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중간에 제2공간과 제3공간이 바뀌는 대목에서 영화 <인셉션>의 장면 일부도 생각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신동경시'라는 도시 풍경도 떠오르네요. 에반게리온에서는 외부의 위협 때문에 도시가 공격받을 것 같으면 건물들이 지하로 들어가거나 또는 외벽을 강철판과 콘크리트로 뒤덮어 요새가 되는 묘사가 나오거든요. 가상의 SF설정이지만 <고독 깊은 곳>은 지역에 따라 생활수준이 전혀 다른 중국의 현재를 문학으로 녹여낸 것 같군요. 중국 도시와 농촌은 완전히 다른 세계임에도 '중국'이라는 국경에 묶여있죠. 공간의 구분이 곧 생활환경의 구분이 되고, 그것이 자연스레 인간의 사고와 계층까지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들은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만나고, 그 후에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적 삶으로 돌아간다. 소도시와 소기업에서는 아마도 화이트칼라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지위의 경계선이 매우 선명하게 그어져 있을 것이다. 대도시 권역에서는 화이트칼라가 임금노동자와 접촉할 일이 거의 없다. 도시의 물리적 배치, 직업에 따른 이동 경로 분리에 따라 사람들은 곧잘 서로 다른 지인 집단 속으로 제한된다.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 p.376~377, 찰스 라이트 밀스 지음, 조형근 옮김
화이트칼라 - 현대 중간계급의 초상현대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화이트칼라’ 계급을 분석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저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어권 사회학자로서 평생 독립적ㆍ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았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학과 사회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 시대의 과제를 탐구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얼마 전에 사회과학 분야로 <화이트칼라>를 읽었는데요. 화이트칼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각 주요 화이트칼라 직업의 특성이 무엇이며, 화이트칼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불안감과 불안정이 무엇인지 사회/역사/경제/정치를 오가며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저자는 도시라는 환경 자체, 즉 대도시의 기능에 따른 구획화와 공간의 분리가 근본적으로 현대인을 고립시킨다고 말합니다. 어디에는 공기관이 있고, 어디에는 상업지구가 있으며, 주거단지는 저기 있고 하는 식이죠. 그러다 보면 사람들은 비슷한 직무와 직군의 사람들끼리만 그것도 '업무적으로만' 표면적으로 교류하고 다시 헤어지기 마련입니다. 사업 이상의 인격적인 교류(사랑, 우정, 친절 등)를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 어느 정도 요구되는데 근본적으로 대도시는 기능에 의해서 조성되었기 때문에 그러기가 어려운 환경이라는 거죠. 우리의 현실세계는 그래도 사회적 계층이 도시 내에 뒤섞여 있지만, <접는 도시>처럼 아예 계층에 따라 도시 자체가 나뉘어 버린다면 사실상 국가나 지역의 의미도 없어질테고 서로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간주할 접점마저 사라질 것 같네요.
