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나는 그들을 가여워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한다. 나는 방금 지나친 청년의 어리석음과 야만성을, 사회적 여건이라든가 가혹한 성장 환경이라든가 하는 요인을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지금은 저 청년이 나의 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의 적, 내 친구들의 적, 내가 가장 성스럽다고 여기는 것의 뚜렷한 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이론적으로, 〈전형적인 인물〉로서의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라는 인간 자체를, 그의 인격을 증오한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184-18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에스토르의 루마타가 될 수 없었다. 약탈과 폭음으로 이름을 떨친 가문의 피를 이어받아 20대 후손이 될 수 없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6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중세 수준의 행성에 지구의 인간들이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또 다른 소설이 있는데요. 제임스 P. 호건의 <생명창조자의 율법>입니다. 다만 소재만 비슷할 뿐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분위기는 마치 거울을 비춘 듯 정반대의 분위기인데요. <생명창조자의 율법>은 금속과 무기물로 이루어진 기계 지성 생명체들의 행성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의 문명도 시대의 한계로 인해 무지와 탄압에 가려져 있지만 <신이 되기는 어렵다>와는 달리 인간들이 적극적으로 외계에 접근하고 교류를 시도하는데요. 지켜봐야 하지만 무력함을 느끼는 이번 작품과 달리 제임스 호건의 소설은 지구와 원주민들의 이해관계와 욕망이 뒤얽혀 마치 한 편의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로 진행됩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나중에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몇 가지 생각나는 문장들을 가져와 봅니다. 기계생명의 원주민이 실험과 추론으로 행성의 모양은 구球의 형태라는 걸 알아내지만 그 발견으로 인해 탄압받는 부분인데 비슷한 내용이 이번 작품에도 있죠.
생명창조자의 율법미래의 문학 8권. 장편소설 <별의 계승자>로 이름을 알린 작가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 작품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의 시대상과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제임스 P. 호건의 초기 명작이다.
"액체는 구체 위에서 제 형상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체의 형상을 한 세계에는 메탄의 바다가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대양은 분명 존재하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천 명의 항해자와 여행자들이 환각에 빠진 것입니까?"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로프베이엘을 쏘아보았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겠는가, 대양을 부정하는 자여?" "답할 말이 없습니다." 로프베이엘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102,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이게 세계일세, 그루크! 먼지투성이 책 따위는 아주 잠시만 잊어보게나. 토굴에 틀어박힌 학자들이, 대양을 건너기는커녕 본 적도 없는 이들이, 산맥 너머는 보지도 못한 이들이 아주 오래전에 쓴 것 아닌가. 이 형상, 오로지 이 형상만이, 지금까지 기록된 모든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라네. 접시 형태를 어떤 식으로 꾸며보아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어느 쪽 형상을 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야겠나?"
생명창조자의 율법 p.196,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내게 남은 시간 전부를 사용해 설명한다 해도 그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루크. 단 하나의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교육이 그대의 신념을 만들었지만, 내 신념은 가능한 모든 질문을 던진 다음에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니까. 비판적 검토를 견뎌내지 못하고, 반대의 말은 단 한마디도 던질 수 없는 신념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겠나?"
