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의 침묵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나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화창한 에메랄드빛 바닷가에서 악취 나는 웅덩이로 머리부터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6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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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오." 루마타가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렇소. 끔찍한 악취요." 돈 타메오가 병을 닫으며 동의했다. "그래도 다시 태어난 아르카나르에서 숨 쉬니 얼마나 좋은지! 포도줏값도 반절로 떨어졌고……" ”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6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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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책을 읽으면서 몰입감과 이입이 굉장히 잘 되는 작품이라고 느꼈는데요.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집중한 시간도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읽으면서 저 스스로도 좀 궁금했습니다.
소재가 독특해서인가? 미래시대에서 중세문명을 바라본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단지 소재만의 힘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제 의식이 남다른가? 선과 악의 대결, 방관하는 선, 악에 대항하기 위해 선을 희생해야 하는가와 같은 주제는 그렇게 낯선 내용은 아니죠. 왜 루마타의 생각과 이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이 가상세계임에도 남의 일 보듯이, 그냥 책을 읽듯이 넘기게 되지 않을까 의문이 맴돌았는데요.
한 대목을 읽다가 어쩌면 이래서일까 생각난 부분이 있습니다.
'루마타는 자신이 어디로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라일락빛 구역 중에서도 익숙한, 돈 레바의 집무실이었다. 돈 레바는 같은 자리에 앉아 정확히 같은 자세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팔꿈치는 책상 위에 올리고 손을 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이 늙은이는 치질이 있지, 루마타는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 p.226
책은 돈 레바의 집무실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어 상황을 지켜보듯, 또는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전지적인 시점에서 상황과 루마타의 생각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중간에 루마타의 시선에서 보듯 1인칭으로 자연스럽게 '이 늙은이는 치질이 있지' 라며 전환되죠. 상황의 관찰자가 되면서도 동시에 루마타 본인의 눈으로 보고 뇌로 생각하는 시점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꼭 이 부분만이 아니라도 이런 시점 전환이 자주 나오죠.
<브이 포 벤데타>, <왓치맨>, <킬링 조크> 등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겸 만화가 앨런 무어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말하는 영상에서 이런 1인칭과 3인칭의 혼합을 '밀착 3인칭(Close third person)'이라고 부릅니다. 이야기를 쓸 때 3인칭 시점은 사용하기 매우 편한 도구입니다. 작가는 작중 공간과 시간의 배경을 뛰어넘어 여러 상황과 심리를 편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3인칭은 그 대가로 인물이 느끼는 감각과 생각의 생생함이나 현재성이 희생됩니다. 1인칭은 인물의 시점에서 주변을 묘사하고 판단해야 하므로 사용에 제약이 많지만 그만큼 독자의 입장에서는 몰입이 쉽죠. 앨런 무어는 1인칭 시점에 대해 '독자를 인물의 뇌척수액 속으로 꽂아넣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1인칭 시점에서는 인물이 지닌 한계, 모순, 갈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인물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거나 주장하기 위해 품는 독백과 심리를 시간선을 따라 함께 독자도 움직이게 되죠. 생각의 흐름도, 생각의 속도도 발을 맞추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인물의 면면을 목격하게 되고 가까워지고요.
1인칭의 밀착성과 3인칭의 전능함을 결합하는 밀착 3인칭에서는 이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져오는데요. 3인칭의 형태로 상황이 묘사되지만 간간이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하게 됩니다. 인물의 밖에서 사건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도 바라보는 구도죠.
앨런 무어는 예시로 문장을 하나 드는데요. '경찰이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문장 대신 '짭새들이 위아래로 꼬라보고 있었다' 라고 하면 같은 상황임에도 독자가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게 되죠. 3인칭을 읽음에도 독자는 인물의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은근히 느끼게 됩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을 때 제 머리 속에서 재생되는 화자가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객관적 상황을 묘사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목소리와, 루마타 본인의 대사 또는 루마타의 입장에서 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안톤의 목소리로 말이죠. 읽을 때는 왜 그랬는지 의식을 못했는데 아마 작가의 이런 시점 사용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신처럼' 아르카나르를 내려다 보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루마타의 육체로 빠져들죠. 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의 시선에서 보는 본인의 고뇌를 모두 느끼니까요.
아르카나르를 지켜만 보는 루마타, 루마타를 내려다 보는 연구소, 이 모든 걸 책 밖에서 읽는 독자의 구도는 신의 시선이 되풀이 되는 액자식의 구성이 됩니다. 우리는 루마타나 연구자들이 느끼는 고민과 딜레마를 책이라는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니까요.