식물의 논리는 접힘이 아니라 펼침이다 돤즈펑 저는 다른 사례 하나를 덧붙일 수 있을 듯 합니다. 저도 디자이너인데, 가령 포스터나 모델을 만들 때 아무리 디테일을 많이 넣어도 그것이 완성되면 그 순간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까 샹 선생님이 정원의 정리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정리란 단순히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정원을 이어가려면 더 많은 요소를 안에 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류 선생님이 말한 인공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물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큰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바닥을 깨끗이 유지하려면 매일 닦아야 하지만, 이런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길을 걸어도 어떻게 바닥이 늘 깨끗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죠. 하지만 식물 자체의 성장은 ‘유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합니다. 눈에 보이게 된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며, 특히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샹바오 이어서 저도 덧붙이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요소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즈펑 선생님이 든 인공물의 예처럼 누군가는 바닥을 닦지만 우리는 이걸 보지 못합니다. 사람의 노동은 매우 중요하며, 전체 수도, 전기, 하수도 시스템의 작동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이런 중요한 인공물의 기능을 오늘날 흔히 쓰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접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히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의 존재와 노동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설계가 잘된 건물일수록 접힘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게 자연스러우며 깨끗한 듯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화원은 이 접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펼침’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등나무와 대나무처럼 계속 자라고 펼쳐집니다. 펼쳐지는 과정에서 꽃의 힘이 매일 바닥을 청소하는 노동만큼 강하진 않을 수 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접힘은 사람의 노동 흔적을 없애고 결과만 보이게 하며, 노동 과정은 숨겨집니다. 반면 화원을 만들면 자신이 펼쳐가는 과정을 볼 수 있죠. 꽃은 내일 바로 피지 않을 수도 있고, 반드시 피는 것도 아니며,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자체는 존재합니다. 사람의 주의력은 접힌 상태와 펼쳐진 상태에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 그 시작에 대한 탐구 pp.234~235, 샹뱌오 지음, 박우 옮김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 그 시작에 대한 탐구샹뱌오가 다섯 명의 전문가와 나눈 대화를 통해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드는 방법을 묻는다. 관계 끊기와 자기 소외의 시대에, 생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고를 길어 올리며 삶과 세계의 접촉면을 다시 넓혀가는 사회학적 시도를 전한다.
중국인 인류학자 샹바오의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그 시작에 대한 탐구>라는 책에 하오징팡의 <접는 도시>에서 보여주는 문제의식의 일면을 반영하는 대목이 있네요.
'접힘'과 '펼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인공물과 자연의 차이를 설명하는 아이디어가 좋네요. 우주적 원리에 맞서며 엔트로피를 낮추려는 인공물의 정리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엔트로피가 커지면서도 보기 좋은 자연 정원의 대비가 공감됩니다.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그 시작에 대한 탐구> 책이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책들이 있습니다.
"바닥을 깨끗이 유지하려면 매일 닦아야 하지만, 이런 노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길을 걸어도 어떻게 바닥이 늘 깨끗할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죠." 참 그렇네요.. 전 학생 때 살던 곳 바로 앞이 유흥가였는데요. 학교를 가든, 놀러 가려고 지하철이나 버스정류장으로 가든, 중심가로 가든 꼭 유흥가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밤에도 시끄러운 건 둘째 치고 개인적으로 가장 싫었던 게 냄새랑 오물이었어요. 아침에 등교할 때 지나가면 꼭 도보나 차도 어딘가에 반드시 토사물이 있었죠. 그런데 끝나고 돌아와 있으면, 아니면 다음날이면 토사물은 싹 사라져 있었습니다. 학생 때 어렴풋이 그걸 누가 어떻게 치울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환경미화원 외에도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출근했을 때 치우는 분들도 있었겠죠. 현재 출퇴근하는 곳은 봄이 되어 날이 풀리면 지하철에서 내릴 때 하수도 냄새가 골목 여기저기에서 납니다. 여름이 되면 더 심해지고요. 평소에는 하수도나 배관을 거의 신경 쓸 일이 없죠. 다 지하에 묻혀 있고 아스팔트에 가려져서 안보이니까요. 존재에 대한 의식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악취가 올라오는 딱 그 순간이 하수관의 존재를 알게 되는 때죠. 도시는 우리가 돌아다니고 겉으로 보는 것 이상의 전체적인 체계인데, 우리는 아주 극히 일부의 장면을 그것도 일부의 시간대에서만 바라보고 있죠.
