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12.신이 되기는 어렵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

D-29
"그는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듣습니다. 때때로 대화를 받아쓰는 시늉을 하면 겁에 질린 사람들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하거나 돈을 내밀지요. 그들의 눈에서 그는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개 같은 충성심, 정중한 공포, 황홀하고 무력한 증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0,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대화가 이렇게 끝났다. 언제나 똑같다. 상대를 시험하고 양의적인 비유를 조심스레 주고받고…… 일주일 내내 쓰레기 같은 놈들과 거짓 대화를 하는 데 영혼을 바치면서 정작 진짜 인간을 만나면 대화할 시간이 없다. 숨겨 주고 목숨을 구해서 안전한 장소로 보내야 하고, 그는 자신이 대화를 나눈 상대가 친구였는지 변덕스러운 괴짜였는지 모르는 채 떠난다. 그런데 나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나. 그가 뭘 원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뭘 위해 사는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난 가장 끔찍한 게 뭔지 깨닫는 데 15년 걸렸어. 인간의 모습을 잃는 게 끔찍한 걸세, 안톤. 영혼을 더럽히고 잔인해지는 것."
신이 되기는 어렵다 64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지구는 천 년 하고도 또 천 파섹 떨어져 있으니."
신이 되기는 어렵다 p.6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1파섹은 대략 3.26광년이라고 합니다. 1000파섹이면 약 3,260광년이 되겠죠. 그리고 1광년의 거리는 찾아보니... 여기에 굳이 옮겨 적어도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숫자는 아니더군요. 하지만 이 문장을 통해 지구와 주인공이 발 딛고 있는 행성이 얼마나 동떨어진 곳인지를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좌표로도 알려주는 것이 인상 깊네요. 저에게는 천 파섹보다 천 년이라는 시간대의 차이가 더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나마 인간이 받아들이고 인지할 수 있는 정도의 단위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
저도 이 표현이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현지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구와의 물리적 거리보다 시간(문명)적 거리가 더 강하게 와닿을 수 밖에 없겠죠. 천년이란 인간이 직접 경험할 수는 없어도, 그럭저럭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의 시간이기도 하고요. 전혀 무관계한 작품이긴 한데,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쓴 책인 <술탄과 황제>도 떠오르네요. 첫 문장이 이랬거든요. “천년보다도 더 긴 하루였다.”
저도 시간에 관한 문장 중 재밌어서 수집했던 문구가 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아서 C. 클라크의 <낙원의 샘>에서 나오는데요. 148p "피라미드도 잊지 마시죠." 압둘라 대통령이 웃었다. "그걸 뭐라고 불렀더라? 인류 역사상 최고의 투자?" "정확합니다. 4천년이 지난 지금도 관광수익이 나고 있으니까요."
<낙원의 샘> 재밌게 읽었던 소설입니다. 특히, 우주 엘리베이터 또는 궤도 엘리베이터에 대해 클라크가 상세히 묘사를 해서 더 흥미로웠죠. 소설에서 우주 엘리베이터의 시작점이자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된 곳이 실제 클라크가 살았던 나라 스리랑카의 유적인 시기리야 록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시기리야 록을 찾아보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이 시기리야 록입니다. 우주 엘리베이터는 한 때는 일본의 건설회사가 정말 개발할 것같은 횡보를 보이기도 했는데 요즘은 잠잠해졌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나노튜브를 써서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길이의 케이블을 만들어서 설치한다는 것이 글쎄요, 아직도 믿기지는 않습니다.
<낙원의 샘>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기리야 바위를 설명하는 부분이 뭔가 익숙하다 싶어서 찾아본 기억이 떠오르네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집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들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취미로 구독 신청을 하신 잡지들을 버리지 않고 한동안 모아뒀거든요. 초등학생 때까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 채 거기에 나오는 동식물과 풍경, 사람들의 온갖 사진과 그림을 보곤 했습니다. 그 중에 시기리야 바위와 그곳에 그려진 벽화도 나왔고요. 어린 나이였음에도 처음 보는 이국의 벽화가 인상 깊었는지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낙원의 샘>을 읽다 궁금해서 찾아보곤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스리랑카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가능케 하고자 실제보다 훨씬 더 적도에 가깝게, 즉 엘리베이터가 지구의 축과 수직에 가까워지도록 위치를 약간 바꿨다 하더군요. 독서를 시작할 때 읽은 초기의 과학소설 중 하나여서 그런지 몰라도 아서 클라크가 묘사한 스리랑카과 히말라야의 모습이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그때 수집해 둔 또 다른 문장이 기억나 적어 봅니다. p.30 "명성은 박차일지니..." 라자싱헤는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읊었다. 그다음이 어떻게 이어지더라? "고귀한 정신의 마지막 약점... 즐거움을 멸시하고, 수고로운 나날을 살아가게 한다."
