무도 아니었다. 출신도 보잘것없었다. 그는 나약한 왕국에 출현한 강력한 지성이 아니었다. 역사가 알던, 전제정치 체제를 위한 통일 전쟁이라는 이념에 일생을 바치는 위대하고 무서운 인물이 아니었다. 금이나 여자 생각 밖에 없거나 권력을 잡으려고 사방의 적을 죽이는, 혹은 죽이기 위해 권력을 취하는, 왕의 탐욕스러운 충신이 아니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28~12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이는 것보다 낫다. 오물이 피보다 낫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3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성 미카여. 왜 여기 궁 사람들은 절대로 몸을 씻지 않는 겁니까? 기질하고는.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4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더럽다…… 더러움이 피보다 낫지만, 이건 더러운 것보다 나쁘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4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우노를 밀치고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어젖히고 자신이 그녀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그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었다. 그는 수면 등의 불빛 속에서 새하얀 얼굴과 공포와 혐오로 가득 찬 커다란 눈을, 그리고 그 눈에 비친 비틀대는 자신을, 침이 흐르는 입술과 너덜너덜한 주먹, 싸움으로 옷이 더러워진 뻔뻔하고 역겨운 건달 귀족을 봤다. 그녀의 시선은 그로 하여금 뒤로, 계단으로, 아래층으로, 현관으로, 대문 밖으로, 어두운 거리로, 멀리, 멀리,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게 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64~16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저술가 구르는 돈 레바의 집무실에서 면담을 한 후 아르카나르의 왕자가 적의 자손과 사랑에 빠질 수 없다는 걸 이해했고 왕의광장에서 자신의 책들을 직접 불태웠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7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하지만 네놈은 죽일 줄만 알지! 네놈이나 스스로 교수대에 매달리지 그랬느냐! 전부 다 목매달지 않았느냐! 네놈 밑에 있는 허풍쟁이들만 남았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7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왜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려서부터 배워온 우리 같은 자들, 인간, <인간>이라는 놀라운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신뢰는 어디로 사라진 건가? 나는 구제 불능이다, 그가 끔찍한 감정에 사로잡혀 생각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경멸하지 않나…… 나는 그들을 가여워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한다. 나는 방금 지나친 청년의 어리석음과 야만성을, 사회적 여건이라든가 가혹한 성장 환경이라든가 하는 요인을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저 청년이 나의 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의 적, 내 친구들의 적, 내가 가장 성스럽다고 여기는 것의 뚜렷한 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이론적으로, <전형적인 인물>로서의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라는 인간 자체를, 그의 인격을 증오한다. 침 범벅인 그의 낯짝을, 씻지 않은 몸의 체취를, 그의 눈먼 믿음을, 성행위와 술 외의 모든 것을 향한 그의 적개심을 증오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84~18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제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내가 말해 보지요." "어스름이 두렵소." "어둠 말입니까?" "어둠도 두렵소. 어둠 속에서 우리는 망령들의 지배를 받지요.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어스름이 두렵다오. 어스레할 때엔 모든 것이 똑같이 회색으로 변하니 말이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9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2부에서는 아르카나르에 드리운 회색그림자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돈 루마타가 왜 자신의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지, 그가 매순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엿볼 수 있고요. 2주차까지의 독서내용을 얘기해보겠습니다. 1) 3장~5장까지 읽은 내용 중 기억에 남았던 부분을 얘기해주세요. 2) 돈 레바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안톤의 분석처럼 역사에도 이름을 남기지 못할, 연구자들이 개입할만한 영향력이나 가치도 없는 흔한 권력자에 불과할까요?