저는 <화이트 칼라>를 제가 특히 관심있는 부분만 골라서 읽었는데도 쉽게 읽혀지지 않더라고요. 저에겐 조금 어려운 책이었는데 @은화 님께서는 끝까지 잘 읽으셨네요. <접는 도시>에서 경제력이 취약한 층이 일자리마저 잃지 않게 하고 인플레이션의 영향도 받지 않게 하려고 밤에만 활동하게 하고 쓰레기 처리같은 산업을 맡겼다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공지능이 더 확산되면 일자리 감소라는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올것이라 더 민감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들에게 어떤 인간성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길가에서 도륙당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집에 들어앉아서 순종적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다들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한다. 도륙하는 자의 냉혈한 야만성, 도륙되는 자들의 냉혈한 순종성. 냉혈함, 이것이 가장 두렵다. 열 사람이 공포로 마비되어 서 있다. 그리고 순종적으로 기다린다. 한 사람이 다가와 희생양을 고르고 냉혈하게 그를 도륙한다. 이들의 영혼은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순종적으로 기다리는 매분 매초 점점 더 더러워진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이 숨어 있는 집에서 비열한 자들이, 밀고자들이, 살인자들이 비밀스레 태어난다. 공포에 패배하는 일생을 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자기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공포가 무엇인지 가혹하게 가르칠 것이다. "나는 이제 못 하겠다." 루마타가 되뇌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서 똑같은 인간이 되어 버릴 것이다. 더 있다간 결국 여기에 온 목적도 잊을 것이다…… 쉬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250-251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건 악마의 금입니다! 사람의 손은 이렇게 깨끗한 금속을 만들지 못합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42,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당신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러한 능력을 얻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물론 악마가 왜 그런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43,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돈 레바가 남들은 인지조차 못한 금화의 깨끗함을 알아챌 정도로 눈치와 두뇌회전이 빠르지만 돈 레바의 생명존중과 불사不死의 신조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대조되네요. 그리고 그런 숭고함을 악마와도 같은 자질로 바라보는 것도 이질적이고요. 그만큼 두 인물이 서로 정 반대의 편에 서 있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거겠죠.
"잘 봐라!" 루마타가 창으로 다가갔다. 창은 궁 앞 광장으로 나 있었다. 벌써 동이 트는 중이었다. 잿빛 하늘에 화재로 인한 연기들이 솟아올랐다. 광장에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중앙에 움직이지 않는 검은 직사각형 같은 게 보였다. 루마타는 자세히 들여다봤다. 검은색 긴 망토를 걸치고 검은 후드로 눈을 덮은 기마병들이 왼손에는 검은 삼각 방패를, 오른손에는 긴 창을 들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4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회색이 승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검은 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아아, 역사학자들이란, 꼬리로 자기 머리를 치는 것처럼……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4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돈 루마타, 저는 당신이 제 편이었으면 합니다. 저는 당신을 죽일 수 없어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러지 못하겠습니다." "두려워하는 거겠지." 루마타가 말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돈 루마타, 저는 당신이 제 편이었으면 합니다. 저는 당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소." 루마타가 말했다. "그저 즐기며 살 뿐이오. 나는 아마도, 신도 아닌 에스토르의 기사 루마타요. 변덕과 편견을 짊어졌으며 모든 것에 대한 자유에 익숙해진 지체 높은 유쾌한 귀족. 알아들었소?"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49,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당신은 그냥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아주 이상한 사람이야. 대천사 같아…… 당신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대담해져. 지금도 봐, 대담하잖아……"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6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는 그녀의 침묵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꼈다. 나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화창한 에메랄드빛 바닷가에서 악취 나는 웅덩이로 머리부터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61,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오." 루마타가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렇소. 끔찍한 악취요." 돈 타메오가 병을 닫으며 동의했다. "그래도 다시 태어난 아르카나르에서 숨 쉬니 얼마나 좋은지! 포도줏값도 반절로 떨어졌고……"