안녕하세요. 저도 참여하려고 오늘 책을 빌렸어요. ^^ 찬찬히 읽어나가겠습니다.
안녕하세요 @ifrain 님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되셨으면 합니다 😄
"읽고 쓰기, 읽고 쓰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네, 형제들! 글쎄 행복은 돈에 있는 게 아니고 농민도 사람이라는 거야. 갈수록 더하다니까. 혐오스러운 시들이야. 폭동도 불러일으킬……"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그 시각 화재로 인한 빛과 불꽃에 물든 아르카나르 왕국의 들판과 길, 오솔길을 따라 지치고 겁먹고 절망에 살해당했음에도 단 하나의 믿음을 경찰관도 같이 굳게 지키는 자들이 땀범벅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모두에게 물어뜯기고 피가 날 때까지 맞은 다리로 검문을 피해서 도망치고 걷고 방황하고 있었다. 병으로 죽어 가고 무지에 찌든 민중을 고치고 교육할 능력이 있고, 또 교육하려 한다는 이유로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수백 명의 불행한 자들, 아름다움을 모르는 민중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자 신처럼 진흙과 돌로 두 번째 자연을 창조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악의 힘에 겁먹은 약한 민중을 위해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고 밝혀내려 한다는 이유로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자들…… 의지할 데 없고 선량하며 교활하지 못한,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보다 한참 앞선 자들이었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7,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이 행성을 통틀어 나 혼자만 무서운 그림자가 이 나라를 덮치는 걸 보고 있다. 하지만 이걸 보면서도, 그러면서도 이게 무엇의 그림자고 왜 생겨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6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맙소사, 이야기를 지어낸다니까! 세상이 둥글다고 말이야! 내 세상은 네모니까 혼란스럽게 좀 하지 말았으면……!" "읽고 쓰기, 읽고 쓰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네, 형제들! 글쎄 행복은 돈에 있는 게 아니고 농민도 사람이라는 거야. 갈수록 더하다니까. 혐오스러운 시들이야. 폭동도 불러일으킬……" "그놈들을 다 말뚝에 박아야지, 형제들……! 나였으면? 직접 물어봤을걸.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네놈을 말뚝에 박겠다! 시를 쓴다고? 말뚝에 박아 주지! 도표를 읽을 줄 안다고? 너무 많은 걸 아니까 말뚝행이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46쪽,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하루 동안 쌓인 증오를 풀어 버리고 싶은데, 그래봤자일 것 같다. 인도적으로 모두를 용서하고 신들처럼 초연히 있어야 한다. 그들이 서로 난도질하고 모욕하더라도 우리는 신처럼 초연할 것이다.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신들 앞에는 영원이 있으므로……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4,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책 제목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연상하게 하는 문장이네요. 혼자 읽을 땐 별 생각 없이 그냥 보고 넘겼는데요, 이렇게 수집해주신 문장을 다시 읽으니 이 대목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네, 저도 책 제목 때문에 이 부분을 눈여겨 보았어요.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쓰레기 같은 놈들과 거짓 대화를 하는 데 영혼을 바치면서 정작 진짜 인간을 만나면 대화할 시간이 없다. 숨겨 주고 목숨을 구해서 안전한 장소로 보내야 하고, 그는 자신이 대화를 나눈 상대가 친구였는지 변덕스러운 괴짜였는지 모르는 채 떠난다. 그런데 나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나. 그가 뭘 원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뭘 위해 사는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5,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네놈을 말뚝에 박겠다! 시를 쓴다고? 말뚝에 박아 주지! 도표를 읽을 줄 안다고? 너무 많은 걸 아니까 말뚝행이다!
신이 되기는 어렵다 p.46,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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