생명창조자의 율법 p.199,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그러나 그들 옆에 서서 얼어붙은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티르그는 용의 하인들의 존재 자체도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다. 하늘 너머에서 이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처음으로 목격한 상태였으니까. 세계는 구체였다. 그리고 그 너머, 그로서는 측량할 방도를 모를 정도로 드넓은 공간에, 어떻게 세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무수한 세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55,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아르카나르의 왕궁은 제국에서 가장 깨어 있는 곳에 속했다. 궁에는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물론 대부분이 허풍선이였지만, 개중엔 어쨌든 행성이 구체임을 밝혀낸 바기르 키센스키 같은 학자도 있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6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바기르 키센스키는 국가적 범죄에 버금가는 광기를 품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루마타의 엄청난 노력으로 풀려나 종주국으로 보내졌다. 그의 천문관측소는 불탔고 살아남은 제자들은 도망쳐 숨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17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아이들을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는 루마타에게 열 살짜리 왕자는 이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는 모든 계층 인간들의 반대편에 있는 인간으로 보였다. 어떤 계층이든 상관없이, 바로 이런 푸른 눈을 가진 평범한 소년들 속에서 야만과 무지와 굴욕이 자라난다. 하지만 아이일 때에는 그 더러운 것의 흔적이나 기질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루마타는 때때로 생각했다. 이 행성에서 열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0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운명의 장난으로 이들 중 누군가가 주인으로 태어나거나 주인이 되더라도 이들은 주어진 자유로 뭘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노예가 되려고 애쓸 것이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들 모두가 똑같았더라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인간이었다. 이성의 불꽃을 품고 있는 인간이었다. 아주 멀리 있지만, 도래하고야 말 미래의 불씨가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이들 민중 속에서 발하고 타올랐다.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타올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군홧발에 짓밟혔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들을 원하지 않고 세상 모든 이가 이들 반대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경멸 섞인 반쪽짜리 동정심만 기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회색성은 잔인함 면에서는 인류를 중세로 돌려놓는 마지막 전투에 나서고 패배할 것이며 그 실재적인 힘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5장의 왕의 만찬에서 나오던 럼케이크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해 무화과와 견과류, 꿀, 증류주를 넣은 무화과 푸딩(Figgy pudding)을 먹곤 했답니다. 무화과 열매를 와인에 넣고 끓이고 이걸 밀가루 반죽에 섞어 구워내는 방식인데요. 이것이 시간이 지나 럼을 만드는 캐리비안 제도의 나라들에서 럼케이크로 파생되었습니다. 럼케이크는 말린 과육을 체리향 브랜디나 럼주에 넣어 몇 달 동안 절입니다. 반죽은 설탕과 물을 넣고 카라멜 색깔이 날 때까지 끓인 뒤 과일절임을 넣어 모양을 잡고 구우면 럼케이크가 완성됩니다. 럼주를 직접 넣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럼케이크는 많이 먹으면 취할 수 있다고 하네요. 굉장히 수분이 많은 케이크인가 봅니다. 돈 타메오는 자신의 일화를 굉장히 유머스럽게 묘사했지만 아마도 돈 레바가 만찬장에서 벌인 이 '장난'은 자신의 잠재적인 정적이나 경쟁자를 찾아내려는 일종의 속임수 같네요.
무화과를 좋아합니다. 말린 것보다는 생과일을요. 여름에 전라도 영암에서 나오는 무화과를 사먹곤하죠. 곧 시즌이 다가오네요. ㅎㅎ 크리스마스 케이크로는 독일의 슈톨렌이나 이탈리아의 파네토네를 재미삼아 사서 먹곤 합니다. 럼케이크는 우리에겐 생소한 캐러비언 제도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라 그런지 먹어보기는 커녕 처음 들어보네요. 맛있겠어요!
나의 형제들이다, 루마타가 생각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며, 우리는 당신들과 피로 이어져 있다. 불현듯 그는 자신이 손바닥 위 이성의 반딧불이들을 수호하는 신이 아니라 형제를 돕는 형제, 아버지를 구하는 아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말이 없구나? 많은 이들을 죽여야 할 거야, 그렇지?’ ‘모르겠어. 많은 이들을 죽여야 할지도 모르지. 한 사람 그리고 그다음 사람을. 미래를 거부하면 모두 죽여야 할지도.’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네가 혁명의 전략을 구축할 필요는 없어. 너는 그냥 죽여 버리고 싶은 것뿐이잖아.’ ‘그래. 그러고 싶어.’ ‘그런데 죽일 줄은 알고?’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1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오늘 7장을 읽었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어지네요. 다음 장을 읽기가 두렵기는 처음입니다. 원래는 8장까지 읽으려고 했으나 좀 쉬어가야 겠네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군요.