은화
아까 언급한 앨런 무어의 글쓰기 비법에 대한 영상 링크입니다. 06:50초부터 시제 및 시점을 사용하는 방법을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데요. 인칭에 대한 내용은 8분부터 보시면 됩니다. 꼭 글쓰기 목적이 아니더라도 작품의 감상에 있어,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영상이라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JMy0itqv_o
밥심
몰입이 잘 되는 이유를 생각하다가 ‘밀착 3인칭‘ 시점의 문장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니 대단합니다. 링크해주신 앨런 무어의 강연도 잘 봤습니다. 정 작 앨런 무어 작품은 주로 그래픽 노블로만 봐서 ’밀착 3인칭‘ 시점 문장이 잘 묘사되어 있는지는 눈치도 못 챘네요. 주말에 <브이 포 벤데타>와 <왓치맨>을 오랜만에 들쳐봐야겠네요.
ifrain
루마타는 대의에 따라 이동하며 활동하는 거대한 CCTV인 것 같으면서 .. 그 안에 갈등하고 번민하는 ‘작은 인간’ 루마타가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향팔
“ 저자가 뭔가를 생각할 리 없다. 뭔가를 생각해 내기엔 아직 이르다. 그런데 저이 같은, 망치 만드는 대장장이 만 명이 분노한다면 누구든 없앨 수 있지 않은가. 그보다 간단한 게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들에겐 아직 분노라는 감정이 없다. 공포뿐이다. 다들 자기만을 위하고 신만이 모두를 위하지.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6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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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잘 봐라, 친구들, 잘 봐 두라고, 루마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이건 이론이 아니다. 이걸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보고 듣고 영상화하라…… 자신의 시간을, 제기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이걸 겪은 자들의 기억에 고개 숙여 감사하란 말이다! 이 낯짝들, 젊고 멍청하고 공감 능력 없고 온갖 야만성에 익숙해진 이자들을 보라. 우쭐할 것 없다. 당신들의 선조라고 더 나았던 건 아니다……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79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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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악은 없앨 수 없소. 그 누구도 세상에서 악의 총량을 줄일 수 없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지만, 그건 언제나 타인의 운명을 타락시킴으로써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왕은 늘 있을 겁니다. 더, 혹은 덜 잔혹한 왕이 있을 것이고 더, 혹은 덜 야만스러운 남작들이 있을 것이고 무지한 민중이,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은 경외하고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자들은 증오하는 민중이 늘 있을 겁니다. 이 모든 건, 노예가 아주 잔혹한 주인일지라도 자유를 주는 해방자보다 자기 주인을 훨씬 더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노예가 주인의 입장을 너무나 잘 이해해 줍니다. 반면 사사로운 이해에 휘둘리지 않는 해방자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인간이 이렇소, 돈 루마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고."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95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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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요정
저도 이 문장 수집했어요. 정말 공감갑니다.
향팔
“ "자루를 쏟으면 그 안에 있던 알갱이들은 모두 같은 층위에 있지 않고 원뿔형 피라미드를 형성하오. 모든 알갱이들은 아래로 흘러 내려가지 않기 위해 다른 알갱이들을 딛고 있소. 인류도 마찬가지요. 인류가 통일체로 존재하려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매달려 어쩔 수 없이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어야 하오."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96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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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겠소. 인간들이 무엇보다도 노동과 지식을 사랑하도록 하는 거요. 노동과 지식이 삶의 유일한 의미가 되도록!"
'그래, 그건 우리도 시도해 보려고 했었다.' 루마타가 생각했다. '대중을 상대로 한 최면 감응,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재도덕화. 석 대의 적도 위성에서 시도하는 정신 교란……'
"나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루마타가 말했다. "하지만 인류에게서 역사를 빼앗을 필요가 있을까요? 한 인류를 다른 인류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그건 한 인류를 땅에서 없애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류를 살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99-300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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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새
“ '나는 돈 레바를 죽일 거야.' '어째서?' '그는 내 형제들을 죽이고 있어.' '그는 자기가 뭘 하는지 몰라.' '그는 미래를 죽이고 있어.' '그는 잘못이 없어. 시대의 산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가 스스로 죄인이라는 걸 모른다는 거야? 하지만 그가 모른다는 사실이 뭐가 중요해? 내가, 이 내가 그가 죄인임을 아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