1. 일찍이 프롤로그에서 2장까지 읽으며 돈 루마타(=안톤)가 '햄릿형 인간인가?'하고 의문을 던진 바가 있었는데, 5장까지 읽으며 조금 더 확신에 가깝게 변한 것 같습니다. 독백으로 드러나는 그의 생각이 굉장히 풍부했어요. 자신은 공산주의자고 지구의 문명적인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데, 조금씩 귀족 '돈 루마타'로서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거나 당황해하는 묘사라던지요. 문명과 야만이 모두 인간에게 내재된 것게 아닐까요? 3장에서 안톤이 생각하죠. 와가를 지구로 데려가면 어떻게 될까, 하고. 죽거나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적응할 지도 모르겠다고 여깁니다. 정답은 아직 불명확합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으로 보아, 문명과 야만은 모두 인간 안에 내재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간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죠. 상황에 의해, 아니면 편의에 의해. 그는 피보다는 오물을 더 낫게 여기지만, 아직 어떤 오물은 피보다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기에 아직 그의 닻은 지구에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 다음으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2. 사람이 시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죠. 안톤의 독백이 돈 레바에 대한 경계심과 증오에 기반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저는 불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상황과 주위의 어리석음, 착오, 우연에 의해 너무나 어이없는 방식으로 권력을 얻는 사례는 분명 존재하거든요. 그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상황이 맞물렸다면 언제든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위대한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남은 이름들을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것일 테죠.
1. 팜파 남작을 만나 술집을 오가며 온갖 난장판에 휘말리는 부분을 재밌게 읽었어요. 남작이 하는 대사나 행동을 보니 왜 루마타가 그를 좋아하는지도 이해가 되고요. 말씀하신 대로 루마타가 햄릿형 인간이라 생각은 많아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자신을 둘러싼 연구윤리와 상황적 제약 때문에 고민하는 데 비해 남작은 모든 일에 있어 거리낌이 없죠. 모두가 싫어하는 회색중대를 상대로 겁먹지 않고 패기를 부리며 맞서는 모습에서 유머와 해방감도 느껴지는데 루마타와 독자의 감정이 겹치는 순간일 겁니다.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전개가 빠르고 유쾌해서 금방 읽었습니다. 다만 팜파 남작의 행동이 시원시원한 것과는 별개로 이 인물의 방식이 바람직한지는 독자마다 평이 갈릴 겁니다. 남작을 따라 개처럼 취하고 돌아간 루마타는 자신의 망가진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고 집에서 나오죠. 남작은 왕국의 공직을 맡지 않고 자신의 지위와 영지에만 만족하는 인물인 것 같고요. 팜파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그가 회색중대와 그 패거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루마타처럼 시대에 대한 고뇌와 한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고 봤는데요. 자신 같은 귀족들의 대접이 예전만 못하고, 레바의 하층계급들이 권력만 믿고 나대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더 큰 모양새입니다. 2. 레바를 설명할 때 회색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죠. 그의 과거는 불분명하며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인간으로 묘사되고요. 흑도 백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 그 자체인 인물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레바의 불분명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적어주신 대로 역사가 소수의 기념비적인 인물 몇 명 만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치일 겁니다. 모든 역사적 기점과 분기도 그 전부터 이어져 온 과정의 연속에 있죠. 명군이나 폭군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물들이 나타나 활약할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방해받지 않고 등장하니까요. 레바가 권력을 잡기 이전에는 아라카나르도 뛰어난 문인과 예술가들이 있어 왕국이 발전할 수 있었듯, 레바는 쇠퇴기로 가는 과정의 하나일 겁니다. 꼭 대단한 성품이나 악인이 아니어도 누구나 자신이 가진 개인적 한계와 욕망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작가가 정한 느낌이에요. 214~215p에 걸쳐 루마타는 자신이 레바와 그 일당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는데요. 이 사고의 흐름 과정이 왠지 돈 레바가 품었을 법한 생각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전부 감시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의 아르카나르를 만들었다면, 루마타의 이상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그도 결국 돈 레바처럼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의 생각을 품는 과정을 따라가는 모양새죠. 지구의 가치관과 과학과 이성을 배운 루마타조차도 이렇다면 결국 누구라도 돈 레바가 될 수 있을테죠. 소리없이 자라나는 버섯처럼 레바가 설령 역사에서 물러나더라도 제2의, 제3의 회색빛 버섯이 조용히 또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뿌리를 내릴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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