신이 되기는 어렵다 p.268,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책을 읽으면서 몰입감과 이입이 굉장히 잘 되는 작품이라고 느꼈는데요.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집중한 시간도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 읽으면서 저 스스로도 좀 궁금했습니다. 소재가 독특해서인가? 미래시대에서 중세문명을 바라본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단지 소재만의 힘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주제 의식이 남다른가? 선과 악의 대결, 방관하는 선, 악에 대항하기 위해 선을 희생해야 하는가와 같은 주제는 그렇게 낯선 내용은 아니죠. 왜 루마타의 생각과 이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이 가상세계임에도 남의 일 보듯이, 그냥 책을 읽듯이 넘기게 되지 않을까 의문이 맴돌았는데요. 한 대목을 읽다가 어쩌면 이래서일까 생각난 부분이 있습니다. '루마타는 자신이 어디로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 라일락빛 구역 중에서도 익숙한, 돈 레바의 집무실이었다. 돈 레바는 같은 자리에 앉아 정확히 같은 자세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팔꿈치는 책상 위에 올리고 손을 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이 늙은이는 치질이 있지, 루마타는 갑자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 p.226 책은 돈 레바의 집무실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어 상황을 지켜보듯, 또는 천장에서 내려다보듯 전지적인 시점에서 상황과 루마타의 생각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중간에 루마타의 시선에서 보듯 1인칭으로 자연스럽게 '이 늙은이는 치질이 있지' 라며 전환되죠. 상황의 관찰자가 되면서도 동시에 루마타 본인의 눈으로 보고 뇌로 생각하는 시점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꼭 이 부분만이 아니라도 이런 시점 전환이 자주 나오죠. <브이 포 벤데타>, <왓치맨>, <킬링 조크> 등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겸 만화가 앨런 무어가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말하는 영상에서 이런 1인칭과 3인칭의 혼합을 '밀착 3인칭(Close third person)'이라고 부릅니다. 이야기를 쓸 때 3인칭 시점은 사용하기 매우 편한 도구입니다. 작가는 작중 공간과 시간의 배경을 뛰어넘어 여러 상황과 심리를 편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3인칭은 그 대가로 인물이 느끼는 감각과 생각의 생생함이나 현재성이 희생됩니다. 1인칭은 인물의 시점에서 주변을 묘사하고 판단해야 하므로 사용에 제약이 많지만 그만큼 독자의 입장에서는 몰입이 쉽죠. 앨런 무어는 1인칭 시점에 대해 '독자를 인물의 뇌척수액 속으로 꽂아넣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1인칭 시점에서는 인물이 지닌 한계, 모순, 갈등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인물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변명하거나 주장하기 위해 품는 독백과 심리를 시간선을 따라 함께 독자도 움직이게 되죠. 생각의 흐름도, 생각의 속도도 발을 맞추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인물의 면면을 목격하게 되고 가까워지고요. 1인칭의 밀착성과 3인칭의 전능함을 결합하는 밀착 3인칭에서는 이 두 가지 장점을 모두 가져오는데요. 3인칭의 형태로 상황이 묘사되지만 간간이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하게 됩니다. 인물의 밖에서 사건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도 바라보는 구도죠. 앨런 무어는 예시로 문장을 하나 드는데요. '경찰이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문장 대신 '짭새들이 위아래로 꼬라보고 있었다' 라고 하면 같은 상황임에도 독자가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르게 되죠. 3인칭을 읽음에도 독자는 인물의 경찰에 대한 적대감을 은근히 느끼게 됩니다. 저도 이 책을 읽을 때 제 머리 속에서 재생되는 화자가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객관적 상황을 묘사하는 다큐멘터리 같은 목소리와, 루마타 본인의 대사 또는 루마타의 입장에서 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안톤의 목소리로 말이죠. 읽을 때는 왜 그랬는지 의식을 못했는데 아마 작가의 이런 시점 사용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시점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신처럼' 아르카나르를 내려다 보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서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루마타의 육체로 빠져들죠. 신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의 시선에서 보는 본인의 고뇌를 모두 느끼니까요. 아르카나르를 지켜만 보는 루마타, 루마타를 내려다 보는 연구소, 이 모든 걸 책 밖에서 읽는 독자의 구도는 신의 시선이 되풀이 되는 액자식의 구성이 됩니다. 우리는 루마타나 연구자들이 느끼는 고민과 딜레마를 책이라는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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