작성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부키출판사/도서증정이벤트]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기술이다!《프리라이팅》함께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모임] 간편 독서 모임 만들기 매뉴얼 (출판사 용)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웰다잉 오디세이로 계속 이어집니다
[웰다잉 오디세이 2026] 7. 어떻게 죽을 것인가[웰다잉 오디세이 2026] 6.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웰다잉 오디세이 2026] 5. 죽은 다음
천천히 읽어요
세계문학전집 느리게 읽기 (1)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함께 읽는 과학도서] 천천히 곱씹으며 느리게 읽기 <지구의 짧은 역사> 3부
안 노란 책을 찾아라!
안노란 책 리뷰 <지금, 그리고 그때>안노란책 리뷰 <슬픔의 물리학>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안노란 책 리뷰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 > 앤 드 마르켄안노란 책 리뷰 <메데이아> 에우리페데스안노란 책 리뷰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요하임 마이어호프
새벽엔 느낌 좋은 소설로 하루 시작해요
[느낌 좋은 소설 읽기] 3.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느낌 좋은 소설 읽기] 2. 오버스토리 [느낌 좋은 소설 읽기] 1. 모나의 눈
아티초크의 멋진 책!
[아티초크/책증정] 세계 여성 시인선 100『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와 함께해요.[아티초크/시집증정] 감동보장!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 아틸라 요제프 시집과 함께해요.[아티초크/책증정] 구병모 강력 추천! W.G. 제발트 『기억의 유령』 번역가와 함께해요.
‘인생 록 음악’ 추천!
[그믐밤] 49. 국제 암석의 날 기념, ‘인생 록 음악’ 추천해주세요[김영사/책증정] 대화도 음악이 된다! <내일 음악이 사라진다면> 함께 읽어요[그믐밤] 33. 나를 기록하는 인터뷰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새폴스키의 책을 읽습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36.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18. <행동>
동구권 SF 함께 읽어요!
[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함께 읽는 SF소설] 11.노변의 피크닉 - 스트루가츠키 형제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기원 단장과 함께 스토리의 비밀, 파헤칩니다
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1. 호러스토리탐험단 시즌2 : 장르의 해부학 2. 액션 + 로버트 맥키의 액션스토리 탐험단 시즌 2 : 장르의 해부학 읽기 3. 신화 4. 회고록과 성장물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 4회차[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3) 프랑켄슈타인[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2회차 『로빈슨 크루소』(다니엘 디포, 1719)[소설로 읽는 기후위기・인류세 - 우리는 왜·어떤 다른 세상을 꿈꾸는가?] 1회차-마션
히어로와 함께
카라마조프의 피도스토옙스키와 29일을[그믐연뮤번개] 3. [독서x관극x모임지기 토크] 우리 몸에 살고 있는 까라마조프를 만나다슬기로운 과학자의 여정
3권의 책 종류
『육식의 종말』완독 하기! (책 증정)[김영사/책 증정] 장안의 화제! 노화과학을 다룬 <우리는 왜 죽는가>를 함께 읽어요 [인플루엔셜/책증정] 진정한 앎은 무엇인가? <지식의 탄생> 읽고 함께 이야기해요!
청명하다, 꾸준히 읽는 중
독서기록용_웍과 칼독서기록용_필요의 탄생독서기록용_제자리에 있다는 것독서 기록용_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
삼국지를 가슴에 품다
삼국지 전권독파 - 요시카와 에이지 버전으로[모집] 평생의 숙제 인간관계, 삼국지의 영웅들에게 답을 묻다 (w. 『최소한의 삼국지』)
혼자이기에 오히려 깊이 읽은 책들
<인간의 대지> 오랜만에 혼자 읽기 『에도로 가는 길』혼자 읽기천국의 열쇠 혼자 읽기거실의 사자 : 고양이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세계를 정복했을까
부커상을 받았어요
[책증정][1938 타이완 여행기] 12월 18일 오후 8시 라이브채팅 예정! [이 계절의 소설_봄] 『벵크하임 남작의 귀향』 함께 읽기[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서울국제작가축제X비채]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함께읽기 챌린지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